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을 불어가는 바람 소리가 귓전에서 쉼없이 웅웅거린다. 히말라야 고봉들에서 흘러내린 강물은 자갈 깔린 하상(河床)으로 달려가고, 강물 저쪽에는 만년설로 뒤덮인 설산 위로 설연(雪煙)이 날린다. 네팔 좀솜에서 마르파로 가는 외길에는 당나귀들의 배설물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그 길 위로 일군의 사람들이 바람을 가르며 묵묵히 걸어간다.
지난 3월에 출간된 장편소설 ‘나마스테’의 무대를 찾아 지난달 28일 작가 박범신(59)과 함께 히말라야에 온 한국의 독자 33명이 그들이다. 국내 작가가 집필한 작품을 들고 이렇듯 많은 독자들이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한 해외 무대를 찾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마르파보다 아름다운 동네, 보지 못했어요. 마을 앞으론 히말라야 빙하가 흘러내리는 칼리간다크 강이 있구요, 마을 뒤는 일 년 내내 바람 소리 붕붕 하는 설산이 있구요, 그리고 강과 마을 사이에 사과밭들이 있어요. …사과꽃 향기가 천지에 날아다니고 마을 어귀의 마니차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요.”
소설 속 주인공 ‘카밀’이 그를 사랑하는 한국 여인 ‘신우’에게 자신의 고향 ‘마르파’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다. 카밀은 이렇듯 아름다운 마르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아버지를 따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이사갔고, 다시 그곳에서 연인 사비나를 좇아 한국에 들어와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농성 현장에서 분신자살한 인물이다.
마르파는 비에 젖어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자 카밀이 어린 시절 놀던 우체국 뒤편으로 백년이 넘은 곰파(사원)가 보이고, 설산 밑 강가에는 연록의 싱그러운 이파리를 매단 사과나무들이 비를 맞고 있다. 좀솜에서 출발해 세 시간여에 걸쳐 비바람을 뚫고 걸어서 마르파에 도착한 독자들은 작은 음식점에서 토론을 벌였다.
독자들은 한국에서 실제로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외국인노동자를 고용했던 사람, 영화를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는 이, 학원 원장과 의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군으로 이루어졌다. “히말라야 여행 중 이곳 마르파에 들렀다가 한국말을 구사할 줄 아는 청년을 만났는데 그는 나에게 매우 불친절했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 혹독한 대접을 받았던 노동자였던 모양이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마르파가 고향인 소설 속 인물 카밀을 만들어냈다. 카밀의 할아버지는 티베트의 설산 카일라스에서 마르파로 왔고, 다시 카밀의 아버지는 마르파에서 수도 카트만두로 갔으며, 카밀은 하늘길을 지나 서울로 갔다가 죽었다. 카밀가(家) 3대의 여정은 우리가 근대화의 길을 걸어온 궤적과 같다. 우리 모두는 더 넓고 빠른 길을 찾아 걸어왔지만 얼마나 행복해진 것인가.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건 사실이지만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쓸쓸함을 이 길에서 과연 위로받고 있는가.”
작가의 말에 이어 독자들이 나섰다. 충남 홍성에서 온 최옥순씨는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울었다”며 “삶의 근원은 사랑이며, 사랑의 근원은 슬픔일 것이라는 자각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경기 고양시 화정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화가 박용일씨는 “소설의 실제 내용은 정작 치열하고 슬픈데, 그 묘사는 어떻게 그리 시리도록 아름다운지 감탄했다”며 “이미지 연상 효과가 강렬한 작품이었다”고 토로했다.
이 밖에도 소설 속 정사장면이 구체적이지 못해 실망스러웠다는 누군가의 ‘솔직한’ 항의에 좌중은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고, 외국인노동자들의 84일간에 걸친 성공회 농성 장면이 너무 길었고 결말이 급격하고 작위적이었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이들은 마르파를 떠나 투쿠체, 가사, 고라파니, 비레탄티를 거쳐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산군의 험한 길을 고통을 감수하며 계속 걸어갔다. 그 좁은 길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나귀들을 보면서 그들은 “고통은 카르마(업)를 쓸어내는 빗자루”라는 ‘나마스테’의 한 구절을 되새겼을지 모른다.
카트만두(네팔)= 글·사진 조용호기자 |
2005.05.06 (금) 1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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