鶴山의 草幕舍廊房

文學산책 마당 3179

[스크랩] 추사 김정희 - 묵란 수작

조선후기 학자·서화가·금석학자(金石學者).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 본관은 경주(慶州).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생.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박제가(朴齊家)의 인정을 받아 그의 문하생으로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809년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의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6년에 김경연(金敬淵)과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판독하여 그 전까지의 잘못을 시정하였다.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병조참판에 이르렀다. 40년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와 관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어 9년 만에 풀려났고, 51년에는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예..

文學산책 마당 2005.11.20

[스크랩] 허난설헌의 시와 그림

허난설헌 作그녀는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처럼 말했었다고 합니다.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그녀는 짧은 생에 커다란 아픔앓이만을 하다가 젊디 젊은 나이에 자는듯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강릉의 명문가에서 두번째 부인의 둘째 딸로 태어나, 아버지는 경상감사를 지냈던 동인의 영수이고(화담 서경덕의 제자), 큰 오빠 허성은 이조, 병조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균 역시 형조, 예조 판서를 지낸 인물입니다. 임금은 동생 허균을 너무나 아끼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노라고 말하라며 울며 애원까지 하게 되지만, 결국 허균은 봉건사회타파와,이상세계실현에 실패한 것을..

文學산책 마당 2005.11.20

[스크랩] 對 酒 ( 대 주 )

對酒(대주)                             백거이(白居易 772~846, 당나라 시인)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쟁하사)달팽이 뿔 끼리 싸움은 웬 일인가石火光中寄此身(석화광중기차신)부싯돌 번쩍이는 찰라 같은 인생인데隨富隨貧且歡樂(수부수빈차환락)부자건 가난하건 그런 대로 즐겁거늘不開口笑是痴人(불개구소시치인)입 벌려 못 웃는 자 이 또한 바보일세白樂天이 장안에서 형부시랑 벼슬할 때 지은 對酒라는 제목의 다섯 수의 시 중 하나로 莊子에 나오는 달팽이 우화와 도척과 孔子의 일화를 빌려 지었다. 어차피 짧은 인생인데 대범하고 낙천적으로 살라고 권한다. 마음 맞는 친구와 술잔을 마주할 때 권주가로 읊조리기에 어울리는 시이긴 하지만 이 시 속에 담긴 뜻은 매우 심오하다.쪻蝸牛(와우):달팽이. 蝸牛之爭(..

文學산책 마당 2005.11.20

[스크랩] 시선(詩仙) 이백 (太白)

시선(詩仙) 이백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짱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

文學산책 마당 2005.11.20

[스크랩] 시성(詩聖)두보(杜甫)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文學산책 마당 2005.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