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히말라야에서 보내는 편지]⑬왜 산인들은 정상에
오르는가 | |||
혹시 촐라체(Cholatse)라는 봉우리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해발 6335m에 불과하지만 아주 수려한 산입니다. 타보체봉(Taboche peak·6495)과 형제처럼 나란히 붙어 있지요. 딩보체 마을을 출발해 가파른 경사면을 30여 분쯤 오르면 탁 트인 평평한 고원분지에 이르는데요, 그곳에 올라서면 가슴속으로 확 쓸려 들어오는 두 개의 잘생긴 봉우리가 있는데 바로 타보체 피크와 촐라체입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봅니다. 설산의 정수리까지 손바닥처럼 바라보입니다. 얼마 전 김형도 신문기사를 통해 보셨으리라고 짐작됩니다만, 바로 우리의 젊은 산악인 박정헌과 최강식이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했다가 하산길에 조난을 당했던 산입니다. 그들은 크레바스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여 갈비뼈와 발목이 부러지고 손가락 발가락을 동상으로 잃는 끔찍한 과정을 놀라운 용기와 인내, 그리고 동지애로 살아 돌아와 우리를 감동시켰던 장본인들입니다. 등반 스타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극지법 스타일의 등반은 최종적으로 더 높은 정상을 정복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가 됩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많은 전문 세르파들과 우수한 장비들이 동원되어야 하고 돈도 많이 듭니다. 말하자면 한두 사람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수십 명의 다른 대원들과 물자와 장비가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등정주의 등반인 셈이지요. 그러나 알파인 스타일은 다릅니다. 알파인 등반은 얼마나 높이 올랐느냐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등로주의로서, 어떻게 올랐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특히 거벽 등반에 잘 맞는 알파인 스타일 등반은 극지법 스타일이 차례로 캠프를 설치해가는 것과 달리, 짐을 최소화한 뒤 고정 자일이나 세르파 등의 도움 없이 가급적 단숨에 치고 넘어가는 스타일입니다. 더 고독하고 더 위험한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세계 등반의 추세는 오르는 높이보다 오르는 방법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촐라체 북벽을 타고 올랐습니다. 장대한 빙벽과 크레바스와 돌출한 오버행을 최소의 장비에 의지해 새로운 변형 루트를 통해 정상에 오른 것은 베이스캠프를 출발하고 사흘 만이었다고 합니다. 등로주의 등반의 새로운 기록을 세운 셈이었지요. 나는 카트만두에서 그들 촐라체 등반팀의 베이스캠프를 지켰던 송성재씨로부터 등반과 조난 과정을 자세히 듣고, 또 송성재씨가 써둔 등정일지도 정독했기 때문에 모든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거의 맨손으로 올랐던 북벽이 보였습니다. 거미손이 아니고선 들러붙어 있기도 어려울 만큼 도도하고 장대한 암벽이었습니다. 등반에 성공하여 혹 방심했던 것일까. 거의 탈진한 상태였지만 그들은 75도 이상의 설사면을 여러 시간 내려온 뒤 오히려 완만한 경사의 눈길을 걸을 때 최악의 사고를 맞았습니다. 박정헌의 뒤를 따라오던 젊은 최강식이 크레바스에 추락하고만 것입니다. 자일로 서로를 연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강식이 크레바스로 추락하는 순간 박정헌은 엄청난 충격을 느꼈습니다. 피켈로 얼음사면을 본능적으로 찍어 끌려들어가는 몸에 제동을 걸었으나 자일이 몸을 옥죄고 있어 박정헌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우드득 하고 자일의 힘에 의해 갈비뼈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크레바스로 추락한 최강식은 물론 보이지 않았고, 잠시 후 ‘살려 달라’는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렸습니다. 겨우 5mm짜리 자일이 빙벽 틈에 대롱대롱 매달린 최강식의 몸과 설사면에 간신히 멈춰 엎드린 박정헌의 몸을 연결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최강식의 무게는 장비와 자일과 몸무게를 합쳐 90kg이 넘었고 박정헌은 겨우 70kg이었으므로 갈비뼈까지 나간 박정헌이 최강식을 끌어올린다는 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형, 살려주세요…” “조금만 기다려. 형이 구해줄게.” 최강식은 크레바스로 추락할 때 빙벽에 부딪혀 이미 두 발목이 부러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젊은 최강식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일을 끊지 않으면 자신까지 끌려 내려가 추락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박정헌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두 손으로 최강식은 빙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고, 박정헌은 자일을 잡아당겼습니다. 오후 4시쯤 사고가 났는데 어두워질 때까지 사투는 계속됐지요. 나 같은 인간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싸움이었습니다. 김형. 결국 그들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이 믿을 수 없는 극적 드라마는 최강식이 크레바스에서 올라온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두 발목이 부러졌고 다른 한 사람은 늑골이 주저앉았으며 손가락 발가락이 얼어 굳어 있었습니다. 벌써 며칠째 물 한 모금 먹지 못했고 배낭을 버렸기 때문에 영하 20도의 밤을 견딜 어떤 장비도 없었지요. 설사면에 웅크리고 앉아 밤을 새우면서 그들이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가끔 고함을 질러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는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사고의 과정에서 박정헌은 안경을 잃었는데 시력은 0.3에 불과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날 낮엔 설맹증세까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부터 시작된 죽음의 장정은 밤이 돼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정헌은 50여m나 굴러 떨어지기도 했고 피켈로 눈두덩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지요. 급경사에선 서로를 자일로 묶었고, 낮은 포복자세로 기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공포의 밤이 찾아왔습니다. 처절한 생환의 극적 드라마는 물론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됩니다. 나는 촐라체를 바라보며 걷습니다, 김형. 어떤 고난보다도 더 높은 삶에 대한 경이로운 인간 의지와 사람 사이를 묶은 우의의 힘이 내 가슴을 뜨겁게 덥혀줍니다. 그들은 손가락 발가락을 대부분 잃고, 그러나 살아 돌아왔습니다.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 에베레스트에서 끝내 죽어간 유명한 등산가 조지 맬러리는 말했습니다. 수많은 산악인들이 산에 오르다가 생을 마감했지요. 우리나라 사람으로선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고상돈씨 생각이 납니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고 돌아와 카퍼레이드까지 했던 그도 끝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산에서 죽었습니다. 어찌 고상돈씨뿐이겠습니까. 에베레스트는 세계적 산악인들의 무덤입니다. 대체 그들은 무엇을 찾아 산에 오를까요. 한 시간여를 걸어서야 평평한 고원의 분지 끝에 다다릅니다. 촐라체는 그러나 여전히 내 옆에 우뚝 서 있습니다. ‘자일을 끊어야 하나.’ 나는 박정헌이 되어 중얼거려 봅니다. 자일을 끊지 않으면 둘이 함께 죽을지도 모를 그 순간, 박정헌의 머릿속엔 도대체 무엇이 흘러가고 있었을까요. 천길 크레바스 틈새에서 5mm 자일 하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최강식은 또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산소가 희박한 고산을 등반할 때 전문산악인들조차 온전한 판단력을 유지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상한 환각을 경험하는 일도 많다고 합니다. 그래도 인간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심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고독은 너를 서서히 죽이는 힘이다.”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위대한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는 고산에서의 고독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 자신이 모르듯이 나 역시 수많은 산악인들이 왜 몸숨을 걸고 히말라야를 오르는지 알지 못합니다. 정상엔 허공이 있을 뿐인데도요.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상이란 산의 꼭대기가 아니다. 정상은 하나의 종점이고 모든 선이 모여드는 곳이며 만물이 생성하고 모습을 바꾸는 지점이다. 종국엔 세계가 모두 바뀌는 곳이며 모든 것이 완결되는 곳이다…’ 그렇습니다, 김형. 정상엔 모든 것이 ‘무’로 바뀌는 허공이 있을 뿐입니다. 고원에 눈바람이 또 불기 시작합니다. |
가져온 곳: [킬리만자로의 표범]  글쓴이: 킬리만자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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