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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종실록》의 편찬 경위 및
체제
《단종실록》은 조선 제6대 국왕 단종의
재위 기간(1452년 5월 ~ 1455 윤6월) 3년 2개월간의 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원래 이름은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였으나, 숙종 때 그를 단종(端宗)으로 추존한 후에는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이라고 하였다. 세조 때에 편찬된
원편(原編) 《노산군일기》 14권과 숙종 때에 편찬된 《단종대왕실록》 부록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산군일기》는 문종이 승하한 1452년
5월 14일부터 단종이 양위(讓位)하기 전날인 1455년 윤6월 10일까지를 수록하였다. 현존하는 《단종실록》의 표제에는 ‘단종대왕실록’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부록의 각 내면 권차(卷次)와 판심(版心)에도 ‘단종대왕실록 부록’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원편 14권의 각 내면 권차와 판심에는
‘노산군일기’라는 제명(題名)이 붙여져 있다. 《단종실록》의 원편인 《노산군일기》의 말미에는 다른 역대(歷代) 국왕 실록에 명기되어 있는 바와
같은 편찬(編纂) 연월일과 편찬자들의 성명·직위 등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노산군일기》의 편찬 연도와 편찬자들을 알 수 없으나,
단종이 살해된 세조 3년(1457) 10월 이후 세조의 재위시에 편찬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단종은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하게도
반역 죄인(叛逆罪人)으로 몰려 비명(非命)에 죽었으므로 세조 재위시에 편찬된 그의 실록은 ‘실록’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라고 불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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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 후 2백 4년 만인 숙종(肅宗) 24년(1698) 무인(戊寅) 11월 8일에 영의정 유상운(柳尙運)
등의 주청으로 노산군에게 ‘순정 안장 경순 돈효(純定安莊景順敦孝)’라는 시호(諡號)와 ‘단종(端宗)’ 이라는 묘호(廟號), ‘장릉(莊陵)’이라는
능호를 올리고, 종묘에서 복위 고유제(復位告由祭)를 올림로써 왕위를 복구하게 되었다. 6년 후인 숙종 30년(1704) 갑신 11월에는 사관의
상언에 따라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를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이라고 개칭하게 되었다. 《노산군일기》의 편찬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세조 10년(1464) 10월에 《정난일기(靖難日記)》를 편찬하면서 함께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노산군일기》의 편찬자들도
《정난일기》를 편찬한 신숙주·한명회·최항·노사신 등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이 주축되 되었을 것이다. 이는 《예종실록》 원년 4월 18일
신미(辛未)조에 “임금이 춘추관(春秋館)에 전하여 말하기를, ‘《노산군일기》’ 및 ‘계유 정난시 사초’가 입내 (入內)하였으니 내가 그
범례(凡例)를 보고자 한다.’ 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단종실록》의 말미(末尾)에 수록된 《단종대왕실록 부록》 1권에는 중종(中宗)
11년(1516)의 치제문을 비롯하여,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효종(孝宗)·현종(顯宗)조에 시행된 치체문, 대군으로 추봉(追封)한
숙종(肅宗) 7년(1681) 7월의 치제문과 24년(1698) 9월에 복위를 상소한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동년 11월 초8일 영의정 유상운(柳尙運) 등의 주청에 따라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올리고 복위한 사실과 6년 후인 숙종
30년(1704)에 《노산군일기》를 《단종대왕실록》으로 개칭한 전후 사정을 기록한 것이다. 이 부록은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송상기(宋相琦) 등이 숙종 30년 11월 7일에 정리하여 기록하였다.
2. 《단종실록》의
내용
단종은 휘(諱)는 홍위(弘暐)이며, 문종(文宗)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의 외아들이다. 세종
30년(1448)에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문종 즉위년(1450) 8월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문종이 2년(1452) 5월 14일에
승하함에 따라, 5월 18일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단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문종은 유언으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어린 임금을 보필하게 하고 집현전 학사를 지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등에게 협찬(協贊)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단종의 숙부(叔父)였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한명회(韓明澮) 등과 결탁하고, 이듬해(1453)
10월 10일 황보인·김종서 등을 격살(擊殺)하고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도로 추방한 후, 다음날 스스로 영의정이 되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는,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정권을 잡게 된 수양대군은 그 달 18일 첫째 동생인 안평대군에게 사형을
내리고, 다음 해 윤6월 11일에는 넷째 동생 금성대군 등이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삭녕(朔寧:경기도 연천(京畿道漣川))으로 귀양보내고,
단종으로부터 대보(大寶)를 물려받아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에 따라 단종은 상왕 (上王)이라 불리우고 창덕궁(昌德宮)으로 이거(移居)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양대군의 왕의 찬탈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집현전 학사를 지낸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은 세조 2년(1456) 6월 1일에 고명(誥命)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오게 된 명(明)나라 사신 윤봉(尹鳳) 등을 위해 창덕궁에서 베풀어진 연회석에서 수양대군 부자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하려고 하였으나,
김질의 밀고로 실패하고 모두 극형(極刑)을 받게 되었다. 이에 세조는 동생 금성대군을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으로 귀양보내고 집현전을 혁파한
다음, 3년(1457) 6월 21일에는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여 강원도 영월(寧越)로 귀양보냈다가 그 달 24일 목매어 죽이게
하였다. 조선 왕조의 제6대 왕이던 단종은 12세에 즉위하여 3년 2개월간 왕위에 머물러 있다가 숙부인 수양 대군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2년
동안 상왕(上王)의 자리에 있다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4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17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본 실록에는 주로
이러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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