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⑦히말라야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 | ||
재거나 더디거나 가는 길은 결국 하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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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를 아직도 두 달이나 앞둔 이곳의 날씨는 매일 청명합니다. 해발 4000여m 가까운 고원이니 햇볕은 따뜻하지만 덥지는 않습니다.
아침에 캉지마 마을을 떠납니다.
만 이틀 동안 온갖 고소증세에다가 극심한 설사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앓아누워서, 개발의 채찍이었던 ‘실패’와 ‘성공’의 헛된 관성에 시달려온 내 몸은 야윌 대로 야위어 홀쭉해진 느낌입니다. 눈은 쑥 들어가고 수염은 성기게 자란 데다가 피부 색깔이 그냥 고동색이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그야말로 이방인처럼 낯섭니다.
오늘은 텡보체까지 걷습니다. 텡보체(Tengboche·3860m)까지 걸어도 해발 고도는 별로 높아지지 않으나 중간에 계곡을 건너야 하니 한참을 내려갔다가 두세 시간을 또 올라가야 한다고 합니다. 물이 산을 넘지 못하듯이 산 또한 물을 이어 넘지는 못합니다.
티베트 마을 사나사를 지나니 내리막길입니다.
계곡은 아직도 수백m 아래에 있습니다. 이틀을 꼬박 굶었기 때문에 곧 식은땀이 나지만, 원래부터 걷는 일엔 누구한테 뒤지지 않으니까 다시 쓰러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고소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설사를 빼곤 재발 증세가 완화되었으므로 ‘한국인의 의지’로 내처 걸어갑니다.
삼나무숲이 장관입니다. 몇 년 전 그루지야라는 나라에 갔다가 카프카스산맥의 삼나무숲에 홀딱 반한 적이 있었는데, 그보다는 좀 못하지만 고도가 수목한계선을 넘나드는 지점인데도 곧게 곧게 도열해 있으니, 삼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얼마나 대견하던지요. 척박한 토양, 칠팔십도 넘는 경사면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은 환경 따라 나쁜 재목이 되기도 하고 좋은 재목이 되기도 한다는데, 나무들은 환경에 관계없이 제 몫마다 쪽 곧으니까 더욱 아름답습니다.
탐셀쿠봉(6618m)이 오른쪽에 있습니다.
탐셀쿠봉과 연접해 있는 캉테가(Kangtega)는 말안장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말안장’에서 연방 설연이 피어오릅니다. 내가 걷는 길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으나, 설연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걸로 보아 해발 6783m의 캉테가봉 정수리엔 지금 된바람이 불고 있는 게 확실합니다. 아름다운 아마다블람은 내려가는 길이라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아마다블람을 빨리 보고 싶어서 짐짓 발걸음을 재게 떼어놓습니다. 이쪽 에베레스트의 칼라파타르 코스는 처음이지만,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여러 차례 했으니까 내가 만난 설봉도 수십 수백은 되련만, 아마다블람봉(Amadablam·6814m)처럼 단아하고 수려한,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봉우리는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래서 간밤에 서울의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아마다블람을 닮고 싶네.”
내 편지의 첫 문장입니다.
“아니, 닮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만약 내가 죽어 티베트 사람들이 믿듯이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아마다블람 혹은 아마다블람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네. 최고봉 에베레스트는 싫으이. 피뢰침처럼 뾰족한 마차푸차레도 싫고, 에베레스트와 어깨를 맞댄 로체(8516m)도 일없어. 이 장쾌한 히말라야산맥 한켠에서 아마다블람의 높이 6880m이니 어떤 이는 혹시 높이만으로 깔볼는지 모르지만, 그 미적 균형이 단연코 뛰어나면서도 높이로 저를 드러내지 않는, 만년빙하를 이고 바람 속에 있으면서도 날카로움으로 저를 무장하지 않는, 산맥의 중심에서 살짝 비켜나 앉아 있으면서도 쓸쓸한 자기연민으로 저를 과장하지 않는, 그리하여 이름도 모자상(母子像)인 저 단아한 아마다블람봉…….”
김형. 마침내 계곡에 이릅니다.
해가 어느새 정수리에 떠 있습니다. 에베레스트 쪽과 고큐 쪽 계곡물이 만나서 장대한 두드코시 강으로 합류하는 푼키텡가(Punki Tenga·3250m) 마을에서 끓인 밥으로 점심 요기를 합니다. 계곡을 건너려고 오전 내내 해발 600여m 를 내려온 셈입니다. 오늘 밤 쉬어가기로 한 텡보체 마을이 3860m 이니까 오후에 다시 600m 이상 올라가야 되겠지요. 짐을 진 야크 떼들이 연방 밀려 내려와 히말라야 빙하가 녹아내린 물에 코를 담급니다. 물은 섬뜩할 만큼 찹니다. 해발 3000m 가 넘으면 일단 찬물에 손을 담그면 안 된다는 게 트레킹 여행의 고수들 당부입니다. 찬물에 손을 담그면 손끝부터 다시 저려오는 것을 나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산악인들이 고산에서 쉽게 손가락 발가락 동상이 걸리는 것은 추위 때문만이 아니라 산소 부족으로 실핏줄까지 혈액이 원활히 흐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벌써 엿새째 세수를 하지 못했습니다.
길은 끊일 듯 이어집니다.
푼키텡가 마을에서 텡보체에 이르는 길은 삼나무숲을 사선으로 가로질러 가는 칠부능선에 놓여 있습니다. 갈수록 탐셀쿠봉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마치 설산의 중심까지 손쉽게 도달할 것 같은 착각을 느끼기도 합니다. 강물과 연접한 살산들의 능선이 그러하듯이, 산과 물을 넘고 산과 물을 비켜가는 길 또한 끝이 없습니다. 산기슭부터 정수리까지, 가만히 앉아 들여다보면 수많은 길들이 맺어지고 풀어졌다가 또 맺어져 흐릅니다. 이제 막 봄을 맞아 유난히 많은 생필품들과 건축자재 따위가 굼실거리며 길마다 흐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층층을 이룬 컨베이어 벨트가 작동된 것 같습니다.
‘히말라야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해발 4000m 의 고원으로 난 수많은 길들 위로 분주하게 흐르는 삶을 본다는 것은 감동적입니다. 문명의 세계와 다른 것이 있다면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예컨대 나 같은 나그네나 짐꾼이나 야크 떼나 농부들이나 모두 자신의 두 발에 의존할 뿐이라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더 빠른 자 더 느린 자의 구분이 없다는 사실 정도입니다. 모든 숨탄 것들이 굼실굼실 움직이고 과한 것과 모자란 것이 따로 없으니 초조하거나 불안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기야 광대한 우주적인 관점으로 보면, 시속 100km가 넘는 속도로 달리는 것이나, 달구지 속도로 흐르는 것이나, 구름에 달 가듯이 걸어가는 것이나, 히말라야 수많은 소롯길에 흐르는 숨탄 것들처럼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은하수의 동서 거리만 해도 10만광년이 넘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 모인 것은 흩어지고/ 축적한 것은 소모되고/ 쌓아올린 것은 무너지고/ 높이 올라간 것은 아래로 떨어진다
깨달은 자는 말했습니다. 빠르고 느린 것의 차이는 삶의 본원적인 숨은 꿈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히말라야 고원의 맺어지고 풀어지는 길들이 내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낮에 길을 가고 밤에 잠듭니다. 그들은 덩치 큰 야크보다 더 먹는 일이 없고, 남들보다 앞질러가는 상대적인 속도에 목매지 않으며, 벼랑을 만나면 가만히 돌아서 갑니다. 멀리 떠나오니, 내 조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욕망에 따른 약진을 위해 기민하게 ‘머리 굴리는 소리’가 격류 밑의 자갈 굴러가는 소리만큼 오히려 크게 들리는 듯합니다. 최소한 김형은 그 대열에서 아름다운 ‘삐딱선(船)’을 타고 있으리라 봅니다만. 오늘은 이만 씁니다.
2005.07.15 (금) 2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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