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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와 '케임브리지5인조'

鶴山 徐 仁 2005. 12. 24. 14:32
젊은 시절 공산주의에 물들게 된 케임브리지 출신 엘리트들은 '사상의 조국'인 소련을 위해 주저 없이 KGB의 간첩이 되었다.
  

 1. 케임브리지 5인조
 
 
 
 '케임브리지 5인조'(킴 필비, 도널드 매클린, 가이 버제스, 앤소니 블런트, 존 케른크로스)는 KGB가 영국 정보기관 MI6에 침투시켰던 전설적인 스파이들이다.
 
 
 
 '5인조' 가운데 대표격인 킴 필비는 케임브리지대학 재학 시절 버제스,매클린 등과 사귀면서 공산주의 이념에 빠져들었다.
 
 1934년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우익정권이 무자비하게 사회주의 폭동을 진압하는 것을 목격한 필비는 더욱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됐다. 오스트리아에서 필비는 KGB에 포섭됐다.
 
 이후 그는 KGB의 지시에 따라 극우파로 위장전향했다. 스페인 내전시에는 런던타임스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면서 친프랑코적인 기사를 많이 써서 '극우파' 언론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939년 필비는 버제스의 추천으로 대외정보기관인 MI6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MI6 내에서 동구-소련 담당 요직들을 두루 거치는 동안 MI6가 동구이나 소련에 침투시킨 조직원들의 명단을 KGB에 넘겨주는 등 소련을 위해 암약했다. 그는 한때 MI6 총책 물망에 오르기까지 했으나,정체가 탄로나자 1963년 소련으로 망명했다.
 
 
 
 앤소니 블런트는 모계(母系)로 영국 왕실과 먼 친척뻘인 '빵빵한' 집안 출신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 시절 공산주의에 물든 그는 1933년 케임브리지대학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KGB에 포섭됐다. 그는 후배들에게 "표류하는 영국과 파국을 향해 치닫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무슨 일이든 하라"면서 "전세계를 구원할 횃불인 소련을 시급히 도와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블런트는 영국 국내방첩기관인 MI5에 침투했다. 전쟁 중 그는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 동구국가 망명정부 관련 정보들을 소련에게 넘겨주었다. 이들 정보가 전후(戰後) 소련의 동구정책에 일조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연합군최고사령부의 기밀들도 소련으로 넘겼다.
 
 전쟁이 끝난 후 블런트는 영국왕실 소유 미술품 관리책임자를 지냈고, 1956년에는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런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그는 각계각층의 요인들과 자유롭게 접촉하면서 많은 정보들을 얻었고, 이를 소련에 넘겨주었다.
 
 
 
 존 케른크로스는 2차대전 당시 영국의 암호해독기관인 정보통신본부(GCHQ)에 들어가 극비암호해독장치인 울트라가 해독한 암호들을 KGB에게 넘겼다.
 
 MI6에 들어간 가이 버제스는 킴 필비 등을 MI6로 끌어들이고, 영국과 미국 첩보기관의 소련-동구 공작관련 정보나, 영국으로 망명하려는 소련 정보요원들에 관한 정보를 소련에게 넘겼다.그는 나중에 후술하는 매클린과 함께 소련으로 망명했다.
 
 
 
 도널드 맥클린은 영국 외무부에 들어가 대미(對美)관계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냉전 초기 미국의 대소(對蘇)정책이나 안보능력 관련 정보들을 소련에게 넘겨 주었다.
 
 1948년 트루먼 대통령은 B-29폭격기를 배치했다. 동구에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던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였다. 트루먼은 이 B-29폭격기들에 핵무기가 탑재된 것처럼 블러핑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속지 않았다. 이미 메클린을 통해 이들 B-29에는 재래식 무기들만이 탑재되어 있고, 미국이 보유한 원자폭탄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클린은 한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자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 정부가 한국전쟁을 '제한적'으로 수행할 것이며, 맥아더 원수의 주장대로 만주를 공격하거나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획득해서, 소련에게 넘겼다. 소련은 이 정보를 중공에게 제공했다. 미국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 중공은 주저없이 한국전 개입을 감행했다.
 
 
 
 2. 그들은 왜 조국을 배신했나?
 
 
 
 이들은 왜 소련의 간첩이 되었을까?
 
 
 
 이들이 대학에 다닐 무렵, 영국은 대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매클린,버제스,블런트,케른크로스는 이념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동성연애자 또는 양성연애자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억압하고, 제1차세계대전과 대공황이라는 파국을 불러온 기성세대를 증오했고, 점차 마르크스주의만이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이들에게 KGB가 접근했다. KGB는 영국의 정계, 관계, 정보분야의 엘리트들이 대부분 케임브리지나 옥스포드에서 배출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접근한 것은 오스트리아의 공산당원 아르놀트 도이치와 사제 출신의 헝가리 공산주의자 테오도르 말리였다.
 
 매클린 등의 눈에는 이미 유럽 각지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오랫동안 일해 온 이들이 '공산주의 혁명의 모범적 전사(戰士)'로 비쳐졌다. 도이치와 말리는 매클린 등의 이상주의,대의명분에 호소했다.
 
 매클린 등은 KGB의 구애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소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모순에 찬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것이었지, '간첩질'이나 '반역'이 아니었다. 아니 이미 그들에게 조국 영국은 타도의 대상에 불과했고, 진정한 조국은 '사상의 조국'인 소련이었다.
 
 후일 이들이 대학을 졸업하자 KGB는 각계각층에 침투해 있는 자신들의 요원들을 동원해 이들의 공직 진출을 지원했다.
 
 
 
 웃기는 것은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들을 해방시키고, 제국주의를 타도한다는 '신조'때문에 조국을 배신했던 이들이 실제로는 그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입으로는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외쳤지만, 이들 가운데 그 누구도 노동자계급 출신도 아니었고, 노동의 현장에서 땀을 흘려본 적도 없었다.
 
 블런트의 경우를 보자. 후일 정체가 드러나 MI5의 조사를 받게 됐을 때, 그는 조사관에게 비웃듯이 "당신은 1930년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마치 자신의 반역이 모순으로 가득찼던 1930년대라는 시대상황의 소산이라는 듯이....
 
 하지만 그 1930년대에 '빵빵한' 집안 출신인 블런트는 부모로부터 넉넉한 용돈을 받으며 대학을 보냈고, 경치 좋은 곳에 자리집은 가족별장에서 방학을 보내곤 했다. 반면에 그를 조사했던 MI5요원은 1930년대 대공황의 와중에서 직장을 잃은 후 알콜중독자가 되어 생을 마친 노동자의 아들이었다.
 
 '제국주의 타도' 도 이들이 내건 찬란한 명분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이들은 발틱3국 침공, 폴란드 분할점령 등 소련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했다.
 
 
 
 3. '케임브리지 5인조', 한국에는 없을까?
 
 
 
 강정구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그가 2001년 북한 방문시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라고 썼다가 국가보안법 상 고무찬양죄로 기소됐던 데 대한 재판이 뒤늦게 속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와는 별도로 "6.25는 통일전쟁","우리나라는 미국의 신식민지","맥아더는 전쟁광" 등 북한의 선전-선동에 동조하는 글을 기고해 온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강정구는 '일개 학자' 신분으로 그런 헛소리를 했다지만, 청와대나 안보관련 요직, 각종 과거사 관련 위원회 인사들, 열우당 국회의원들 가운데에도 강정구 정도의 '고무찬양행위'를 저지르거나, 저지르고 있는 자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행위가 단지 '고무찬양'에 그치는 것이냐 하는 점이다. 1970,80년대를 살아왔던 그들의 역사적 체험과 의식구조는 '케임브리지의 5인조'와 상당히 흡사하다.
 
 
 
 '케임브리지 5인조'가 영국의 보수적인 기성질서에 대한 반발과 세계대공황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혁파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공산주의와 포옹했다면, 우리 사회의 좌파 지식인들은 박정희 정권 이래의 귄위주의적 통치체제와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빈부격차 등에 반발해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을 받아들였다.
 
 킴 필비가 오스트리아 노동자 봉기에 대한 무력진압을 보며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혔다면, 1980년대 운동권은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급속히 좌경화됐다.
 
 
 
 '케임브리지 5인조'에게 영국은 모순과 억압(자신들의 성적 취향에 대한 억압까지 포함해서)으로 가득한 사회였다. 그들에게는 '사상의 조국'인 소련이 진정한 조국이었다.
 
 국내 좌익 세력에게 대한민국을 친일파도, 봉건유제도 청산하지 못한, 모순에 찬 나라요, 자신들을 감옥에 보냈던 '원쑤'의 나라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항일빨치산',민족영웅' 김일성이 창건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진정한 조국이다.
 이들의 눈에는 이승만,박정희,젼두환의 '독재'는 보여도, 김일성-김정일의 부자세습독재와 인권유린은 보이지 않는다. '케임브리지 5인조'가 소련의 전체주의 통치와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 눈감았던 것처럼....
 
 
 억압과 모순덩어리인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사상의 조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열정에 가득차 있는 그들에게 누군가가 접근해 와서 "통일애국사업을 하자"고 제안해 왔을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과거 '조선노동당중부지역당' 사건 관련자들의 경우, 조선노동당(혹은 한민전)이 자신과 같은 말단의 혁명전사를 선택해 주었다는 사실을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감격에 겨워하며 조직에 가입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자들이 단지 '고무찬양'만 할까?
 
 오히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강정구 같은 자의 '고무찬양'은 덜 위험할 수도 있다. 청와대나 국가안보정책을 책임지는 위치에 들어가거나, '대통령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위치에 앉은 자들이 그런 지위를 이용해서 저지를 수 있는 짓들을 생각해 보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케임브리지의 5인조'가 영국 외무부나 MI6,MI5의 간부로, 혹은 '영국왕실의 친구' 로 영국과 서방세계의 안보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던가?
 
 
 
 어디 그들 뿐이랴? 드러나지 않은 자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KGB가 케임브리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북한도 젊은 대학생들에게 접근해서,숱한 '두더지'(드러나지 않은 고정간첩)들을 키워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일찌기 김일성은 1970년대 초에 이렇게 교시했다.
 
 "남조선에서는 우리처럼 공직임용시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는다. 자기가 능력만 있으면 사관학교도 가고, 고시에 붙어 고위직에 오를 수도 있다. 똑똑한 고등학생들을 찾아 대학이나 사관학교에 보내야 한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들은 데모도 하지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게 해서 고시합격도 시키고 학계등에도 광범위하게 진출시켜야 한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났다. '김일성 장학생'들 가운데는 장-차관급 고위공무원이나, 고위 장성으로 진출한 자도 나왔을 수 있고, (운동권 출신이 아니라) 학계나 기업인, 전문직 출신 정치인이 나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 이 시간에도 '사상의 조국'을 위해, 혹은 자신들의 출세를 후원해 준 북한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혹은 북한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약점이 잡혀서), 그리고 남도 북도 아닌 '통일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사명감으로, 자신들의 반역행위에 대한 죄의식 없이, 암약하고 있을 것이다.
 
 
 
 4. 반역자들의 말로
 
 
 
 하지만 그들의 반역행위는 어떠한 보답도 받지 못할 것이다. '케임브리지 5인조' 가운데 소련으로 망명한 버제스, 매클린, 필비가 비참한 말년을 보냈던 것처럼....
 
 이들은 처음에는 소련으로부터 영웅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소련땅에서 공산혁명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해 보려는 이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잡지사 근무 등 하잘 것 없는 직업이 주어졌고, KGB의 감시 아래 놓여졌다. 한번 조국을 배신한 자는 또 다시 배신자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매클린은 자기가 선망하던 '사상의 조국'이 자신이 증오하던 영국보다 훨씬 더 억압적이고,관료주의적이며, 부패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소련 당국에게 자신의 가족들을 데려다 달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가 거절당하자 그는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고 나서야 소련 당국은 영국과 교섭해 그의 가족들을 소련으로 이주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매클린의 정신적 고통이 치유되지는 않았다. 그는 현실공산주의의 모순을 보며 배신감에 사로잡혀 알콜중독자가 됐고, 걸핏하면 아내에게 손찌검을 했다. 견디다 못한 그의 아내는 1963년 소련으로 망명한 필비와 눈이 맞아, 그와 이혼하고 필비와 결혼했다. 매클린은 죽은 날까지 자신의 일생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지냈다.
 
 
 
 버제스도 알콜중독자로 살다가 필비가 망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KGB로부터 안락한 노후 생활을 보장받은 필비도 알콜중독자가 되어 <런던 타임즈>를 옆구리에 끼고 모스크바 시내를 방황하곤 했다.
 
 그는 말년에 안드로포프 KGB의장의 상담역을 지내다가 1988년 사망했다. 군장(軍葬)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소련의 당-정-군-KGB의 요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소련 훈장을 주렁주렁 단 장성복 차림의 그는 소련군악대의 장중한 조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정중하게 매장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후, 그가 신봉했던 공산주의도, '사상의 조국' 소련도, 역사의 무덤 속으로 매장되고 말았다.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오늘 조국 대한민국에 등을 돌리고, '사상의 조국' 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위해 복무하고 있는 수많은 좌익 분자들의 운명도, '케임브리지 5인조'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 사족) 이름만 대면 할 수 있는 몇몇 좌익 지식인들의 경우,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이나 부동산 투기, 저술이나 강연 수입 등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다. 잘 나가는 부르조아 집안 자제들이었던 '케임브리지 5인조'가 노동자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것처럼...
 
 
 
[ 2005-12-24, 12:41 ] 
출처 : 프리존www.freezone2005.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