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⑥ 실패하기 위해 히말라야에 온다 | ||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한 채 허상의 목표에 목숨을 거는 불쌍한 나를 봅니다 산을 내려가는게 실패일까요? 설산의 광채가 넌지시 답합니다 남체바자르(Namche Bazzar)엔 참을성이 있어야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 카페도 있습니다. 이곳은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의 네팔 이름) 국립공원의 중심 도시입니다. 거대한 힌쿠 히말(Hinku himal)의 산군을 등진 삼태기 같은 협곡 안의 가파른 경사면에 세르파의 집들과 여러 상점들과 로지들, 그리고 경찰 체크 포스트, 국립공원관리본부, 우체국 등의 행정 관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등반팀들도 주로 이곳에서 일상용품을 사들입니다. 이곳에서부터 올라갈수록 일상용품 구하기가 어려울뿐더러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짐들은 짐꾼이나 야크에 의해 운반됩니다. 야크들은 3000m 이하에선 살 수 없기 때문에 소나 당나귀에 의존해 운반된 짐들이 야크의 등 위로 옮겨지는 곳도 바로 여기입니다. 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남체에서 오른쪽 지역은 사가르마타 국립공원 중 에베레스트 지역이 됩니다. 에베레스트 턱밑까지 가는 칼라파타르 코스와 일본인들이 주로 풍경의 성소로 꼽는다는 고쿄(Gokyo) 코스의 트레킹 길이 여기서 나뉘어 오른편으로 갈라져 나가지요. 왼편으로 가면 티베트로 이어집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활주로라고 할 수 있는 해발 3800m의 샹보체와 거대한 바위 산 쿰마비율라(khumabi yul lha)를 오른쪽으로 밀어내고 계속 올라가면 티베트에 닿습니다. 지금도 현지의 행상들은 야크 등에 물소나 코뿔소 따위의 가죽을 싣고 6000여m 이상의 히말라야 협곡을 걸어서 넘어갔다가 소금이나 티베트쌀, 옷으로 바꿔옵니다. 티베트의 라싸까진 이곳에서 12일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밤이 되자 기온은 뚝 떨어집니다. 카터 대통령이 머물렀다는 100루피짜리 쿰부 로지에서 한기로 잠을 설치고, 다음날 아침 곧 샹보체 언덕을 오릅니다. 어제 여러 시간 경사가 급한 비탈길을 올라왔기 때문에 걸음새가 영 시원치 않습니다. 게다가 올라가야 되는 언덕은 자갈이 계속 구르는 암산이고, 경사면 각도는 거의 70도에 이릅니다. 남체바자르의 소년 소녀들이 재잘대면서 허덕거리는 나를 계속 추월해 갑니다. 샹보체 언덕 너머의 쿰중 마을에 있는 힐러리 학교 등굣길입니다.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힐러리경의 재단에서 세운 학교가 힐러리 학교인데, 쿰부 지역의 명문학교로 자리잡은지라 남체바자르에 학교가 있음에도 굳이 해발 400∼500m의 언덕을 넘어 그곳까지 등교하는 것입니다. 어떤 학생들은 세 시간 넘게 걸어서 등교하기도 합니다. 향학의 꿈을 좇아 고통스런 과정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은 그들과 우리가 똑같습니다. ◇히말라야 설봉들을 등지고 앉은 필자. 아, 하고 어떤 순간 내 입이 벌어집니다. 투명한 햇빛들이 사방에서 내 몸을 찌르고 달려듭니다. 3800m의 샹보체 언덕 칠부 능선에서 내가 한순간 마주친 것은 바로 세계의 어머니 신이라고 불리우는 초모룽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이름), 세계의 머리라고 명명된 사가르마타, 바로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입니다. 사우스 스미트(8749m), 루체(8516m), 파크38(7591m)로 이어지는 설산의 명쾌한 스카이라인이 아마다블람봉, 탐셀쿠봉, 캉테카봉, 촐라체봉 등 수많은 설봉들을 품에 안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산이라기보다 백색의 파노라마, 혹은 죽음 직후에 만나게 된다는 ‘다르마타’의 광채 같았습니다. 나는 한동안 앉아 있습니다. 내 몸이 지친 것도 잊고 내가 두고 온 그리운 것들도 잊었습니다. 히말라야의 저 장쾌한 광채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일 테지요, ‘마음의 본성은 모든 것의 본성’이며, ‘모래 한 알에서 세계를 보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지닌다’라고 갈파한 것은 티베트 불교의 한 스승입니다. 임사체험을 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 중 하나는 ‘눈부신 흰빛에 둘러싸여 서녘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 틈새의 흰 빛다발이 바로 ‘다르마타’입니다. 영혼의 참된 본성이 가장 극명하게 떠오르는 순간이라고들 하지요. 거대한 히말라야 설산들이 고요하면서도 숨가쁘게 뿜어내는 광채를 가리켜 ‘다르마타’라고 한다면, 김형은 틀림없이 감수성 예민한 내 기질이 불러온 과장이라 할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김형. 고소증이 온 게 이날 밤입니다. 나는 내처 샹보체 언덕을 넘었고, 쿰중마을(Khumjung·3800m)에서 점심을 먹었고, 힐러리 학교에 들러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으며, 그다음엔 캉지마 마을로 와 히말라야 최고의 미봉으로 알려진 아마다블람봉이 정면으로 보이는 한 로지에 짐을 풀었습니다. ◇해발 3000m 이상에서만 사는 고지대의 짐꾼 ‘야크’. 먼저 두통이 왔습니다. 나는 이틀 새 계속 강팍한 비탈길을 걸었으므로 몸살 기운이 찾아왔나 하고 해열 두통 약을 복용했습니다. 헛배가 부르고 구토증이 나서 저녁 식사는 겨우 끓인 밥물을 먹었을 뿐입니다. 기압 차이에 따른 헛배부름이라는 걸 안 것은 나중 일입니다. 태양열로 켜는 촉수 낮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로지였지요. 밤이 되자 뒷골이 아프더니 곧 손발 끝이 심하게 저리기 시작했습니다. 손발을 열심히 주물렀지만 차도는 없었어요. 차도는 고사하고 밤이 깊어지자 대퇴부가 끓는 물에 집어넣은 것처럼 저렸고, 극심한 설사가 찾아왔습니다. 나는 밤새 참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로지 주인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무조건, 신속히’ 내려가야 한다고 오가는 낯선 길손들도 내게 충고했습니다. 밤새 잠 한숨 제대로 못 자고 나서 나는 로지의 이층방에 누워 묵묵히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나의 목적지는 칼라파타르(5545m)였습니다. 정할 필요가 있어서 정한 것이 아니라 트레킹 지도에 거기가 끝이라고 쓰여 있어 그렇게 정한 것인데, 거의 죽을 지경이 됐는데도, 개발의 황막한 시대를 관통하여 살아온 ‘자랑스런 한국인’의 관성과 습관이 내 몸 안에 남아 있어서, 도대체가 ‘백스텝’을 밟을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되짚어 내려가면 실패야, 라고 내 관성이 말했고, 실패하면 낙오자가 될 뿐이야, 라고 내 습관이 화답했습니다. 바로 개발의 숨가쁜 반인간적 질주가 준 독성을 빼버리자고 떠나온 길인데도, 나는 실패가 두려워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면서, 그곳에서 두 번째 밤을 또 보냈습니다. 수많은 인종의 남녀노소들이 그 사이 나를 스쳐 지나갔지요. 내 눈엔 모든 사람이 다 가는데, 나만 뒤떨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김형. 산을 내려가는 게 실패입니까? 칼라파타르는 그냥 흔하디흔한 검은 바위일 뿐입니다. 그것이 목표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고소증은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헛된 ‘목표’를 좇아 나는 목숨을 걸고 고소증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김형이 지금 정해 놓고 있는 일상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더 큰 아파트를? 더 높은 자리?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삶의 진정성과 아무 상관도 없는, 내 영혼을 위로할 어떤 효율성도 없는 칼라파타르라는 목표를 자의적으로, 또는 남들 좇아 정해놓고서, ‘실패’가 두려워 산을 내려가지도 못하고 올라가지도 못하면서 엉거주춤 고통에 차서 멈춰 있는 불쌍하고 불쌍한 나의 모습을요. 그것은 나일 뿐인가요? 김형이 이곳에 오면 다를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단지 ‘검은 바위’일 뿐인 허상의 목표 때문에, 남에게 질세라 고통에 차서 엉거주춤 헤매고 있는 캉지마 마을의 불쌍한 나는, 감히 말하거니와, 세계화의 분주한 골목길을 배회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아닐는지요. 우리가 지금 이 시대, 보고 달리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좀 더 남보다 앞서가자고, 좀 더 잘 먹고 잘살아보자고 악을, 악을 쓰며 우리가 획일적으로 달려갈 때, 등뒤에서 우리가 일찍이 참된 본성으로 꿈꾸었으나 잔인한 경쟁주의에 떼밀려 스스로 매몰차게 버리고 온 ‘나의 옛 꿈’들이 유령이 되어 계속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때입니다. 히말라야가 뿜어내는 빛의 화살들은 우리에게 습관적인 삶의 궤도 수정을 지금 넌지시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나날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김형, |
가져온 곳: [킬리만자로의 표범]  글쓴이: 킬리만자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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