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 산에 안겨 찾으리, 내가 나를 사는 길을… | ||
<연보> ▲1946년 충남 논산 출생 ▲1971년 원광대 국문과 졸업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 당선 등단 ▲1992∼2004년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장편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물의 나라’ ‘외등’,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덫’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연작소설 ‘흉기’ ‘흰소가 끄는 수레’ ‘더러운 책상’ ‘나마스테’ 등 김형. 티베트불교의 성자 밀레르파는 ‘길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법의 절반을 이룬 것이다’고 했습니다. 법은 해탈한 자가 마침내 깨달은 진리이니 곧 다르마이겠지요.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입니다. 제 스스로 불완전한 걸 알아서 사회라는 집을 만든 것일진대, 불완전한 그들이 지은 사회가 그들의 의지처가 되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이미 의지처로서의 역할을 다 저버린 듯합니다. 경계는 가파르기 이를 데 없고, 분열은 가속을 받아 자학적 수준에 도달했으며, 생명 가치는 효율성에 의해 일사불란한 서열화를 이루었습니다. 자본주의 세계 통합의 국면에서 층하가 없는 사회는 없겠지만, 우리나라처럼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성공신화만을 좇아 달려가도록 짜여 있는 사회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실패하면 죽는다, 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폴 발레리의 말처럼 ‘생각하는 대로 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고 ‘사는 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김형. 우리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어떤 그릇 속에 지속적으로 완전히 담기지는 않습니다. 그에겐 생각하는 힘과 함께 감정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같이 질주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상인 우리 사회의 반사회적 구조를 생각하면 너나없이 평생 오로지 달려갈 뿐일 듯하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쫓기면서 서류철을 정리하다가, 출근시간에 매여 씹지도 못한 쌀알을 허겁지겁 넘기다가, 경쟁에서 밀려날세라 달리고 달려가다가, 어떤 한낮, 어떤 새벽, 또 어떤 저녁 시간에, 순간적으로 가슴 한켠을 면도날로 긋고 가는 듯한 동통을 느끼면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상주불멸의 본성이, 경쟁력 제고를 위해 과도하게 주입된 정보라인에 점령당한 우리 머릿속 미세한 틈을 솟아나와 울리는 은혜로운 생음(生音)이지요. 아둔해서 끝내 구원받지 못한 자는 달려가는 관성 때문에 그 목소리를 살비듬처럼 떨어뜨리고 지나갈 뿐이지만, 생의 비의에 대해 조금이라도 예민한 자는 달려가고 있을 때조차 그 목소리 때문에 상처받습니다. ◇에베레스트 가는 길목의 설산. 히말라야 사람들에게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영혼으로 스며드는 신의 품이다. ‘그래, 이게 아냐!’ 그는 마침내 멈추어 서서 말합니다. 돌아보면, 자신이 좀 전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독종’이 돼서 헤치고 나온 기계적인 반인간적 세계 구조가 보이기도 할 테지요. 그리고 오래 전 품었던 자신의 숨긴 꿈들이 황야의 모랫바람에 날려 자신과 너무도 먼 곳에 유리된 채 부패하고 있는 것도요. 이것이야말로 기회입니다, 김형.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나와 상관없는 습관의 축적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삶의 낭비적 습관으로부터 단호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예민한 용기를 가진 사람에겐 바로 ‘사는 게 이게 아닌데…’ 할 때가 은혜로운 기회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티베트에선 이런 순간을 바르도라고 부릅니다. 바(Bar)는 ‘사이’를 뜻하고 도(do)는 ‘매달린’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매달린 사이의 시간’이니 과도기이자 축적인 습관의 죽음과 새로 생성되는 참된 주체의 틈인 것이지요. 그럴 때 나는 여기, 히말라야에 옵니다. 히말라야는 무엇보다 내가 내 집(사회)에서 악을 쓰고 지키고자 했던 것, 사악한 전투, 거짓말, 허세,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주었던 상처들까지, 얼마나 나와 상관없이 주입된 가짜 꿈들 때문에 기인했던 것인지 명백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히말라야는 습관의 갑옷을 벗겨주고, 그 밑에 있는 내밀한 본성을 보라고 가르칩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걷는 것뿐입니다. 영혼은 분산되지 않습니다. 멀리 있으니 내 나라가 조감도처럼 한눈에 보이고 그곳에서 죽을 둥 살 둥 달려온 나의 지난 삶도 한눈에 보입니다. 내 나라 사람들이 실패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하찮은 이해와 사소한 서열에 온 정신을 집중시켜 ‘머리 굴리는’ 소리가 자갈이 구르는 것처럼 크게 들리기도 합니다. ‘나마스테…’ 이곳에서 필요한 말은 그것뿐입니다. 안녕하세요, 라는 뜻의 네팔 말인데, ‘안녕하세요’만이 아니라 ‘안녕히 가세요’ ‘건강하세요’, 심지어 ‘행복하십시오’라고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소통의 시작이자 소통의 끝이 다 여기 ‘나마스테’에 담겨 있습니다. ‘나마스테’는 사람과 사람을 서열로 보지 않고 같은 높이로 눈을 맞추고서야 서로 통하게 되는, 그런 눈으로 봅니다. ◇카트만두 풍경들. 박타푸르 유적지의 필자(위) 와 한가로운 네팔 사람들 지난해 나는 소설 ‘나마스테’를 썼습니다. 코리안 드림을 좇아 한국에 온 네팔 청년과 아메리카에 이민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한국 여자와의 사랑이 우리 사회구조의 배타성에 의해 끝내 비극적으로 해체되는 과정을 그린 ‘나마스테’를 신문에 연재할 때, 나는 자주 히말라야 설산들의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나는 산협 사이로 난 좁고 가파른 길을 걷기도 했고, 빙하 위의 위태로운 단층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 꿈을 꾼 날 아침엔 서재 뒤편에 놓아둔 배낭을 괜히 만지작거렸습니다. 연재를 끝내고 원고 교정을 보아 출판사에 넘긴 후, 지체 없이 서울을 떠나온 것은 바로 그렇게 오래 기다려 왔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마스테’를 쓸 때 이주노동자들의 농성장이나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너무도 여러 번 뼈저리게 ‘우리 사회는 반사회적이다’라고 느꼈던 것들이 주었던 스트레스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 우리 사회만 그렇겠습니까. 연재에 목줄을 매고 행여 소외될세라 이런저런 명패를 내놓고 살아온 한국인으로서의 내 삶이 바로 그랬던 것이지요. 이곳은 네팔, 카트만두입니다. 김형과 한 철을 보냈던 지난해의 토지문화관 생각이 나는군요. 우리가 외진 산골로 들어간 것은 각자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일을 빙자해 그곳에 들어가 각방차지를 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하고자 했던 ‘일’이 과연 우리 자신이 진실로 그리웠던 일인지, 우리가 살아온 습관이 우리에게 주입한 일인지, 그도 아니면 소설 쓰기를 빙자한 명예나 공명심, 또는 불완전하고 유한한 우리가 지닐 수밖에 없는 가슴속 폐허를 감추기 위한 일인지, 지금도 도대체 오리무중입니다. 다만 생각해 보건대, 나는 그때도 ‘일’ 때문에 내가 석달이나 매일 바라보았던 백운산조차 오지게 내 가슴에 품지 못한 죄는 없었던가, 하고 있습니다. 새떼들 소리가 새벽을 깨우고 있습니다. 아침식사를 곁들여 십달러를 지불하는 내 방 창 너머로 아열대 꽃들이 벙긋벙긋 열리는 중인데, 까마귀 떼가 새카맣게 하늘을 덮고 있습니다. 이곳에선 어디서든지 저런 까마귀 떼의 검은 장막을 봅니다. 이곳 사람들이 까마귀를 길조로 보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소식을 알려준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이를테면, 사람과 사람이 똑같은 눈높이로 마주서 소통하기 시작하는 ‘나마스테’의 상징적인 새라고나 할까요. 내일은 에베레스트로 혼자 떠납니다. 부겐빌레아 꽃이 만발한 집 지붕에 앉아 있는 까마귀떼 에베레스트라니, 오해는 마십시오. 등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에베레스트의 발치를 겸손과 갈망의 마음으로 걸어다니겠다는 것입니다. 트레킹은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 사람들에게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품에 오체투지의 영혼으로 스며들어 나를 여는 신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팔만대장경에도 큰 산은 높은 덕(德)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겠지요.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내 가슴속 폐허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가리켜 황야라고 말하는 지금의 내 문장들이 민망하고 부끄럽기 그지없네요. 여기까지가 내 한계일 것입니다. 멀리 떠나왔으나 아직도 나는 이렇게 ‘그리운 저기’와 내 몸뚱이가 있는 ‘여기’ 사이에 엉거주춤 흐르고 있습니다. |
가져온 곳: [킬리만자로의 표범]  글쓴이: 킬리만자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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