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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전적(戰績) 덕분에 권 의원은 언제나 민노당 대선후보 ‘0순위’다. 이를 반영하듯 권 의원은 2002년 대선을 앞둔 한 토론회에서도 “이번에 안 되더라도 10년 안에는 당선될 것”이라며 의지를 밝혔다. 이야기대로라면 그는 대선에 최소한 두 번은 더 도전할 계획인 셈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수(四修) 끝에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것을 감안하면 터무니없는 꿈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권영길 대통령’의 탄생 가능성을 높게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 7월 18일 한국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권 의원은 차기 대선 후보 순위 10위에 머물렀다. 물리쳐야 할 경쟁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각각 1.2%와 3.9%에 그친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 대선 결과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 지지율 상승 속도로 10년 안에 꿈을 이루기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인다.
왜 그는 대통령이 되기 힘든 것일까. 그 이유를 이모저모 따져보았다.
◆“인기가 없다” 비대중적이란 한계
지난 대선에서 권 의원은 ‘대중적 이미지’를 지향한다는 뜻을 꾸준히 밝혔다.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 지지층 스펙트럼을 넓히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민노당 강령이나 그리고 당시 출마 선언에 비춰본 ‘권영길’은 대중적인 관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그 내용을 꼼꼼히 훑어본 국민들일수록 권 후보에게 선뜻 표를 주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민노당 강령에는 ‘이윤을 목적으로 한 사적 소유권 제한과 생산수단 사회화’ ‘농지와 소규모 생활터전용 소유지를 제외한 일정 규모 이상의 토지 국·공유 원칙’ 등이 담겨있다. 실현 가능성을 떠나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정신에 비춰볼 때도 의문이 생기는 내용들이다. 이 때문에 권 의원은 대선 후보였던 2002년 10월 관훈토론회 등에서 당 강령과 이념적 정체성에 대해 집중적인 질문을 받았다.
같은 해 3월 작성된 ‘당 대표 출마의 변’이란 문건 내용도 도마에 올랐다. 지적 대상이 된 것은 ‘모든 것의 핵심에는 당의 주체역량이란 문제가 있다’ ‘당원의 의식화·주체화, 당 활동의 실천역량 강화, 전 당원의 간부화가 필요하다’는 문구였다. “사용된 언어가 일반인과 너무 동떨어졌다” “일반인들도 볼 수 있는 문건인데 좀 더 쉽게 부담감을 안 주는 언어로 썼으면 좋지 않았겠냐”는 비판이 나왔다.
여기에 비춰볼 때, 권 의원이 당선되기 위해선 그의 철학과 이념을 바꾸거나, 반대로 대중의 생각이 권 의원에 맞게 바뀌는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기득권층의 반감과 제한된 인재 풀(pool) 등 취약한 집권 기반을 어떻게 다질 것인가 하는 난제가 그의 앞에 쌓여 있다.
◆뭉쳤던 지지층도 쉽게 흩어져
독자적 득표력이 약하다는 것도 고민이다. 이를 잘 보여준 게 2002년 대선이다. 당시 대선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와 갈라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튿날 아침 ‘노 후보를 찍어 달라’ ‘권 후보는 다음에 하면 되지 않냐’는 등의 문자메시지가 권 후보 지지자들의 휴대전화에 쇄도했다. 민노당 홈페이지 게시판은 노 후보에 대한 투표를 호소하는, 읍소에서 협박에 이르는 다양한 글로 도배됐다.
결국 ‘반(反)이회창’ 정서의 지지층 다수가 노무현 후보 쪽으로 돌아섰다.‘노 일병 구하기’의 희생자가 된 권 후보는 득표율 3.9%의 성적에 머물러야 했다. 향후 대선에서도 진보와 보수 진영의 두 주요 후보 간 박빙 승부가 펼쳐질 경우 똑같은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권 의원 지지자들은 여차하면 ‘또 다른 노 일병’ 구출작전에 뛰어들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진보층 표를 분산시키지 말고 대의를 위해 출마를 포기하라’는 요구도 그를 괴롭힐 소지가 있다. 미국 소비자운동의 대표주자 랄프 네이더도 대선출마 때마다 지지층이 겹치는 민주당 당원들로부터 똑같은 주문을 받아야 했다.
◆극단적이고 공허한 공약들
권 의원이 이전 대선에서 제시한 공약들도 대중적 지지를 얻기 힘들어 보인다. 극단적이고 공허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관심을 끌기엔 충분하지만 실현가능성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권 의원의 경우 소외 계층을 배려하는 공약을 주로 내놓는다. 대표적인 게 2002년 대선 당시 제시한 ‘부유세’ 도입 공약이었다. 당시 권 후보는 “집권하면 과세표준 기준으로 자산 10억원 이상을 가진 부유층으로부터 11조원의 부유세를 걷어 거의 (완전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제도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높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 모은 공약이었다. 하지만 선거용으로 제기된 만큼 실현가능성보다는 상징성이 더 크다는 평가가 많았다. 특정 지역에 대한 토지 국·공유제 실시와 재벌해체, 노동자의 기업 소유, 미군 철수 등 다른 공약들도 마찬가지였다.
참신함에 끌렸다가도 공약을 본 뒤 그에게 거부감을 느낀 유권자가 제법 된다는 분석이 많다. 그만큼 향후 대선에서 그가 제시할 공약 내용도 승부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위법 경력과 의원직 상실 위기
1995년 노동관계법 위반으로 기소돼 10년 가까이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점도 부담이다. 1994년 민주노총의 전신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공동 대표였던 권 의원은 지하철노조 파업집회에 참석, 지지연설을 해 노동쟁의조정법상의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위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권 의원은 1심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올해 1월 14일 2심 결심공판에서 징역 3년을 구형 받아 의원직 상실 위기까지 몰렸다. 10년 전 위법 경력이 현재의 의원직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은 권 의원의 입지를 좁히는 부분이다.
권 의원은 “3자 개입 금지 적용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열린우리당도 지난 7월 노조의 제3자 개입금지 조항 완전 삭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노회찬 의원과의 경쟁 부담
권 의원이 가장 경쟁력 있는 민노당 후보란 데 이견 달 사람은, 적어도 작년 이전엔 없었다. 대중적 인지도 등에서 당내에 따라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차기 대선 후보가 될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노회찬이란 다크호스 때문에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특유의 촌철살인과 미군 관련 자료 단독공개 등 꾸준한 ‘특종’을 터뜨린 인기를 바탕으로 최근 서울시장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1~2위를 다툴 정도로 노회찬 의원의 인기가 올랐다. 덕분에 새 차기 대선 주자로도 떠오르고 있다.
노 의원은 실제 차기 대권을 노리는 분위기다. 노 의원은 지난 2월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민주노동당의 차기 대선후보는 반드시 경선을 통해 선출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7월 몇 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서울시장 출마에는 부정적”이라며 민노당 일부의 강력한 출마 권유를 거절했다. 대신 내년 초 당권에 도전할 계획이다. 이 경우 권 의원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 대선 도전 의지를 간접 피력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권 의원은 향후 당내에서부터 노 의원과 뜨거운 당내 대선후보 레이스를 펼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경우, 권 의원은 차기 대선 후보로 나오지 못할 수 있다.
◆위장 서민 논란
권 의원은 재산 및 자녀 유학 문제로 공격 받은 적이 있다. 이른바 ‘위장 서민’ 논란이다. 작년 17대 총선 당시 경쟁자였던 한나라당 박주영 후보 측에서 강하게 제기했던 내용이다. 한나라당은 당시 권 후보에 대해 “시가 9억 원을 호가하는 55평형 빌라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권 후보 소유로 돼 있는 서울 세곡동 소재 520평의 논이 시가 12억 원에 달한다며 부동산 투기의혹도 제기했다. 미 명문사학 코넬대 사회학 박사 과정에 있는 딸과 프랑스에서 건축디자인을 공부하는 장남의 해외 유학도 도마에 올랐다.
당시 권 후보는 강남 빌라에 대해 “재산신고 다 했고 호화빌라도 아니다. 파리특파원으로 있다가 돌아와 후배들의 강권으로 은행 부금까지 받아 장만한 기자아파트로, 취득과정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해명했다. 두 자녀의 유학에 대해서도 “둘 다 결혼 뒤 맞벌이를 하고 융자를 받아 유학을 갔으며 호화유학도 아니다. 서민층은 유학도 못 간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문제다”라고 말했다.
◆부친의 빨치산 경력
권 의원의 아버지 고 권우현(1915년생)씨는 결혼 직후인 1938년 아내와 함께 일본에 밀항해 이 곳에서 권 의원을 낳았다. 그는 1945년 광복과 함께 다시 경남 산청군 단성면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돌아와 구장 일을 맡았다. 그 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지리산에 들어갔다. 53년 휴전 뒤 이 일대에선 국군의 대대적 빨치산 소탕작전이 전개됐다. 1954년 12월 허기를 참지 못하고 친척 집에 들른 그는 국군의 총을 맞아 숨졌다.
이후 권 의원의 어머니는 지금까지 남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2002년 10월 9일자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권 의원은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겠다. 그의 못다 이룬 꿈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밝혔다.
부친 전력 문제는 물론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로서 자격을 논할 때 큰 걸림돌이 될 것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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