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⑨ 갈망과 염원이 솟아날 때 | ||
말이야 도우러 왔다지만, 가난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밀려나온 것이겠지요. 산에 들어온 이후 루주를 빨갛게 바른 여자를 만나기론 이 소녀가 처음입니다. 도시에서 살다왔으니 이 깊고 적막한 산골 생활이 소녀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통인지, 소녀가 바르고 나온, 소녀답지 않은 자극적인 루주 색깔에서 나는 느낍니다. 병원은 시늉뿐입니다. 늙은 여의사가 낡고 컴컴한 집 안에서 티베트 경전을 든 채 나를 맞습니다. 쿤데(Khunde)라는 마을에 있는 힐러리병원에서 파견 나와 있는 의사였습니다. 간호사도 진찰실도 물론 없습니다. 섬뜩할 만큼 밤이 추워서 몸이 더욱더 떨립니다. 여의사는 골무 같은 걸 내 손가락 끝에 끼우고 고소증이 얼마나 깊은지 진찰해봅니다. “한나절 후에 다시 오세요.” 한나절 후에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면 무조건 산을 내려가는 게 좋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설사약을 받고 미국돈 십 달러를 냅니다. 네팔 물가로 봐선 꽤 비싼 약값인 셈인데, 여의사도 그걸 느꼈던지 약값은 자신이 갖는 게 아니라 쿤데병원으로 보내야 한다고,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합니다. “여기 비구니 사원이 있는데 가봐요.” 내 의견을 미처 말할 새도 없이 열여섯 살 소녀 ‘파생 셀파’가 앞장서 갑니다. 요즘은 트레킹 손님이 거의 끊기다시피 한 한철입니다. 그동안 너무 심심하고 외로웠던지, 소녀는 여간해서 나를 쉬게 둘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개울가 쪽으로 내려앉은 오래된 곰파(사원)로 갑니다. 여자 승려들만 있는 비구니 절이라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사원 입구에서 창이 모두 밀폐된 퇴락한 집 한 채가 먼저 손님을 맞습니다. 너무 퇴락한 집인 데다 출입구도 단단히 잠겨 있어 나는 그냥 빈집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빈집이 아니라 한 비구니 승려가 무려 25년간이나 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수행하는 도장이었습니다. 파생 셀파가 밀폐된 그 집의 창을 한참 두드리고 나자 창문 한켠이 열리더니 늙은 비구니가 두 손을 합장하고 내게 인사를 합니다. “돈을 줘야 돼요.” 파생 셀파가 내게 속삭입니다. 나는 얼결에 주머니에서 500루피짜리 지폐를 꺼내 창 안쪽의 비구니에게 건넵니다. 어둠을 등지고 있기 때문일까. 돈을 받아가는 비구니의 얼굴은 핼쑥하고 주름살투성이입니다. 파생 셀파의 설명에 따르면 그 비구니가 그 집에 들어가 스스로 갇힌 것은 아주 젊었을 때였는데, 25년이나 세월이 지났으니 이제 노인이 된 게 당연한 일이라 했습니다. 비구니는 이내 창을 닫았습니다. ◇곰파(사원)의 수행자들. 이들은 평생 영적 세계만을 추구한다. 김형. 25년이나 자신을 밀폐된 집에 가두고 사는 그 비구니의 꿈은 무엇일까요. 육체가 우리의 영혼이 잠시 머물다 가는 여인숙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사는 집은 더욱더 그럴 것입니다. 티베트 불교에서 명상은 미혹에 빠진 마음을 정화하는 최고의 해독제입니다. 마음을 뒤덮어 삶을 어둡게 하는 온갖 번뇌 망상 같은 장애물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단번에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명상은 그 장애물을 제거하는 가장 전통적인 길 중의 하나입니다. 25년이나 고독한 명상을 통해 부동의 본성에 도달하기 원했던 그 비구니는 과연 무엇을 얻고 어디쯤 도달해 있을까요. 명백한 것은 그녀의 수행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이미 부동심(不動心)을 얻었다면 그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그 집의 빗장을 풀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동심을 얻은 그녀에겐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것이 하나도 다른 게 아닐 테지요. 본원적으로 보면 있고 없는 것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요. 사원에선 네 명의 비구니가 기도 중입니다. 두 명은 젊은 비구니였고 두 명은 늙은 비구니였습니다. 특히 한 비구니는 너무 노쇠해 앉지를 못하고 누운 채 기도하고 있었지요. 이곳에서 승려가 되는 것은 선택받은 인생을 사는 일이 됩니다. 승려가 되면 결혼할 수 없고, 보통사람보다 훨씬 더 높은 지식을 습득해야 되며, 평생 영적 세계만을 추구하고 삽니다. 티베트 불교에서 영적 세계에 대한 추구는 곧 헌신이며, 헌신은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러나 헌신을 감내해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마음 깊은 곳에서 갈망과 염원이 솟아나야 합니다. 삶의 ‘순수한 비전’에 대한 갈망과 염원이 없으면 헌신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갈망과 염원을 갖고 있어 삶의 진실에 대해 헌신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은 스승입니다. 티베트 불교에서 영적인 인도자가 되는 스승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적 스승의 권능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갈망과 존경을 함께 아우르는 티베트 말로 모귀(Mogu)가 있습니다. 모귀의 마음으로 스승의 뒤를 따라가면 윤회의 바다를 누구나 건널 수 있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김형은 어떻습니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 어떤 갈망과 염원이 남아 있으며, 모귀의 마음으로 헌신할 어떤 스승을 영혼 속에 품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개발 중심의 숨가쁜 연대를 살아오면서 우리가 진실로 잃어버린 것은 갈망과 염원이며, 동시에 그리워해야 할 그 어떤, 스승의 존재는 아닐는지요. 갈망과 염원이 없는 삶은 우물이 없는 집과 같이 삭막하겠지요. 절대적 진리를 그리워하는 삶의 순순한 비전을 향한 갈망과 염원 말입니다. 다시 밤이 찾아옵니다. 히말라야의 어둠은 토치카처럼 아주 단단합니다. 전기도 없고, 오늘 따라 달빛 별빛도 없습니다. 밥을 끓인 물로 요기를 하고 내 방 침대로 돌아와 눕자 창이 다르르르 떨리는 소리를 내고 비닐막으로 덮은 천장이 춤을 춥니다. 아래층 부엌에서 올라오는 연통이 방문 앞을 수직으로 지키고 있는 이층방이라서 다른 방보다 따뜻할 거라는 주인의 말과 달리, 밤이 되자 슬리핑백 속에 고치처럼 오그리고 누웠는데도 온몸이 한기로 부르르 떨립니다. 그러나 추위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입니다. 아래층 부엌에서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로지 주인은 젊은 부부로서 열 살이 채 안 된 두 딸과 카트만두에서 온 처녀 파생 셀파와 함께 삽니다. 나는 처음엔 노랫소리를 무심코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곧 그 노래가 한 사람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둘러앉아 차례대로 부르며 돌아가는 돌림노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래는 한 시간이 훨씬 넘도록 계속됐습니다. 마실 갈 데도 없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도 없으니, 그들도 히말라야의 밤이 지루하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들이 부르는 ‘돌림노래’는 길고 따뜻했습니다. 간간이 웃음소리와 잡담이 돌림노래 사이로 섞여 들어왔습니다. 촛불도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손에 손을 잡고 둘러앉아 돌림노래를 부르면서 밤을 보내는 저들에게 ‘가족’은 과연 무엇일까. 제 눈엔 자꾸,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도 서로 마주앉기보다 일렬로 앉아 현대인의 신이기도 한 텔레비전을 향해 경배 드리는 우리네 가정의 밤 풍경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제안 드리니, 만약 지금 김형이 가족과 함께 있다면, 텔레비전을 끄시고 온 가족이 마주앉아 돌림노래를 한번 해보시지요. 틀림없이 큰 소득을 얻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
가져온 곳: [킬리만자로의 표범]  글쓴이: 킬리만자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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