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⑤ 우유의 강에서 락슈미를 만나다 | ||
흰 우유의 강에서 뿌옇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마치 비슈누신의 아내 락슈미가 금방이라도 현신해 떠오를 것 같습니다. 힌두교에서 세계를 지금처럼 유지시키는 신으로 명명된 비슈누의 아내인 락슈미는 우유의 바다에서 연꽃을 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해서 ‘우유 바다의 딸’ 혹은 ‘파드마(padma·연꽃)’라고 불립니다. 그녀는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보호자며 부귀와 행복을 관장할 뿐 아니라 사랑의 신 카마(kama)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간밤에 나는 달게 잤습니다. 오래 걸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딱딱한 나무침대 위의 허술한 침낭 속에 몸을 누에고치처럼 오그려 들이밀었는데도 꿈조차 꾸지 않고 깊이 잠들 수 있었던 건, 혹시 관음보살 격이자 파드마인 락슈미신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형. 재작년 겨울, 김형과 함께 들어갔던 토지문화관 생각이 나는군요. 그때 원주시 변방의 외진 토지문학관엔 네 명의 작가가 들어 있었습니다. 겨울이라서 본관의 문도 닫혀 있었고, 우리들은 정문 옆의 별관 아래 위층에 나누어 기거했습니다. 워낙 고요한 곳인데다가 방음이 잘 안 된 별관 건물이라서 옆방의 전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지요. 행여 다른 사람 글쓰는 일에 방해가 될까 봐 발소리조차 죽이고 걸었기 때문에 한낮엔 그나마 빈집처럼 조용했던 것을 김형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별일도 다 있지요. 자정이 넘은 시각이 되면 아래 위층에서 유난히 문을 여닫는 소리가 바쁘게 나고 발소리가 쿵쾅쿵쾅 나고 부엌문 들락거리는 소리가 나곤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그 외진 곳에서 김형과 나는 깊이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각에 비로소 의식의 러시아워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나와 똑같이 위층을 쓰던 작가에게 나는 물었습니다. “왜 그리 깊은 밤에 자주 문을 열고 나가나요?” 여성인 작가 C씨는 대답했습니다. “워낙 고요한 시간이라서 귀신들을 만나려고 들락거렸지요.” 우리는 C씨의 대답에 함께 웃었지만 그것은 농담만은 아니라는 걸 다같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김형. 산세가 세어서 그랬던지 밤마다 잠을 못 이루며 지낸 그곳에서조차 우리는 우리가 가진 아무것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남을 대하는 얼굴엔 사회적 자아가 있고, 우리의 몸통 속엔 습관의 총체적 축적이 지어냈을 자의식이 있으며, 그 자의식의 최저층 안쪽에 본성이 숨겨져 있다고 봅니다. 그곳은 변방이었지만, 돌이켜보거니와 우리는 욕망과 본성 사이에서 분열하는 자의식을 그곳에서도 이길 수 없었다는 겁니다. 김형은 그때 ‘노래’로 세상과 만나는 소설을 쓰고 있었고, 나는 창조적 생산성을 거세당한 현대인의 쓸쓸한 자화상을 그리는 ‘빈방’ 연작을 그때 그곳에서 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가진 욕망은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나는 ‘좋은 소설’이 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좋은 인생’이 뭔지 모르는 것처럼요. 아니, 글쓰기가 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지, 삶의 제한적 습관에 따른 자의식의 발현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작가로서 다루어야 하는 내 ‘인물’의 사유와 감정이 다른 사람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때 나의 글쓰기는 시작됩니다. ◇석회암이 많은 히말라야를 핥고 내려온 우유빛 두드코시 강.<사진왼쪽> ◇해발 3400m 남체바자르에 도착한 필자와 포터.<사진가운데> ◇벼랑 끝 제비집 같은 야외 카페.<사진오른쪽> 하지만 분리는 가능한 것일까요? 분리해내려고 하면 할수록 오류는 커지고, 그 끔찍한 오류 속에 갇히다보면 내가 집어내고자 했던 삶이 모래 알갱이처럼 손가락 사이로 슬쩍 미끄러져 빠져 달아나고 마는 절망의 반복이 작가로서의 내 인생이었습니다. 왜 자꾸, 토지문화관에서의 그 밤들이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지난밤, 내가 누렸던 달고 깊은 잠 때문에 밤마다 신산했던 토지문학관에서의 나, 혹의 ‘우리들’에게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겠지요. 삔카 마을에서 차 한잔을 합니다 해발 6615m의 탐세르쿠(Thamserku) 봉이 이마 위에 턱 놓여져 있습니다, 발밑에선 두드코시 강이 까불까불 흐르고 수직선상 꼭대기에 만년빙하를 인 탐세르쿠가 빛나고 있으니, 내가 다리를 쉬는 이 작은 야외 카페는 마치 벼랑 끝의 제비집처럼 느껴집니다. 길은 계속 강을 따라갑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꽃이 피지 않아서인지 트레커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대신 짐 진 소들과 건축 자재와 생산한 농산물을 남체바자르로 팔러가는 장꾼들이 연이어 지나갑니다. 내 발 앞에서 잠시 짐을 내려놓은 ‘션집라이’라는 청년은 17세로 속이 꽉 찬 배추를 머리꼭대기까지 짊어졌습니다. 해발 3400m의 남체바자르까지 가서 배추를 처분하고 저물기 전에 고향집으로 돌아와야 된다고 했습니다. 배추 한 포기에 20루피를 받습니다. 어둑신한 신새벽 고향집을 출발해 해발 800m 이상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가 저물녘에야 겨우 고향집에 돌아올 그의 주머니에 남는 것은 아마 700루피, 우리 돈으로 만 원쯤 될 것입니다. “배추 판 돈으로 뭐할 건데요?” 나그네가 묻습니다. “아버지의 몸이 안 좋아서요. 배추를 팔아 야크 고기를 조금 사올려고요.”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청년의 대답입니다. 몬조(Monjo) 마을에 도착한 건 열시쯤. 나는 푸르른 보리밭으로 둘러싸인 몬조 마을에 도착해 고개를 갸웃합니다. 카트만두를 떠날 때 트레킹 경험이 많은 우리 교민이 써준 스케줄에 따르면 이곳, 네팔의 국립공원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의 네팔 이름) 입장권을 사야 되는 몬조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라고 씌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무 빨리 걸어온 것일까요. 겨우 아침 열시쯤 됐는데, 동행자도 없고, 더구나 텔레비전 인터넷카페 술집도 없는 이 궁벽진 마을에서 하루를 머물라니, 내 체력을 아주 노인의 그것으로 보았구나 싶어 섭섭하기까지 합니다. 이곳 몬조에서 조르살레 마을을 지나 쿰부 지역의 행정 중심지이자 트레킹의 베이스캠프격인 남체바자르(Namche Bazaar)까지는 세 시간 남짓 걸릴 거라고 했습니다. “남체까지 가서 쉬자고.” 나는 포터에게 호기롭게 말합니다. 몬조 마을이 해발 2600m쯤 되고 남체바자르가 3400m를 상회하니 해발고도를 600m 더 올라간다는 걸 나는 ‘한국인’답게 간과하였습니다. 조르살레부터 남체바자르까진 거의 사오십도 이상 되는 가파른 경사면을 계속 올라갑니다. 키 큰 삼나무 숲이 경사면을 꽉 채운 길입니다. 두드코시 강이 탐세르쿠 봉과 콩데 봉 사이의 까마득한 협곡으로 소스라지면서 흘러가는 걸 뒤돌아보면서 세 시간, 나는 마침내 해발 3440m의 남체바자르에 도착합니다. 자랑스럽고 용맹한 ‘한국인’다운 기상으로 전문 트레커의 충고도 뿌리치고 파죽지세 올라온 거지요. 남체바자르와 마주선 콩데봉의 위용은 정말 대단합니다. 눈이 녹아내리며 만든 수백m 얼음 폭포들이 내 발밑에 있습니다. 고소증의 공포에 대해 아시는지요, 김형. 남체바자르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스스로 고소증에 걸려 그처럼 고생하게 될 줄 짐작조차 못했습니다. 나는 어리석게도 용맹스럽게 올라온 나 자신에 대한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히말라야는 반드시 우리에게 겸손해야 한다는 시험대를 배치해 두고 있습니다. 누구의 말처럼, 산은 천연의 사원이니까요. |
가져온 곳: [킬리만자로의 표범]  글쓴이: 킬리만자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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