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⑫ 야크에게서 배운다 |
김형. 오르쇼(Orsho)에서 길은 두 갈래가
된다는 말을 내가 했던가요?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언덕을 지나 품부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는 강을 건너면 페리체(Pheriche·4280m)가
나오고, 직진하여 계속 임자콜라강을 따라가면 딩보체(Dingboche·4360m)에 이르지요. 내려올 때 페리체를 거치기로 하고 우선 강을
따라가는 딩보체 방향을 선택합니다. 지도를 살펴본 바, 로체(Lhotse·8516m)나 피크38봉(Peak38·7591m)이 전방에
있어야 하지만 구름과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굉음이 나서 고개를 돌리니 강 건너편에서 막 산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경사 급한 산이라서 풍화작용을 받아 이미 내부적으로 균열이 생겨난 상태에서 어느 한순간 와르르르, 깎아지른 듯한 산의 한쪽 면이 주저앉고 마는 것입니다. 해발 수백m를 단숨에 주저앉은 돌과 메마른 흙이 임자콜라강으로 쏜살같이 쑤셔 박힙니다. 길이 막힌 강물이 멈칫멈칫하더니 이내 다른 길을 새로 내어 격류로 쏟아져 흐릅니다. 강은 물론이거니와 산조차 젊어 역동적인 것이 바로 히말라야입니다. 크지 않은 나무다리를 건너 얼마 동안 더 나아가자 황량한 분지에 자리 잡은 딩보체 마을이 나타납니다. 너른 보리밭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남체바자르보다 더 낮은 박딩마을이나 조르살레만 해도 푸른 보리밭이 바람에 물결치곤 했는데, 해발 4000m를 훌쩍 넘긴 이곳의 보리밭은 아직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습니다. 히말라야의 계절은 해발고도를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박딩이나 조르살레엔 봄이 와 있어도 딩보체마을에선 여전히 겨울이 떠나지 않습니다. 딩보체는 꽤 큰 마을입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쪽으로 난 길과 피크38봉이나 아일랜드 피크(Island peak)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요지이니 그럴만하지요. 꽤 여러 개의 롯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내가 머물기로 한 곳은 프렌드십 롯지로서 낡은 이층집입니다. 이제 겨우 점심때지만 날씨도 좋지 않고 고소적응도 해야 하니 롯지에 들어가 쉬기로 합니다. 눈발이 다시 날립니다. 내일 아침에도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고소적응을 해야 합니다. 다음 머물 예정인 마을 로부체(Lobuche)는 해발 5000m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컨디션 조절이 필요하다면 내일 무리하게 로부체로 가지 말고 아일랜드피크봉 아랫마을 추쿵(Chhukung·4740m)이나 다녀오는 게 좋을 것이라고, 롯지 식당에서 만난 독일 남자가 충고를 합니다. 눈이 십리쯤 들어가고 볼이 홀쭉해진 나의 초췌한 면면을 살피고 나서 우정으로 던져주는 충고입니다. 추쿵에선 아일랜드봉과 피크38봉은 물론 멀리 마칼루봉(Makal·8481m)까지 볼 수 있어 색다른 경험이 될 거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매년 이곳에 온다는 그 독일남자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춥지 않나요?” “습관이 돼서 괜찮습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겹겹이 껴입고 앉은 내 쪽입니다. 하루하루 날짜를 계산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년 이곳에 오면서도 그 남자는 날짜 따위를 계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컴퓨터 전문회사를 운영하는 그 남자는 이미 사흘째 이 롯지에 머물고 있는 중입니다. 보통 사람 걸음으로 나흘이면 올 수 있는 길을 여드레에 걸쳐 왔다는 자괴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내가 이번엔 부끄러워 고개를 숙입니다. 김형도 알다시피 직장에 몸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써야 할 연재소설이 있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허랑한 ‘백수건달’인 내가 왜 컴퓨터 회사를 운영하는 그 남자보다 더 시간에 쫓기듯 걸어야 할까요. 말할 것도 없이, 달리기 경쟁하는 것처럼 살아온 한국사회에서 훈련된 관성이 내 몸 안에 강력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을 진 검은 야크. 밤은 길고도 춥습니다. 침낭 속에 잔뜩 오그리고 누웠는데도 한기 때문에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가끔 어느 방향에선가 와르르르 하고 산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비몽사몽 잠에 빠져들면 웬일인지 이미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가 자꾸 현몽합니다. 집 떠난 지 채 두 주도 안 됐는데 이미 절상(折傷)의 고독감이 내 명치를 누르고 있다는 걸 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고독은, 버나드쇼의 말처럼 ‘방문하기엔 좋은 장소지만 체재하기엔 쓸쓸한 장소’입니다. 아니 쓸쓸한 장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약해지고 무너져 가고 있다고 느낄 때 고독은 ‘처형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고산에 오르는 알피니스트들은 7000, 8000m의 고봉에 오를 때, 바위 모서리에 매달려 비박을 하면서 한밤에 얼어붙은 산이 쩌억 하고 갈라지는 듯한 소리를 홀로 들을 때, 무엇으로 그 절대고독을 견디는 것일까요. 형영상조(形影相弔)라고 했습니다. 내가 잠들지 못하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형영상조, 그러니까 내 몸과 그림자가 서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자기 연민의 고독 때문이라는 걸 이제 압니다. 옴 아 훔 벤자 구루 페마 삿디 훔. 나는 책에서 배운 대로 침낭 속에 고치처럼 누워 ‘만트라’를 암송합니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만트라가 부정적인 것, 예컨대 의심, 불안, 고독, 사악한 욕망 따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단단한 갑옷이라고 믿습니다. ‘옴 마니 밧메홈’도 그렇습니다. 만트라는 진언(眞言)으로서 ‘마음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영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그것은 소리의 정수이기도 하니, 김형도 신경이 날카롭고 마음이 종잡을 수 없게 흘러간다고 느낄 때, 소외와 고독 때문에 삶의 내밀한 질서와 규범을 모조리 팽개치고 싶을 때, 이 만트라를 자꾸 암송해 보십시오. 티베트 사람들은 만트라의 반복적인 암송만으로도 얼마든 영혼의 에너지에 긍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음날, 날씨는 다행히 맑습니다. 나는 독일 남자의 충고를 뿌리치고 곧 행장을 꾸려 로부체로 출발합니다. 마을 뒤편의 가파른 경사면을 삼십여분 올라가니 갑자기 휑하게 열린 고원의 분지가 나타납니다. 전방이 까마득해 보일 정도의 너른 분지입니다. 방목된 야크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고, 야크들을 위험할 때 피신시키는 헛간들이 드문드문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드넓은 평지가 있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 마음이 한순간 환하게 열립니다. 야크들은 연방 메마른 대지를 핥습니다. 놀랍게도, 야크들은 땅을 핥아서 대지에 달라붙은 영양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여름이 와서 대지에 설령 풀이 자란다고 해도 야크들은 풀을 뜯지 않는다고 합니다. 양들은 풀을 뿌리째 뽑아먹어 대지를 더욱 헐벗게 하는 데 비해, 덩치가 양들보다 훨씬 큰 야크는 절대로 어린 풀들도 송두리째 뜯어먹지 않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다른 생명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과연 야크들은 얼어붙은 대지를 열심히 핥고 있습니다. 아침이슬과 이슬에 묻은 미생물이나 기타 영양소들을 핥아 흡수하는 중이지요. 야크들에게 외경감이 절로 생깁니다. 김형은 우리 인류가 얼마나 야만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하고 자연을 훼손해 왔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특히 선진산업사회의 광적인 탐욕과 소비는 끔찍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류의 마지막 세대인 것처럼, 내일 이곳에서 살아야 할 생명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지금도 맹렬히 지구를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마치 끝장을 보려는 것 같습니다. 그 선진산업사회의 탐욕이 만드는 폐해는 거의 전부 네팔 같은 후진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이렇게 부도덕했던 시대가 현대의 산업사회 말고 또 언제 있었던가요. 야크는 풀을 송두리째 뜯지 않습니다. 야크는 부드럽게 대지를 핥아서 누워 있던 풀을 일으켜 세우고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키우고 지켜 갑니다. 세세연년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지구를 어떻게 지켜가야 하는지 야크는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
가져온 곳: [킬리만자로의 표범]  글쓴이: 킬리만자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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