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수록된 많은 자료는 KBS TV, 역사 스페셜, '그때 태극기가 있었다.'에서 갈무리하였습니다.)
신라 시대의 태극 문양
고려 시대의 태극 문양
조선 시대의 태극 문양
태극 깃발도 옛날부터 있었다.
1875년-1883년 : 논의와
제정의 역사
국기 제정에 대한 최초의 관심 : 1875년, 일본은 우리나라의 개항을 요구하면서 운요오호를 몰고 왔다. 1876년(고종13년)1월 운요오호사건(雲揚號 事件)을 계기로 한 일
양국간에 강화도 조약 체결이 논의 동안 일본측은 "운요오호에는 엄연히 일본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砲擊)을 가하였는가?"라고 트집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 조정의 인사들은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지조차 몰라서 어리둥절하기만 했었다.
이것을 계기로 비로소 조정에서는 국기 제정의 필요성이 활발하게 거론되었다. 일본은 이미 명치유신 2년 뒤, 1870년에 흰색 바탕에 국왕을 상징 붉은 태양을 그린 일장기를 국기로 제정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직접적 계기 : 1882년 미국과의 수호조약
시, 미국의 대표 슈펠트는 우리나라가 독립 국가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독자적 국기를 가져야
한다며 국기 제정의 필요성 언급하였다. 이에 김홍집은 통역관 이응준에 급히 태극기를 제작할 것을 명하니 이에 이응준은 흰색 천 중앙에
태극문양(청홍색의 태극양의기)을 그린 국기를 제작하였다. 아래의 그림은 1882년 5월 조미조약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상상하며 그린 이응준의
태극양의기(추정)와 미 성조기의 모습이다. 한미조약 참관 차, 와 있던 청나라의 마건충과 김홍집과의 대화
그러나 마건충이 제안한 태극 팔괘도는 주돈이의 태극도설(1070년)를 응용한 것으로 우리 고유의 전통적 태극문양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진설명> 주렴계 저서의 태극도설(1070년)(좌)과 박영효(朴泳孝)가 1882년 태극기를 만들 때 마건충이 제안했던 태극 팔괘도에 근거하여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팔괘도'(우)는 건곤감리와 손태리진의 8괘를 모두 나타내고 있다. 1881년 충청도 관찰사 이종원이 제출한 태극 팔괘의 도식에 의해 비로소 국기를 정하였으나 실제로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한 것은
1882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인 박영효 일행이 일본으로 갔을 때 태극 도형과 4괘가 그려진 태극기를 사용한 것이 처음이다.
최초의 제작과
게양(태극기의 효시)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 겸
수신사(修信使)인 박영효(朴泳孝) 등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배인 <메이지 마루>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 갈 때, 당장 게양하여야 할 국기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출발 전 고종의 왕명으로 이미 조정에서 어느 정도 찬성을 본 국기 도안
내용을 다소 수정한 태극 사괘(太極四卦)의 도안이 그려진 기를 국기로 게양할 것에 의견을 모아 박영효가 타고 간 일본 배 <메이지
마루>호에서 이것을 만들었다. 이 때 이 배에는 개화당의 주역인 서광범, 김옥균 등도
타고 있었다. 이들 일행은 8월 14일 고오베에 도착, 숙소를 정하고 건물의 옥상에다가 태극 사괘를 게양했는데,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嚆矢)이다.
아래의 사진은 아마 박영효가 <메이지 마루>호 안에서 제작하여 일본에 게양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공식 태극기 모양이다. 이같은 사실은 1997년에 발견된 1882년 10월2일자 도쿄
일간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실린 태극기 제작배경기사로 알게 된 것이다. - 일명,'박영효의 태극기'라 부른다.
1883년-1900년 : 최초의 태극기 (태극 문양과 색깔 규정)
쥬이 태극기와 데니의 태극기 : 1883년 제정 당시의 태극기는 남아 있지 않지만 현존하는 최고의 태극기인 쥬이 태극기와 데니(1890년)의 태극기를 통하여 그 원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두 태극기의 비교 분석해보면, 쥬이 태극기 : 1883년 푸트 미국 공사의 조선 방문 수행원이던
쥬이가 1884년 입수하여 미국으로 가져간 태극기로 실물크기 중 가장
오래되었다. 현재 미국의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제작연도 : 1884년, 실물크기 : 53×36cm
데니의 태극기 : 광무황제(고종)가 조선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인 데니(O.M.Denny) 에게 하사한 태극기로 태극과 4괘가 재봉틀 박음질로 되어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이다.(1890년)
태극의 소용돌이가 지금의
태극기 보다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양 태극 방향이 서로 다르며 쥬이 태극기의 음은 흑색인 반면, 데니 태극기의 음은 청색이다. 괘의 색깔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쥬이 태극기의 4괘는 흑색인 반면, 데니 태극기의 4괘는 청색이다. <사진>우리나라 최고의 태극기 - 왼쪽,
쥬이의 태극기(1884년)와 오른쪽, 데니의태극기(1890)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신 소설가 게오르규는 《25시에서 영원(永遠)의 시간으로》에서 우리의 태극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가 태극기를 제정한 것은 1882년이다. 그 이후부터 서양인들은 우리의 태극기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그들의
나라에 소개하고 있다. 그 몇 가지를 살펴본다.
1883년 조선의 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태극기를 게양했을 때 미국인들은 태극
문양에 매우 깊은 호기심을 보였으며, 9월 27일 뉴욕 타임즈 신문에서는 우리 태극문형을 '상형문자와 같은 상징'으로 '행복'을 의미한다고
소개하였다.
1886년 미국의 로우엘 저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표지에 인쇄된 태극문양 1895년에 발행된 헤세 마르텍의 저서 [코리아]의 표지에서의 태극기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한국관 소개 책자에서의 태극기 : 태극기의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열십자(十)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 1910년 파리에서 통용 엽서 - 서신을 양반에게 전달하는 엽서 (신분 사회의 한 단편을 보여준다.)
리빅사 발행의 판촉용 카드에 새겨진 청홍 태극문양 (조선의 신식 군인과 함께) 청홍태극문양은 1900년의 쥬이 태극기의 태극양의를 많이 닮았다. 박영효가
처음 태극기를 제정하여 일본에 게양했을 당시는 4괘의 색깔에 대해 분명히 밝히지 않았으며, 1883년 태극기 제정, 공포시에도 '널리 시행토록 하라'는
말만 있었을 뿐 하늘, 땅, 물, 불을 상징하는 4괘에 대한 색깔과
구체적 작도 규정은 없었다. 이후, 태극과 4괘의 색깔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힌 책은 유길준의 [상회규칙]인데, 태극음양을 청색(靑繪), 홍색(紅繪), 4방의 괘는 청색으로 한다고 기록하였다. 1874년 청나라가 외국과 맺은 조약과 외국 사신의 서신 등을 기록해 놓은 청나라의 『통상장정(通尙章程)』에 나오는 태극기는
'대청속국, 고려국기'라 소개하면서 청국을 상징하는 노란색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표시하고, 괘의 색깔은 청색으로 표시하였는데, 청색은
대한 제국의 색깔을 의미한다. (고려대대학원
도서관에 소장돼있는 1898년의 [통상약장유찬(通商約章類纂)]이란 문헌에도 이와 같은 모양
1900년 파리의 만국 박람회의 한국관 소개 책자에 실린 태극기는
건곤리감 4괘가 태극을 중심으로 대각선 모서리 방향이 아니라 열십자(十)
방향으로 배치되었으며, 청홍양의의 태극은 상하가 아니라 좌우로 배치되어있는 매우 낯선 모습이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해, 11월 18일에 대조선국(大朝鮮國) 정부는 태극기를 홍보하기 위해 최초의 우표를 발행하였는데, 여기서부터 태극기 최초의 수난이
시작된다.
태극문양이 새겨진 우표를 인쇄하려 했지만 우리나라에는 인쇄시설이 없어 일본에 인쇄를 의뢰하였지만 애당초 우리의 요구와 관계없이
중국의 전통 태극 문양이 인쇄되어왔다. 이는 우리나라의 주권을 조금씩 약화시키려는 저의가 숨어 있는 최초의 태극 수난사였다.
이듬해 1885년 미국에서 인쇄한 우리나라 우표에는 우리 고유의 태극기 문양이 인쇄되어 있다. 1906년 발행된 엽서에는 일장기와 태극기를 나란히 놓는가 하며, 또한 일본왕자와 대한제국의 황제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상대적으로 우리의
황제를 왜소하게 인쇄함으로써 우리의 주권이 서서히 꺼져가는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1910년의 일제 강점기 바로 직전의
엽서에는 우리의 태극기가 일본군모 밑에 깔려있고, 열차시간표가 인쇄되어 있어 마치 주권이
다해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태극기는 주권선언을 위해 제작되었고, 주권상실과 함께 수난을 받았다. 태극기의 수난은 민족의 수난이오,
태극기의 영광은 민족의 영광이었다.태극기는 민족이요 주권이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은 제 나라의 국기도 제대로 그릴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열은 몰래 태극기를 그렸으며, 몰래 그려진 태극기를 중심으로 광복의
열정을 불태웠다. 민족은 태극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다.
독립문의 태극기 - 자주 독립 국가임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파리의 개선문을 본 딴 독립문에는 태극기가 좌우 양편에 돌에 새겨져 있다. 이 태극기의 모양은 독립 신문의 태극기와 같다. 지금의 태극기와 비교해 보면 상하가 뒤집어 져 있는 모양이며, 음양 태극양의의 소용돌이가 매우 역동적인 것을 알 수 있다. 항일 독립 운동 태극기 : 1900년경 만들어진 국기로서 일제시대 일본에 빼앗겼다가 1962년 한일문화 협정체결후 1967년 4월 국내에 반입된 태극기 1900년대의 태극기 : 고종황제 시절 광무9년 정삼품
통정대부 벼슬을 지냈던 종로구 홍지동에 사는 박영민씨의 조부 박기준씨께서 사용하던 국기 제작연대 : 1900-1905년, 실물크기 : 정사각형
80cm 1907년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
전남 구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 고광순이 일본군과 싸울 때 사용한 태극기이다(1906). 그는
굳은 신념으로 "멀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 는 글자를 이 태극기에 써 넣었다. '태극기' 최초의 호칭 : 1919년 3월 1일 정오에 맞춰 서울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국적으로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이 날 참여한 모든 국민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손에 '기'를 들고 나오기로
하고, '기'를 제작하였는데, 그때만해도 '조선국기'로 부르던 국기 이름을 일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하면서부터 국기의 이름이 '태극기'로 정착되었다.
1919년 삼일 운동 때 경북 영덕에서 사용된 김세영의
태극기 1919년 평양 숭실 학교 태극기 :
삼일운동 이틀 전에 평양의 숭실학교 조만식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반드시 너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 한다." 이 말씀에 따라 학생 김건이 동료들과 함께 제작하여 1919년 3월 1일 평양 숭실학교 교정에 이
태극기를 높이 내걸었다. 이 태극기는 이후 숭실학교의 마포삼열(모페트)학장 선생님이 몰래 1년 동안 보관하여 오다가 이후, 미국의 아들에게
보내어져 보관되다가 1974년 숭실대학교로 기증되었다.
1919 태극기를 인쇄하기 위한
목판각과 -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하여 만든
목각판. 이렇게 인쇄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구 선생님의 성함이 새겨진 태극기
: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1년 3월 16일 안창호의 부인인 이혜련 여사 에게 보낸 친필서명 태극기. "망국의 서러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인력.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 말세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광복을 완성하자" 는 말을 어디에서나 한국인을 만나는 데로 전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광복군 이름이 새겨진
태극기 : 1945년 중국 방부에 있던 광복군이 광복에 대한 소감과 이름을 기록한
태극기. - 4괘의 배치는 이괘와 감괘의 위치가 지금과 바뀌어 있고, 태극 음양의 머리꼬리의 소용돌이도 바뀌어 있다.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일동 사진의
태극기 :1940년 12월 26일 서안(西安)에서 찍은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일동
사진. 대일 공작 추진을 위해 한 덜 전인 11월 29일 [광복군 총사령부]는 전방 전선인 서안으로 옮겨 왔다. 총사령관 대리는 황학수
장군이었다. 이청천 총사령과 이범석 참모장은 중경에 남아 중국 군사위와 군사협의를 진행했다.
1943년 삼일절 경축 전시공채에서의 태극기
: 1943년
호눌룰루 [한·미 전시공채위원회]는 삼일절 경축 전시공채 발매를 개시하고 '동경폭격을 위한 비행기 구입을 도웁시다."는 선전지를 살포했다.
(이때의 태극기는 건곤리감 4괘배치는 현재와 같으나, 음양태극은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상해 임시 정부 요인상과 독립 선언서에 새겨진 태극기
김구 선생님, 안중근의사와 태극기
이봉창 열사, 윤봉길 의사와 태극기
1945년 일제는
망하고 우리는 드디어 해방을 맞이했다. "만세,
만세" 김구선생님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돌아 오시고, 국민들은 밥 공기를 엎어서 그토록 그립든 태극기를 그렸다. 8·15 광복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골도 조국에 돌아와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46년 1월 11일 미 군정청은 태극기 정식
게양하고.......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미소신탁통치의 역사적 틈새를 비집고 조국은 점점 남북으로 금이 가고 있었다.그러나 태극기는 남북한
관계없이 게양되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태극기 앞에서
연설을 하였으나,
48년 7월 24일 결국 북한은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게양하였다. 국기가 둘로 갈라지면서 조국 또한 둘로 갈라졌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정부에서는 이때까지 조금씩
다른 도안으로 사용되어 돈 태극기 문양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당시 문교부에 사학자. 미술가. 언론인 등 사계 권위자 42명으로 "대한민국 국기
시정위원회(大韓民國國旗是正委員會)"를 구성. 설치한 후 전문적인 검토를 거침과 아울러 국민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수차의 회의를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은 태극기를 국기로 채택하기로 하고,
1949년 10월 15일 이를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그 후 1984년 2월 21일 국기의 제작· 게양방법 등 기본적인 사항을 정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 11361호)를 제정·
공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의 상징이며 민족의 얼이 깃들어 있는 태극기를 자랑스럽게 게양하고 예절을
지키는 일은 나라 사랑의 작은 실천이며 조국에 대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손쉽게 표현하는 길이라 하겠다. <국기 관련 규정 연혁>
6·25 전쟁 속의
태극기 :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의 최대 비극인 동족 상잔의 전쟁을 도발하였다. 피난 속에서도 미래 조국의 주인공들에 대한 교육은 계속되었는데....
천막을 치고 태극기를 걸고 수업을 하는 당시 소래초등학교의 모습.
학도병이 사용한 태극기(1950년)
: 한국동란(6.25) 당시 제3차 학도병 지원시(1950. 9) 학도병들이 조국을
구하기 위한 전쟁에 나서기 직전 구국의 결의를 기록한 태극기.
서울수복 태극기(1950년) : 그 해 9월 27일 다시 서울을 되찾게 되고 중앙청 앞에는
태극기가 게양된다. 해병 2대대 6중대 1소대 소위 박정모(왼쪽)와 수병 최국방(오른쪽) 조국 근대화의 태극기 : 그리고 동족 상잔의 민족 좌절은 한 때의 역경, 다시 민족은
일어 선다. 1970년의 경제 개발은 우리 겨레의 삶을 정적인 삶에서부터 동적인 삶으로,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1972년
시흥군(지금의 시흥시) 월곳·장곡동에 대형 꽃다발과 태극기를 앞에 꽂고 안양에서 버스가 처음 들어 오던 날. 흙 먼지 속에서도 아랑곳 않고
버스와 함께 달리는 아이들 모습이 힘찬 조국의 미래를 기약하는 듯 하다. "와! 우리 마을에도 버스가 다닌다. 버스가..."
하면서
민족은 태극기를 중심으로 세계의 기적을 창출하였다. 한강의 기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한민족의 역량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였다.
지금은 잠시 역경에 처해 있지만, 21세기는 분명코 한민족, 태극민족의 세기가 되리라. - 1988년 서울 올림픽 10주년 기념 엠블림에 사용된 태극 문양과 2002년 월드컵 FIFA 공식 엠블림
"태극기는 겨레의 힘과
단결, 자존심과 긍지, 좌절과 희망으로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그는 꺼지지 않은 순환과 영원이며, 민족의 구심점이었다. 이젠
우리 모두 통일 한국의 위업과 선진 문화 강대국 건설을 위해 태극깃발
아래에서 하나가 되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