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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용호의 꽃에게 길을 묻다]⑦히말라야 꽃기린

鶴山 徐 仁 2005. 9. 11. 19:15
[조용호의 꽃에게 길을 묻다]⑦히말라야 꽃기린
시리도록 붉은 저 생명력
따뜻한 희망 한줌 피우다
북받치는 설움 때문에 우는 울음도 있겠지만, 자기 바깥의 세상과 사람과 사물에 대해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쉬 감정이 이입되는 맑은 울음도 있다. 울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무장해제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눈치보고 체면을 차리다 보면 울기도 쉽지 않다.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 우는 울음은 더욱 그렇다. 히말라야에 동행했던 여인 하나는 유독 잘 울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늘 명랑한 편이었다.

히말라야에 가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는 생각이다. 하나는 산을 좋아하는 등산가형. 산 좋아하는 이들치고 히말라야 설산을 오르거나, 그도 아니면 그 아래 산길이라도 걷고 싶지 않은 이 누가 있을까. 그러니 이들을 논외로 친다면 나머지 부류는 속 깊은 곳에서 절절한 해방감을 원하는, 순수에 대한 갈망이 여느 사람들보다 더 강렬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깊은 오지의 산골을 비싼 경비를 들여 일부러 찾는 이들에게는 문명의 찌든 때와 세속의 범박한 일상을 유난히 견디지 못하는 피가 흐르고 있을지 모른다.

네팔 말로 ‘따또’는 ‘따뜻한’이라는 형용사이고, ‘바니‘는 물이다. 그러니 따또바니는 ‘따뜻한 물’이다. ‘따또’는 단어의 울림만으로도 ‘따뜻하다’는 우리말의 어감과 비슷하다. 그래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산군 아랫마을 ‘따또바니’에 더 정감이 갔는지 모르겠다.

산이 좋아 산에 가는데 이런저런 토를 다는 일은 괜한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여인은 그런 선입견을 가장 맞춤하게 확인시켜주는 인물이었다. 도시에서 살다가 귀농을 했는데, 히말라야에 오기 전 간 부위에 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 종양이 악성인지 양성인지, 위험한 것인지 아닌지는 정밀검사를 받아보아야 안다고 했다. 그미는 히말라야에 다녀온 뒤로 검사를 미루었다. 생명이 자연의 것이라면 히말라야의 창자 속을 거니는 일은 생명 그 자체를 껴안는 따뜻한 ‘의식’일 터이다.

따또바니에 가면 온천수에 몸을 담글 수 있다고 했다. 트레킹 여정의 중간쯤 ‘가사’의 로지에서 일어나 따또바니를 향해 다시 하루치 걷기를 시작했을 때,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던 피로를 이곳에 가면 흔쾌히 보상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먼지 낀 허름한 나무 의자와 탁자가 전부인 산길의 찻집에서도 ‘따또바니’를 외치곤 했다. 따뜻한 물 한 컵을 주문한 것이다. 네팔에서 가장 많이 쓰는 ‘나마스테’라는 인사말 다음으로는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가장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말이 따또바니일 것이다.

‘꽃기린’을 만난 것은 비가 오락가락하던 오후 무렵이었다. 따또바니가 그리 멀지 않다는 희망에, 지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작은 마을의 돌담 위에 빨간 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도처럼 길가 밭 경계선에 돌담을 쌓아놓았는데 한결같이 그 담 위에 빨간 꽃들이 피어 있었다.

아프리카 동남쪽 인도양에 떠 있는 마다가스카르가 원산지라는 이 꽃기린은 한국에서는 주로 화분에 재배하는 관상용으로 인기가 높은 품종이다. 본디 2m가 넘는 키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분재로 키우다보니 작달막한 꽃으로만 알고 있다. 몸체에는 가시가 무성하고, 작고 둥근 앙증맞은 꽃들이 대여섯 송이씩 무더기로 한 개의 꽃대에 매달려 있다. 야생으로 자라는 히말라야 꽃기린은 가지를 길게 담장 바깥으로 늘어뜨리고 원산지의 꽃처럼 늘씬한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왜 이곳 야생 꽃기린은 한결같이 돌담 위에 사는가. 꽃기린들이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 길을 오가는 수많은 당나귀들이 밭 너머의 작물들을 넘보지 못하도록 히말라야 산골 주민들이 가시가 많은 이 꽃을 돌담으로 인도했을 것이라는 뒤늦은 자각이 생긴다. 한국에 돌아와 찾아본 자료에서 이 꽃의 별명이 ‘예수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가시와 붉은 꽃이 예수가 지상의 마지막 길 머리에 썼던 가시면류관과 보혈(寶血)의 붉은 빛깔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이 그 별명의 배경이었다.

무성하게 우거진 꽃기린 그늘 아래 포터들이 짐을 지고 묵묵히 걸어간다. 하굣길 어린 여학생들은 꽃기린 담 아래 천으로 머리를 가린 채 웃으면서 지나간다. 포터와 어린 여자아이들과 나귀가 예수를 알까. 상관없다. 그들에게도 고통의 극한과 그 깊은 절망 속에서 생의 의미를 길어내는 따뜻한 신에 대한 믿음은 있을 터이다. 그 대상이 어떤 ‘신’인들 무슨 상관이랴.

다시 내리기 시작하는 비를 맞으며 따또바니에 도착했다. 서둘러 노천탕을 찾았는데, 기대를 부풀렸던 그 온천은 강가 자갈밭에 허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수년 전 이곳을 찾았던 소설가 박범신은 어쩌면 이리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가, 탄식했다. 반가움 때문이 아니라 조금도 나아진 게 없는 열악한 시설 때문이었으리라. 탕에서 나오면 샤워는 여러 사람들이 들어가 앉은 탕에 구멍을 뚫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그 ‘땟국물’을 재활용해야 한다. 관광객들에게 꾸준히 입장료를 받으면서도 그 돈이 다 어디로 가는지 시설에는 눈곱만큼도 투자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 하는 말이었다. 지금 네팔은 의회를 해산시킨 국왕과 마오이스트 반군들이 공존하는 현실이다. 나귀와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하층민들도 그렇지만, 노천탕을 관리하는 ‘권력자’ 혹은 ‘유지’들도 불안정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치러야 할 비생산적인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온천수가 섭씨 74도를 넘는 탓에 한쪽 탕은 사우나의 ‘열탕’ 같고, 한쪽은 그나마 따또바니가 아닌 치토바니(차가운 물)를 섞어 약간 미지근하다. 날씨가 맑은 날은 따또바니 속에서 히말라야 밤하늘 별을 보며 피로를 풀 수도 있다. 그날은 불행하게도 비만 내렸다. 따또바니 속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데 이마에는 쉼없이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진다. 며칠 동안의 피로가 혈관을 타고 화르르 돌아다니다가 이내 온몸이 노곤해진다.

그 나른한 피로 속으로 낮에 보았던 붉은 꽃기린의 영상이 떠올랐다. 담장마다 빨갛게 피어 있는 꽃기린들은 저마다 날카로운 가시를 달고 푸른 하늘 아래 명징한 빛깔로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늘 이면을 거느리는가. 꽃기린 또한 가시뿐만 아니라 줄기에는 독을 품고 있다. 무심코 꽃 한 송이라도 꺾을라치면 줄기에서 흰 즙이 흘러 여지없이 손가락에 묻는다. 이 액체가 눈이나 상처 부위에 닿으면 위험하다.

생명도 독을 품고 있다. 그것은 숙명적으로 탄생할 때부터 품고 나오는 죽음이라는 독이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생명은 없다. 생명은 죽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명이다. 죽음을 거느리지 않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 사물일 따름이다. 그 사물조차 기실 세월이 흐르면 풍화되고 스러진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말하는 것도 모순이다. 생명은 살아 있음으로 해서 단어 자체가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生命)의 한자풀이는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라던가. 그 여인은 생명을 생명답게 가꾸기 위해 히말라야에 왔다. 생명 반대편의 그늘을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기에 생명을 향유하기 위해 온 것이다. 꽃기린이 연약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시와 독을 품고 있지만, 그 여인은 자신 안에서 자라나는 독을 방출하기 위해 히말라야에 온 것이다. 그 어두운 바이러스를 설산의 희디흰 빛과 바람과 나귀의 방울 소리로 소독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니, 남은 것은 따뜻한 희망뿐이다. 네팔 말로 ‘아쌰’는 희망이다. 따또아쌰!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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