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⑧ 히말라야는 묵음의 언어이다 지금 난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고 있습니다 | ||
합장한 내 두 손이 보이는지요? 트레킹 여행에서 필요한 네팔 말은 이것뿐입니다. 안녕하세요, 라는 뜻이고, 안녕히 가십시오, 라는 뜻도 되는 말. 건강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라는 뜻도 되는 말. 타인과 소통을 위한 최초의 악수 같은 말이면서, 기약조차 없이 헤어질 때 아스라이 흔들어주는 결별의 손짓 같은 말, 나마스테. 나마스테, 김형. 트레킹을 시작할 때 대부분의 나그네들은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청명한 소리로 인사를 합니다. 옆 사람이 깜짝 놀랄 만큼 쩌렁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산이 나마스테, 라는 말의 울림을 부드럽게 받아주니 명도 높은 투명한 목소리로 소리 질러 인사해도 나쁠 건 없습니다. 나마스테, 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도 주위가 환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나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도가 올라가면 달라집니다. 해발 4000여m가 넘어가면 나마스테, 라고 소리쳐 인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목소리는 낮아지고 울림은 길어집니다. 인사말의 높이가 저절로 스쳐 지나는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주문처럼 들리기도 하고 연인들의 밀어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속삭이는 듯한 나마스테는 다정하고 달콤합니다. 그리고 4500, 5000m쯤 걸어 올라가면 나마스테가 거의 묵음의 상태에 이르지요. 눈길이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마스테, 하지만 겨우 입만 달싹거릴 뿐입니다. 그러니까 소통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나마스테’는 산행의 과정에서 음계를 짚어 내려오듯 낮아지다가 마침내 소리는 사라지고 울림만 남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유는 지친 탓이지요. 해발 5000여m가 되면 앉아 있어도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할 참이니 누가 소리쳐 나마스테, 하겠습니까. 게다가 일주일 열흘씩 줄곧 걸어왔으니까 더욱 그럴 수밖에요. 하지만 김형. 나는 단지 지쳤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설산의 금강석 같은 고요가, 산길을 여러 날 걷는 동안, 내 안의 본성으로 스며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아전인수일까요? ◇곰파(사원)에서 필자가 합장을 하고 있다. 여긴 해발 4000여m, 텡보체입니다. 뽐내는 듯한 수많은 히말라야 설산의 동심원 가운데로 불쑥 솟아 있는 언덕에 이 아름다운 마을 텡보체가 있습니다. 텡보체 곰파(사원)는 쿰부 지역 티베트 불교의 중심입니다. 탐셀쿠봉과 캉테카봉이 손에 잡힐 듯하고, 아마다블람봉이 바로 눈앞에 있으며, 네팔과 티베트의 접경이 되는 에베레스트 산군(山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습니다. 수십 마리의 야크와 소떼가 곰파 앞의 비탈진 광장에서 쉬고 있는 중입니다. 머지않아 이곳에서 티베트 불교의 큰 축제가 열린다는데 보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축제 기간에 쿰부 지역의 모든 승려들과 세르파들이 이곳에 모인다고 합니다. 나는 유서 깊은 텡보체 곰파의 돌층계에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습니다. 키가 훌쩍 큰 서양 처녀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곰파로 들어서다가 환하게 웃으면서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옵니다. 나마스테……. 나도 물론 마주 인사하지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인사했지만, 피차 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녀의 달싹이는 입술과 부드러운 눈빛을 보았고 그녀 또한 묵음이 되다시피 한 나의 인사말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큰 소리로 인사할 때보다, 손을 붙잡고 야단스럽게 포옹할 때보다 더 깊고, 더 따뜻하게, 입술만 달싹인 ‘나마스테’가 서로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었다고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설산과 곰파의 오래 묵은 추녀와 바람 속의 오색 룽다(風馬·깃발)는 물론 하다못해 내 등뒤로 기어가고 있을지 모를 미물에게조차 우리는 큰 소리로 폐를 끼친 바가 없습니다. 잠들어 있을 노스님의 꿈자리도 훼방놓지 않았습니다. 나는 혼자서 길을 떠나왔습니다. 김형도 느끼시겠지만, 내가 글을 쓸 때 받는 고통의 하나는 뭐든지 한정짓고 마는 언어의 속성을 어떻게 뚫고 나가느냐 하는 점입니다. 산문은 추상적 관념들의 감각적 구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목수는 집을 지을 때 삶을 집 속에 담으려 할까요, 집으로부터 저 무한한 우주로 삶을 나아가게 하려 할까요? ◇절벽을 끼고 걷는 길. 자칫 발을 헛디디면 ‘히말라의 별‘이 되고 만다. 내가 우주를 가리켜 사랑이라고 불렀을 때, 어떤 독자는 침대를 떠올립니다. 극단적인 비유지만 사실입니다. 독자의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으려는 야망에 불타면서 언어를 동원하면 할수록 의미는 오히려 한정되고 왜곡은 커지는 걸 김형도 빈번히 경험했을 것입니다. 간밤에 능히 우주적인 농담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다시 보면 천박한 개그에 불과한 경우도 있습니다. 내 산문들이 ‘소음’이 되어 내 몸으로 다시 꽂혀올 때, 나는 아예 미치기 직전의 상태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가 텡보체의 곰파 돌층계에서 키 큰 서양 처녀와 인사말을 나누었듯이 ‘말없는 묵음의 소설’이 제일 좋은 소설이 될 테지요. 말없는 여행이라면 지금의 나처럼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도대체 ‘말없는 소설’은 어디서 그 방법을 찾아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김형. 내가 혼자 짐을 꾸려 떠나온 것은 내 조국의 ‘말’을 등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근원적인 쓸쓸함에서 하루라도 온전히 해방될 수 없기 때문에, 오류와 왜곡과 한정이 카르마(업)처럼 따라붙을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평생 소음 같은 말 속에 갇혀 살았고, 소음 같은 말을 계속 지어냈으며, 짐작하거니와 앞으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김형. 히말라야는 거대한 묵음의 언어입니다. 이 햇빛 속에 쭈그려 앉아 눈물이라도 날 것처럼 행복하게 나는 지금, 묵음의 언어를 히말라야로부터 듣고 있습니다. 아, 히말라야는 ‘말없는 소설’을 얼마든지 쓸 수 있겠구나, 어떤 한정적인 언어로도 그 한정의 경계를 허물고 우주조차 담아낼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높이 오갈수록 오가는 행인이 적으니 길은 꿈인 듯 생시인 듯 텅 비었습니다. 수목한계선을 넘었는지 땅바닥에 낮은 포복 자세로 엎드린 관목들 사이로 가끔 돌멩이들이 굴러내려 깜짝 놀라곤 합니다. 강은 오른편 발밑에 있습니다. 거의 직벽으로 쓸려 내려간 단층 밑에서 우유 같은 흰 강이 다급하게 흘러갑니다. 딴생각을 하다가 잘못 헛디디면 영원히 히말라야의 별이 되고 말 그런 길입니다. 자유는 티베트 말로 ‘네중’입니다. 네(Nge)는 ‘틀림없이’라는 뜻이고 중(jung)은 ‘벗어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네중’이란 티베트 말의 속뜻을 새기면서 강 위로 걸린 출렁다리를 지나갑니다. 성기게 올려놓은 출렁다리의 판자 저 밑으로 강이 소용돌이치며 까마득히 흐르고 있습니다.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가고 있는 기분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면 나는 ‘틀림없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부터 벗어나야 참으로 자유로워질까요? 내 욕망? 내 가정? 내 언어들? 벗어나기는커녕 무엇으로부터 먼저 벗어나야 하는지도 모르니, 히말라야 산협 사이의 위태로운 길을 혼자 흐르고 있는 장년의 내가 참으로 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마다블람봉의 정수리는 어느새 구름 속으로 숨고 강 건너편 벼랑이 제 스스로 허물어져 강으로 쑤셔박히는 굉음이 가슴에 사무치게 들어옵니다. 오늘은 티베트 불교의 큰 스승 뇨슐 켄포 린보체가 썼다는 시를 옮겨 적으면서, 김형이 그리워 쓰는 나의 두서 없는 편지를 끝낼까 합니다. 부디 편안하십시오.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환상이고 덧없나니/이원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은/고통을 행복이라 여기는구나/마치 칼끝에 묻은 벌꿀을 핥는 것처럼/실재인 것으로 굳게 집착하나니/얼마나 어리석은가!/관심을 안으로 돌리게나, 친구여. |
가져온 곳: [킬리만자로의 표범]  글쓴이: 킬리만자로 바로 가기
'文學산책 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11> (0) | 2005.09.11 |
---|---|
[스크랩] 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9> (0) | 2005.09.11 |
[스크랩] 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7> (0) | 2005.09.11 |
[스크랩] 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 <6> (0) | 2005.09.11 |
[스크랩] 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 <5> (0) | 2005.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