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政治.社會 關係

[내 아내, 내 남편은 국회의원]열린우리당 김부겸 의원의 부인 이유미씨와 민주당 손봉숙 의원의 남편, 안청시 교수②

鶴山 徐 仁 2005. 9. 11. 09:02

[내 아내, 내 남편은 국회의원(1)] 열린우리당 김부겸 의원의 부인 이유미씨
“결혼 18년 만에 월급봉투 처음 구경했어요”

열린우리당 김부겸(金富謙) 의원의 부인 이유미(李由美)씨는 매일 아침 남편이 쏘렌토를 손수 운전해 출근하는 게 좀 못마땅하다. “권위주의를 타파하겠다”는 지역구민과의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남편의 뜻이야 이해한다. 하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 모임만도 두세 곳씩 다니는 사람이 직접 운전을 하고 다니니 걱정이 앞선다. 김 의원은 “술 마시면 대리운전 기사 부르니 걱정없다”고만 한다.

하긴 작년보다야 상황이 낫다.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김 의원은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했다. 45일간 면허정지 처분을 받아서다. 김 의원은 당시 “고향인 경북 상주에서 교통신호를 위반했고, 국회 근처에서 운전 중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다 적발되는 바람에 벌점이 늘어 45점이 됐다”고 머쓱해 했었다.

그는 “국회의원이 손수 운전하는 게 자랑거리는 아니지 않느냐”며 “택시 잡느라 길거리에서 시간 허비하느니 일분일초라도 아껴서 국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국민에 대한 책임 아니냐”고 말했다.

사실 이씨의 처녀적 마음을 움직인 것도 김 의원의 이런 소탈함과 넉넉함이었다. 부부가 되어 살다보면 장점이 오히려 단점으로 바뀐다더니 맞는 말이다. “남들처럼 검은색 세단을 끌고 다니진 않더라도 국회의원으로서의 대접은 받아야 하는데…. 남편은 너무나 겸손하다보니 솔직히 국회의원 대접을 못 받고 다닐 때가 많아요.”

아내 입장에선 이런 점이 싫을 수도 있겠다. 이씨를 경기도 군포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지난 8월 16일은 북측 대표단이 국회를 방문한 날이었다. 그런데 이날 김 의원은 강연회에 참석하러 대구에 갔다. “아침에, 중요한 날인데 국회에 참석 안하느냐고 물었더니 ‘오늘 같은 날은 나 안가도 갈 사람 많으니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생계 책임지는 가장은 우리 엄마”

남편의 살갑고 격의 없음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무조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형’이라 부르는 거예요. 정감이야 있지만 그런 태도가 오히려 위선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거잖아요. 마음에 안든다고 해봤자 어쩌겠어요. ‘당신은 타고난 정치인이다’하고 말지요.”

이씨는 남편이 지나치게 소박하고 털털하다고 은근슬쩍 흉을 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씨가 목에 힘이 들어간, 흔히 떠올리는 정치인의 아내 스타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몇 시간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 역시 남편과 닮은꼴이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 “한번도 인터뷰 해본 적이 없다”며 며칠째 인터뷰를 사양하더니 입을 열자 마음 좋은 이웃집 아주머니처럼 말도 잘한다. 그는 털털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오래된 구형 쏘나타 승용차를 몰고 문화센터 강좌를 들으러 다닌다. 지금이야 버젓한 사무실 하나에 직원 5명을 둔 컴퓨터 보수·수리업체 대표지만 이유미씨의 인생 자체가 드라마다. 물론 김부겸 의원을 남편으로 만나 얻은 인생이다.

김 의원과 과거 학생운동을 같이했던 후배들은 요즘도 “부겸이형 형수만큼 고생한 정치인의 아내는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씨는 서점을 시작으로 경양식집, 찻집, 도서관, 복사집 등 안해본 게 없다. 생계를 책임진 가장(家長)은 ‘남편 김부겸’이 아니라 ‘아내 이유미’였다. 남편은 정치한다고 늘 바빴지만 요즘 말로 하면 ‘백수’나 다름없었다.

서울대학교 앞 신림동의 ‘백두서점’을 남편 대신 운영할 땐 좌경 용공서적을 판다면서 걸핏하면 압수 수색을 당해야 했다. 경찰은 “남편 있는 곳을 불라”면서 이씨에게 “한 번만 더 연행되면 구속시킬 것”이라며 협박도 했다. 지금 대학 1학년인 둘째 딸을 임신한 채 연행돼 경찰서에서 사흘을 지내다 나온 적도 있다.

그러는 와중에 부부싸움도 많이 했다. 한데 내용은 “왜 돈을 안 벌어다 주냐”가 아니었다. “왜 자꾸 안해본 일을 하라고 하느냐”였다. 서점을 그만두자 김 의원이 “건국대 후문 앞에서 경양식집을 운영해보라”고 권했다.

“지하에서 음식장사하면 경찰이 들이닥칠 일 없지 않겠느냐면서요. 자신없다고 못하겠다 했는데 결국 주방에 서게 됐죠. 먹고 살아야했으니까요.” 초등학교도 안 간 두 딸을 집에 둔 채 직접 장보러 다니고 출납·회계를 맡느라 바빴다.

“남편은 머리가 좋아서 뒤에서 남을 일하도록 조정하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못한다고 해도 결국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일하게끔 만드니까요.(웃음)”

그래도 그렇지 허구한날 아내를 경찰서에 불려다니게 하고 결혼한 지 18년이 돼서야 첫 월급을 가져다준 남편을 너무 미화하는 것 아닌가. 이씨에게 “대체 뭘 믿고 결혼했느냐”고 묻자 “그땐 내가 뭘 좀 몰라서 결혼했지”라며 웃고 만다.

이젠 지역구 관리 도맡아

▲ 최근 모처럼 가족이 함께한 점심식사 자리에서.
김 의원이 여의도에서 일할 때 지역구인 경기 군포시를 챙기는 것은 이씨의 몫이다. 김 의원이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를 맡게 된 뒤로 더욱 국회 일이 많아졌다. “남편이 바빠서 못왔다”면서 행사에 대신 참석할 일도 부쩍 늘었다.

지역구에서 지내는 이씨로선 남편이 지역구에 얼굴을 좀더 비췄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국회가 열리지 않은 요즘 그는 “이럴 때 좀더 지역구에 신경쓰라”고 당부한다. “(김 의원이) 지역민의 얘기를 많이 전하고 잘 해주면 좋겠어요. 그런 게 다 표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고요.”

가족으로서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그는 정치에 관한 한 전체적인 큰 틀을 읽어내는 남편의 능력을 믿는다. “지역에 얼굴을 내보이는 것보다 중앙정치에서 묵묵히 열심히 일하고 인정받는 것도 중요한 것이라 하대요. 그 말도 맞지요. 이쪽(정치계)은 바람 한번 불면 판이 뒤집히고 그러잖아요.”

이씨는 지인 30여명으로 결성된 ‘뚜벅사랑’ 봉사단과 열린우리당 여성 당원 30~40명으로 구성된 ‘Hope Kim 희망봉사단’에서 생활보호대상자와 장애인 복지회관을 대상으로 무료급식 봉사를 한다. 화물터미널 확장 문제, 임대아파트 건립 등에 대해 지역민의 의견을 듣고 남편에게 전하기도 한다. 그는 “결국 아내는 욕을 듣지 않을 만큼 내조할 뿐”이라며 “본인이 잘해서 유권자에게 인정 받아야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씨가 처음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복학생이던 김부겸 의원을 만난 때는 1979년 10월. 당시 이씨는 대구의 한국은행 직원이었다. “하루는 셋째 오빠가 전화해 동대구역에 나가보니 오빠 친구들이 있데요. 밥 먹고 차 마시는데 앞자리에 앉은 한 사람이 유독 재미있더라고요. 그날 저녁 절 집으로 데려다준 것도 그 사람이었고요.”

그게 시작이었다. 한데 만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이씨는 “지명수배된 당신 애인은 어디에 숨어있느냐”며 경찰에 연행돼야 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였다. 직장 사람들은 “앞으로 너무 험난한 길을 걷게 될 것”이라며 말렸다. “사람이 살갑고 넉넉한 게 좋아서” 자꾸 김 의원에게 이끌렸다.

친정 집안에선 반대가 없었을까. 사실 친정 식구들도 학생운동에 관해선 뒤처질 게 없는 사람들이다. 첫째 오빠인 이영훈(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씨도 운동권 학생이었고, 셋째 오빠인 이영재씨는 한신대 학생회장으로 김 의원의 친구였다. 경북대 다니던 이씨의 동생도 학생운동하다 수감생활을 했었다. 특히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복학생 김부겸의 ‘짧은 연설’을 들은 첫째 오빠는 “내 여동생 밥은 안 굶기겠다”며 김 의원 편을 들었다. “민주화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학생마저 눈치를 본다면 군부세력의 집권연장 음모를 막을 수 없다”는, 전설적인 사자후(獅子吼)였다.

함께 걸은 정치역정

▲ 신혼시절.
1982년 대구 가톨릭 문화회관 강당에서 후배들이 장식해준 색종이 꽃을 배경으로 웨딩마치를 울렸다. 하지만 그후 남편의 길은 색종이처럼 밝지 못했다.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등을 거쳐 1992년, 1996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 고배를 마셨다.

“1992년 공천에서 탈락했을 때 남편이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더군요. 우스갯소리 잘 하고 껄껄거리기만 하던 양반이라 어찌나 속상했던지….” 그리고는 1992년 대선 직전 국가보안법 위반(불고지죄)으로 석 달간 감옥살이도 했다. 이씨는 석 달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면회를 갔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 번이나 떨어지자 “입에 풀칠은 해야하지 않겠느냐”며 국회 전문위원직을 일단 맡아보라는 제의도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순 없었다. “당장 생활형편은 나아지겠지만 그렇게 되면 하고 싶던 일을 영원히 못할 것 같았어요. 하면 잘 할 것 같은데 기회가 안 주어지니 불쌍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이 사람에게 돈 벌고 살라하면 평생 불행하게 살 것 같았고요.”

세 번째 도전할 때 부부가 정말 죽을 각오로 열심히 뛰었다. 어렵게 지역구 공약을 외울 필요도 없었다. “한번만 도와주세요. 이 사람, 자기 욕심 내는 사람 아닙니다. 도와주면 실망은 안시킬 겁니다.” 결국 민주당 세(勢)가 강하던 군포시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나와 260표밖에 안되는 차로 당선됐다.

그 후, 한차례 위기는 2003년 찾아왔다. 그해 7월 김 의원이 다른 소장파 의원들과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배신자’ ‘철새’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전 그때 반대했어요.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었고요. 남편 일 도우면서 한나라당 사람들과 봉사활동하며 같이 다녔는데 그분들과 인간적으로 등져야 한다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그러나 김 의원은 “재선 안돼도 좋다”며 단호했다. 나중에 보니 ‘인간 김부겸’을 보고 뜻을 같이 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때 김 의원을 몰아세우던 분들을 간혹 군포시 행사 때 만나게 되는데 오래간만에 만나면 다들 그렇게 반가울 수 없어요. 그런 걸 가식적으로만 볼 것도 아닌 것 같고요.”

정치인의 아내로 십수년 지내니 그도 어느덧 정치를 이해하게 됐나보다. 이씨는 “동료보다 10년 정도 늦었지만 그런 것들이 다 내공이 됐다”며 “쉽게 당선되기보다는 고생할 만큼 한 뒤 당선돼야 더욱 겸손해질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인의 아내가 보는 정치

이씨는 아침이면 신문 몇 개를 꼼꼼히 읽는다. 질문을 던지면 성격 좋은 남편은 학생에게 선생님이 가르쳐주듯 설명해준다. 요즘 이씨 걱정은 열린우리당 지지도가 떨어지는 데 있다. “다음 총선에서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슬쩍 남편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국가보안법의 ‘피해자’였던 남편을 둔 그에게 국가보안법 폐지 얘기를 꺼내봤다. “이것 때문에 갈등이 많은데 점차 개정해 폐지하는 게 옳다는 건 남편 생각과 같아요. 이 문제로 여야가 싸우는 건 정말 소모적이에요. 한꺼번에 다 없애면 불안해하는 국민도 많은데 합리적으로 결정돼야 할 것 같아요.”

열린우리당 의원의 부인 모임인 ‘우리 가족’에서 그는 회계 역할을 맡고 있다. “공인이라 사생활도 없고 모두들 힘들어해요. 그래도 정치란 가족의 희생 없이는 안되는 것 같아요. 가정생활에 충실했다간 정치를 못할 걸요? 아예 내놓은 사람이라고 여겨야지요.” 이씨는 “정치하는 사람도 그렇지만 아내들도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결혼 후 요즘처럼 마음이 편안한 때가 없었다”고 한다. “파란 많았던 결혼생활 20년이 정말 한순간에 지나가버렸어요. 당장 치를 선거도 없고요.(웃음)” 대출금은 다 못 갚았지만 지역구에 있는 38평 아파트가 ‘내 집’이다. ‘아빠는 간첩’이란 말을 들으며 자란 두 딸은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얼마 전엔 딸 셋을 데리고 제주도에서 3박4일 휴가를 보냈다. 가족이 한자리에 자주 모이진 못하지만 코미디언 아버지 덕분에 늘 웃음꽃이 핀다.

한번은 남편이 워낙 바빠 얼굴 볼 시간이 없었을 때 지방에 강의하러 간다기에 따라나서 봤다. “몇 번 해보니 사람이 할 짓이 못되더라고요. 밥 먹을 짬도 안나요. 그랬더니 이 양반이 ‘내 만날 이러고 산데이~’ 하대요.” 이씨는 “정치란 게 1~2년 후도 내다볼 수 없는 것 아니냐”며 “그저 기도하고 ‘잘 나갈 때 조심하라’고 잔소리만 한다”고 했다.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

 

 

 

 

 

 

 

 민주당 손봉숙 의원의 남편, 안청시 교수②
“내 말 절대 안들어… 자기 뜻 펼치도록 지켜봐주는 게 외조(外助)지”

▲ 지난 가을 네티즌들과의 번개팅 때 남편인 안청시교수가 참석해 '봉숙아 사랑해'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이건 계약위반이지. 마누라가 정치 시작할 때 우리 서로에게 피해주지 말자고 했었는데…. 설거지 같은 것이야 하겠지만 이건 원 마누라 때문에 끌려다니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안 좋네요.” 지난 8월 19일 강원도 용평에서 만난 서울대 정치학과 안청시(安淸市) 교수의 첫마디였다. 그때 안 교수에게로 부인 민주당 손봉숙(孫鳳淑·비례대표) 의원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는 왜 했나? 내 지금 이 사람(주간조선 취재기자)들에게 불평하고 있네. 빗길에 여기까지 온 양반들에게 내 굴복은 하겠지만….” 실은 ‘지금 바쁘고 인터뷰는 별 생각 없다’는 짧은 통화만 한 뒤 안 교수가 서울국제포럼 참석차 있다는 강원도 용평으로 무작정 찾아간 터였다.

“내 오늘 주제 발표 내용이 뭔 줄 아쇼? 준법정신 위에 국민 정서가 있고 그 위에 떼쓰는 것 있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의 우등생 그룹에 속하면서도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내용이오. 그런데 기자들이 요즘도 이렇게 떼써서 취재하고 그러나?” 할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안 교수는 “이왕 일이 이리 됐으니 내 마누라 위한 일이라는데 마누라 위해 할 얘기 있으면 합시다”라며 자리에 앉았다.

차가워진 분위기도 누그러뜨릴 겸, 경상북도 영주의 고향집에서 채소 키운다는 얘기를 물어봤다. 안 교수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두 평도 안되는 조그만 공간에 가지, 수세미, 호박, 봉숭아 등을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신가 보다.

“원 참, 사람들이 얄궂게 말해가지고선. 집사람을 ‘봉숙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럽지 ‘손 의원’ 그러는 게 오히려 닭살 아닌가요?” 국회 의원회관에서 ‘닭살 커플’로 소문났다고 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안 교수는 손 의원 보좌관에게 “우리 봉숙이 밥 잘 먹여 들여보내~”라고 하는가 하면 회식할 땐 “봉숙이, 많이 먹어~”라며 손 의원의 숟가락에 반찬을 집어 올려준다고 한다.

정치를 하고 여성운동을 하더라도 남편에게 아내는 아내인 법이다. “험한 곳에 아내를 내놓았다는 생각이 혹시 안 드냐”고 하자 안 교수는 “남편인 나도 제어가 안되는 사람인데 다른 남자들이 어쩌겠느냐”며 웃었다.

정치인 아내

손 의원은 국회에 입성한 뒤 그간 걸어온 길과 달리 다소 ‘과격파’의 길을 걷고 있다. 시민단체 출신도 아니고 정당 출신도 아니다. 정치학 박사로 국토통일원과 총무처 중앙공무원 교육원에서 일했고 강단에 숱하게 섰으며 한국여성정치연구소를 설립한 여성·정치계의 거목이다. 그런 그가 이라크 자이툰 부대 철군,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 인정, 사형제 폐지 등에 있어 소속해 있는 민주당보다 오히려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한목소리가 된 적이 많았다.

안 교수는 때때로 “나라면 그렇게 안할 텐데” 하고 말뿐이다. 정치학자의 길과 정치인의 길은 다르기 때문이란다. 안 교수는 “나야 (우리나라가) 미국과의 관계가 좋은 것이 국가안위에 좋다면 (이라크 파병을) 인정하는 편이지만, 아내는 ‘폭력은 절대 안된다’는 강경한 자세”라고 말했다. 손 의원은 비폭력·평화주의를 가장 근본으로 내세워왔다. 안 교수는 “나도 사형제 폐지에 찬성하지만 그렇다고 깃발 들고 마이크 앞에 서진 않는다”며 “교수인 내가 그러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손 의원은 최근 여야 의원 20여명과 회의가 개의되지 않거나 지연되는 사유를 회의록에 기재하는 국회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손 의원은 지난 5월 3일 국회 본회의 개의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지자 ‘시간 엄수’라고 쓴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내 ‘또 누구다운 짓 했구먼’ ‘좀 참지 뭘 저랬나’ 했어요. 마누라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듣는 걸 기대하지도 않아요.”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정치학자 남편이 보기에 정치인 아내가 지난 1년 간 보여준 ‘정치 점수’는 그리 엉망은 아닌가보다. 안 교수는 “간섭 않고 믿어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내 기분 나빠도 정치적 판단을 강요하거나,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요. 정치입문 같은 문제야 상의하지만 손봉숙도 어떤 부분에선 절대 양보 않고요. 이라크 파병 문제는 ‘이렇게 반대하는 정치인이 있었다는 기록이라도 남겨야 한다’고 하더군요.”

안 교수는 아내가 국회에 들어가 국가 기틀이나 정치인의 그릇된 행태를 바꿀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저런 것도 정치의 한 방법이구나’ 하는 걸 보여주고 미미하나마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한다면 의미 있을 것”이라고 한다.

부인이 소수 정당에 속해 있어 생기는 장점도 있다고 한다. “의정 활동을 크게 뒷받침할 수 있는 원내 정당은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의원 개개인이 창조적으로 일할 여지가 많은 것 같아요. 당론만 있는 당, 정치가만 있는 당, 이렇게들 말하지만 의원과 정체성으로 당이 만들어진다는 면에서 별 다를 바도 없는 것 같고요.”

첫 만남

▲ 손봉숙 의원의 1985년 이화여대 정치학과 박사학위 수여식.
1964년 서울대에서 열린 ‘모의 UN 안전보장이사회’였다. 당시 서울대 외교학과 2학년생 안청시는 의장 보좌관,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생 손봉숙은 한 국가의 대표로 참여했다. 동갑내기지만 안 교수가 전쟁통에 한 학년 늦었다. 그 후 둘은 버스 안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다.

“뭐가 예뻐? 삐쩍 마르기만 했었지. 한데 대학 3~4년 동안 만날 똑같은 검은 치마, 흰 블라우스 차림이더라고요. 저 나이에 저러기도 힘들겠다 싶고, 한편으론 나 같은 가난한 사람을 좀 알아주겠구나 싶었지.” 대학원에 먼저 입학한 손 의원이 서울대 강의를 듣게 되면서 둘의 만남도 늘었고 시내 영어학원의 타임 해독반에도 같이 다녔다.

1969년 11월 손 의원이 면사포를 썼다. 당시 대학원으로 진학한 안 교수는 해군장교로 복무 중이었고, 손 의원은 이화여대 행정대학원 조교였다. 휘경동의 단칸 셋방 살림은 손 의원의 조교 월급으로 근근이 이어갔다.

이후 1971년 안 교수가 미국 하와이대학의 동서문화센터 장학금을 받으면서 두 사람은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 생계와 학자금을 보태느라 생활전선에 나선 것은 손 의원이었다. 이듬해 손 의원은 석사과정도 병행했다. 둘째 딸을 임신한 채 낮에는 도서관서 꾸벅꾸벅 졸면서 공부하고, 밤엔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아내는 처음엔 한식당서 일하다가 팁을 더 많이 받는 양식당서 일했고, 돈 계산 하면서 영어 좀 한다는 말을 듣곤 음식과 칵테일 주문 받는 일을 하게 됐어요. 나중엔 한인교회 서기도 맡았고요.”

안 교수는 “마누라 고생만 잔뜩 시키고 도울 것도 없어 죽어라고 공부만 했었다”고 했다. 1977년 귀국할 땐 몇 푼 마련할 겸 현지에서 일부러 냉장고와 카펫을 사와서 팔기도 했다. 안 교수는 외교안보연구원에서 3개월간 월급을 선불로 받아 노량진 전셋방을 마련했다. 두 부부는 지금껏 이 6년을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했었다”고 기억한다.

동지간의 결합

안 교수 부부의 지인들은 두 사람을 “동지간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안 교수는 “살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상대방을 지원하고 자기계발을 했다. 안 교수는 요즘도 주례사에서 “그 자리에 서있지 말고 발전해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 손봉숙 의원이 2001년 동티모르에서 UN국제 선거관리위원으로 활동할 때 남편과 함께한 자리.

1971년 하와이 유학길에 오를 때 둘 다 정치학 석사였지만 1977년 돌아올 땐 안 교수만 박사였다. 안 교수는 2년 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입버릇처럼 “이제는 당신 차례”라고 말했다. 안 교수를 미국 하와이대학 장학생으로 추천했던 스승도 “안 공만큼은 몰라도 부인도 충분히 소질있으니 공부를 꼭 시키라”고 말했었다.

1980년 손 의원이 통일원에 근무할 때 마침 미국 프린스턴대의 우드로윌슨 스쿨에서 파빈 펠로십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안 교수는 “나 때문에 매여서 공부 못했다고 불평 말고 자기 능력을 시험해보라”며 부추겼다. 당시 손 의원의 나이가 38세였다. 이때가 바로 손 의원이 여성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안 교수는 “사춘기인 초등학교 두 딸을 키우느라 좀 어려웠지, 1년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1년 뒤 귀국한 아내에게 “밑져야 본전이지, 한번 해보라”며 이화여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을 밟도록 권했다. 결국 손 의원은 42세 때 ‘한국지방자치연구’로 이화여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후에도 1995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비교여성연구소 등 외국 대학의 연수 기회가 생기면 손 의원은 별 ‘죄책감’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싫은 기색 않고 지원해준 남편 덕분이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게 아니라 남편 따라 공부하러 가는 일도 많았다. 안 교수가 1988년 미국 프린스턴대학 교환교수로 있을 때 손 의원은 인근 럿거스 대학의 미국 여성정치연구소에서 일했고, 안 교수가 1996년 가을에 싱가포르대학에서 한국정치를 가르칠 때엔 손 의원이 동남아연구소 객원연구소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안 교수는 “외조를 잘 한다”는 말엔 곤혹스러워하지만 “능력만 있다면 남녀 가리지 않고 뜻을 펼쳐야 한다”는 기본 전제야 확실하다.

하와이 유학길에 올랐을 때였다. 하와이에 도착한 바로 그날, 안 교수는 손 의원에게 운전면허 시험용 미국 교통법규 책자를 줬다. “내일 시험이니 오늘 밤 당장 준비하라”면서. “이기적인 이유였어요. 내가 공부에 전념하려면 수퍼마켓 가고 아이들 학교 데리러 가는 시간을 아껴야했거든요.(웃음) 그리고 여자도 동등하게 뭐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마누라는 내 소유물 아니야”

안 교수의 태도는 늘 이랬다. 아내를 위해 특별히 무언가를 희생하고 특별히 잘해준다는 자세와는 달랐다. 손 의원이 정치 입문을 상의했을 때도 “능력 있으면 해라. 다만 나를 믿고 할 것은 없다. 서로 간섭하지 말자”였다. 지금도 안 교수는 “나야 잘난 것도 없이 먼저 박사학위 땄지만 기회 있으면 누구든지 먼저 하는 게 좋다”며 “여자라고 양보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지난해 가을 과로로 쓰러진 뒤 등산, 요가, 국선도, 명상 등에 열심이다. 주말이면 고향집을 찾아 소백산 들꽃도 보고 초암계곡의 물도 마신다. 그러면서 인생을 다시 배운다고 한다. 손 의원은 절반 정도만 동행한다. “정치인도 그렇겠지만 학자도 자칫 자기 틀에 파묻힐 수 있어요. 정년을 얼마 앞두고 요즘은 자연에 정직해지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결혼생활 햇수로 35년이지만 말다툼하기는 여타 부부와 다를 바 없다. 그는 “우리 마누라는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편이고, 고집도 세서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때도 있다”며 “산에 올라갔다오면 또 잊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생하고 싸우며 살아온 게 아깝고, 도시락 버리면 나만 배고플 것 같고, 또 별 달리 대안도 없어 잘 살고 있다”며 웃었다.

“엄마 닮아 말 안듣고 자기 고집대로 산다”는 큰 딸 정현씨는 미국 럿거스대학과 코넬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아리랑 방송국 앵커로 있고, 둘째 딸 정민씨는 이화여대 법대와 일본 규슈대학원을 졸업한 뒤 유통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혹시 손 의원이 3년 후 있을 선거에 지역구에서 출마하겠다고 하면 어떨까. “마누라가 내 소유물도 아니고 각자 영역 갖고 자연스럽게 살아왔는데 부자연스러운 일 없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제 아무리 능력 있어도 65세 넘으면 대개 은퇴하는 것 아니었던가요?”(웃음)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

 

 

 

 

여성 정치인의 남편이 말하는 여성

“인생방정식은 둘이 만나 셋, 넷이 되는 것”
남녀가 합심해 살아야 서로 발전

20년 가까이 여성 정치를 연구한 정치인을 아내로 둔 남편, 그의 여성관은 어떨까. 민주당 손봉숙 의원의 남편인 서울대 정치학과 안청시 교수는 주변에서 “애처가 아니냐” “페미니스트 아니냐”는 말을 들으면 곤혹스러워한다. 그는 “이기적으로 편하게 사는 방식을 택했을 뿐”이라며 “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고 잘라말한다. “그렇게 (페미니스트라고) 내가 말하면 위선”이라고도 덧붙였다.

다만 안 교수는 “역할이 다르더라도 남녀는 평등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서로의 능력을 발전시키면 가족, 친구, 사회 단위로 커지면서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다. 안 교수는 “각자 있으면 못할 일도 남녀가 모이면 할 수 있다”며 “남자가 여자를 지배할 것도 아니고 세상이 남녀 조화로 만들어진 것 아니냐”라고 했다. 또한 “남을 돌보거나 책임감을 갖고 사람을 움직이는 설득 면에선 여성이 더 우월하다”고도 했다.

안 교수는 깃발 들고 여성운동을 지원한 적은 없다. 하지만 서울대 여성학연구소의 겸임 교수를 2년간 맡았고, 학과 내 여성 교수나 여성 조교가 한 명도 없던 1980년대 중반부터 여성 교수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피력해왔다. 부인 손 의원과 지방자치 연구를 함께 하면서 “여성을 정계로 내보내는 원년으로 삼자”고도 했었다. “1990년 아내가 ‘여성정치연구소’를 설립할 무렵만 해도 ‘정치란 단어는 여성과 안 어울리니 빼자’고들 했어요. 사실 그 때 아내도 ‘외국 가보니 이렇더라’ 같은 식에서 여성정치 연구를 시작했죠.”

안 교수는 “인생 방정식은 수학 방정식과 달리 1+1이 둘이 아니라 셋, 넷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남성과 여성이 합심해 살아야 좋다는 말이다. “내가 즐겁고 떳떳하고 상대방도 즐겁게 사는 방식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길 바랄 뿐이에요. 학자라도 누군가를 교화할 순 없는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