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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성종실록> 해제

鶴山 徐 仁 2006. 7. 15. 23:14

1.《성종실록》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성종실록(成宗實錄)》은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재위 기간(1469년 11월 ~ 1494년 12월)의 25년 2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성종강정대왕실록(成宗康靖大王實錄)》이며, 모두 297권 150책으로 활판 인쇄되었다. 《성종실록》은 제14권 성종 3년 정월부터 기사의 다소에 상관없이 반드시 1개월을 1권으로 편철하였기 때문에 권수가 많아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성종실록》은 성종의 사후 4개월 뒤인 1495년(연산군 1) 4월에 영의정 노사신(盧思愼) 등의 건의로 춘추관(春秋館) 안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편찬을 시작하였다. 편찬 도중인 1498년(연산군 4)에 김일손(金馹孫)이 실록청에 제출한 사초(史草) 가운데 그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 弔義帝文〉과 〈화술주시 和述酒詩〉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신진사림들이 큰 화를 당하기도 했으나 실록 편찬 작업은 그대로 진행되어 이듬해인 1499년 3월에 인쇄가 완료되고 4사고(史庫)에 봉안되었다. 실록 편찬에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과 우의정 성준(成俊)이 총재관(總裁官) 으로, 지관사(知館事) 이극돈(李克敦)이하 동지관사 안침(安琛) 등 15인이 실록청 당상(堂上)으로, 편수관 표연말(表沿沫) 이하 74인은 모두 실록청 낭청(郎廳)으로 참여하였다.
총재관은 의정(議政) 중 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므로 처음에는 신승선이 총재관이 되어 편찬을 총 지휘하다가 뒤에 성준이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실록》 끝에 부기되어 있는 편찬에 관계한 전후 춘추관 관원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영관사(領館事): 영의정 신승선(愼承善) 감관사(監館事): 우의정 성준(成俊) 지관사(知館事): 이극돈(李克墩), 박건(朴健), 유순(柳洵), 홍귀달(洪貴達), 노공필(盧公弼), 윤효손(尹孝孫) 동지관사(同知館事): 조익정(趙益貞), 김수동(金壽童), 이육(李陸), 권건(權健), 김극검(金克儉), 신종호(申從護), 김제신(金悌臣), 허침(許琛), 안침(安琛) 편수관(編修官): 표연말(表沿沫), 권주(權柱), 윤희손(尹喜孫), 이균(李均), 이거, 강경서, 이승건(李承楗), 양희지(楊熙止), 이달선(李達善), 이유청(李惟淸), 이의무(李宜茂), 김봉, 김전(金詮), 이수공(李守恭), 안당, 이계복(李繼福), 이세영(李世英), 장순손(張順孫), 남궁찬(南宮燦), 박열(朴說), 손번(孫蕃), 허즙, 남세주(南世周), 최부(崔溥), 남재담(南再聃), 김삼준(金三俊), 이의손(李懿孫) 기주관(記注官): 이전, 유순정(柳順汀), 임유겸(任由謙), 정광필(鄭光弼), 이과(李顆), 김감(金勘), 성세정(成世貞), 이효문(李孝文), 손주(孫澍), 권균(權鈞) 기사관(記事官): 김천령(金千齡), 이효돈(李孝敦), 유희저(柳希渚), 권달수(權達手), 기저, 권민수(權敏手), 윤은보(尹殷輔), 조치우(曹致虞), 송흠(宋欽), 이유녕(李幼寧), 남곤(南袞), 이관(李寬), 신세건(辛世健), 신징(申澄), 강덕유(姜德裕), 정승조(鄭承祖), 이희순(李希舜), 한세환(韓世桓), 심순문(沈順門), 성중엄(成重淹), 정희량(鄭希良), 권오기(權五紀), 성희철(成希哲), 이행(李荇), 강징, 고세창(高世昌), 김배(金焙), 성윤조(成允祖), 이자(李滋), 신공제(申公濟), 김관(金寬), 김세필(金世弼), 이사공(李思恭), 문근(文瑾), 하계증(河繼曾), 서후(徐厚), 김숭조(金崇祖)

2.《성종실록》의 내용

성종의 이름은 혈()이며, 세조의 손자로 의경세자(懿敬世子: 追尊 德宗)와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의 둘째 아들이다. 처음에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고쳤다. 1469년 11월 예종이 재위한 지 1년만에 훙서하자 조모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그를 지명하여 왕위를 계승토록 하였다. 예종에게는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있었으나 어렸고, 또 성종의 형 월산군(月山君)도 있었으나 병약하였기 때문에 성종이 지명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종의 즉위 초기에는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고 원로 대신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구치관(具致寬)·최항(崔恒)·조석문(曹錫文)·홍윤성(洪允成)· 윤자운(尹子雲)·김국광(金國光) 등이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보필하였다. 성종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집현전(集賢殿)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홍문관(弘文館)을 창설하고 어진 선비를 이에 임명하여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어 고금의 치란과 시정의 득실을 연구하였다. 그는 세조 대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완성하여 조선 왕조 5백 년간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또 삼국 시대 이래로 숭상해 오던 불교를 억압하고 유학을 숭상하여 유교국가의 토대를 확고히 하였다. 이 때문에 성종 대에는 유교적 정치이념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사림정치가 시작되던 시기였으므로, 이를 표방하는 삼사(三司)의 언론활동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종 대에는 민족 문화에 관한 서적을 많이 편찬하였는데, 역사에 관한 서적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 지리에 관한 서적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학에 관한 서적으로 《동문선(東文選)》등을 편찬하였다. 성종은 크게 문화를 일으키고, 국방과 외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우리 나라의 평안도 함경도를 자주 침입하는 야인(野人: 女眞族)을 정벌하고, 남방의 왜인(倭人)에 대해서는 삼포(三浦)를 중심으로 한 무역을 증진하여 내치 외교에 큰 업적을 세워 조선 왕조의 전정 시기를 이루었다. 성종의 시호는 강정(康靖), 존호는 인문헌무흠성공효(仁文憲武欽聖恭孝)이고, 묘효는 성종(成宗)이며, 능호는 선릉(宣陵)으로 현재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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