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날아가는 두루마리(슥 5:1-4)

鶴山 徐 仁 2017. 9. 14. 10:28
9월 14일 (목)
날아가는 두루마리(슥 5:1-4)
  
 

1.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3.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4.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스가랴 제5장에는 스가랴서에 나오는 8가지의 환상 중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에 해당되는 두 개의 환상이 나오는데
오늘 본문은 여섯 번째인 두루마리 환상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환상은, 첫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는 주로 긍정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회복시켜주신다는 내용이 환상의 주된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소개될 세 가지 환상들에는 부정적인 내용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로 심판과 징계를 경고하는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가랴서의 환상들은 먼저 긍정적인 격려의 예언을 주신 다음 잘못된 것들을 지적하고 경고하며 바로 잡을 수 있게 하십니다. 먼저 칭찬과 격려로 마음의 문을 열게 하시고 그 다음 잘못된 점들을 지적하시며 교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고유한 교육방법이십니다.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십 규빗이니이다>(1-2절).
스가랴 선지자가 본 환상 속의 두루마리는 굉장히 큰 것이었습니다. 한 규빗이 45cm였으므로 길이가 20규빗이면 약 9미터,
너비가 10규빗이면 4.5미터나 되는 큰 두루마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에 적힌 글의 내용을 보십시오.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3절).
두루마리가 크다는 것은 이 세상에 도둑질하는 자가 그만큼 많고 따라서 온 땅에 내릴 하나님의 저주가 큰 두루마리에 빼곡히 적어야 할 만큼 엄청나다는 뜻입니다. 또한 두루마리가 <날아갔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신속성과 역동성을 상징하는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저주는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히 4:12). 하나님의 두루마리는 날아가므로 그만큼 신속하고 날카롭게 세상을 심판하고 저주할 것입니다.

 
  
  
 

-<날아가는 두루마리>에 대한 당신의 느낌을 적어 보십시오.
-본문의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작지 않고 큰 이유를 말씀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의 역동성을 체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 이 세상에는 도둑질하는 자가 너무 많아 큰 두루마리가 아니면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저주 또한 크고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두루마리가 크고 또한 날아가는 이유를 깊이 깨닫게 하사 언제나 역동적인 말씀 앞에서 더욱 바르게 더욱 진지하게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기복적 신앙, 그게 싸구려 은헤

20세기의 큰 신학자였던 ‘본회퍼’는 ‘싸구려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싸구려 은혜란 회개가 없는 용서, 훈련이 없는 세례, 제자도가 없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한마디로 희생 없이 쉽게 교회에 다니고자 하는 것을 말한답니다. 부담을 갖지 않고, 그저 자기 편하게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것, 그것을 선호하는 것, 축복은 받되 성도의 의무는
소홀히 하는 기복적 신앙, 그게 싸구려 은혜이다.
그러기에 현대 교회의 가장 큰 적(敵)은
외부의 핍박과 박해가 아니라 이 싸구려 은혜에 안주하고,
선호하는 성도들의 자세입니다.
-양의섭 목사의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에서-

 
   
 
  
 


이런 싸구려 은혜를 선호하고 안주하기에
언제나 은혜와 축복은 물질적인 면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요즘 같이 물질적인 세상에선,
나름대로 풍족한 세계에서는
굳이 예수 믿으라고 전도할 명분이 약해집니다.
예수 안 믿어도 잘 먹고 잘 사는 데
뭐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는 풍조가 강하게 조성됩니다.
그러기에 일반인들은 이런 싸구려 은혜와 축복이
강하게 풍기는 기독교보다는 뭔가 내면적이고,
정신적이라고 여겨지는 불교를 선호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을 구하는 이들은
그런 사찰(寺刹)로 몰려가는 안타까운 추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it is good to wait quietly for the salvation of the LORD.


 
    
 
  
 비젼교회 윤여재 목사
 믿음은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