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백 63권의 방대한 실록이 단시일에 완성된 것은 정인지·성삼문·최항·박팽년·신숙주·양성지 등 당시 뛰어난
일류 명사 60여 명이 이에 종사하여 분담 편찬한 때문이었다. 《세종실록》은 그 분량이 방대하므로, 처음에는 한 벌만 등초(謄抄)하여 춘추관에
두었다. 세조 12년(1466)에 양성지의 건의로, 당시 이미 편찬된 《문종실록》과 아울러 활자로 인쇄하기 시작하여, 성종 3년(1472)에
완료되었다. 실록이 활자로 인쇄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당시 인출한 것은 3부로서 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의 세 사고(史庫)에
각 1부씩 봉안(奉安)하고, 초본은 춘추관에 보관케 하였다. 그런데 임진 왜란으로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다른 사고에 수장하였던 실록이 모두
병화에 없어지고, 오직 전주 사고본(全州史庫本)만이 간신히 남게 되었다. 이를 선조 말년부터 다시 인쇄하여, 재난(災難)을 피할 수 있는
태백산·오대산·묘향산, 또는 적상산(赤裳山)·마니산 등 에 설치된 여러 사고에 한 벌씩 봉안케 하였다.
2.《세종실록》의 내용
《세종실록》은 모두 1백 63권으로
내용이 매우 방대하다. 세종은 32년에 걸친 재위 기간을 통하여, 정치·외교·군사·경제·제도·예악(禮樂)의 정비와 각종 문물의 창제(創製) 등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따라서 《세종실록》에는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가 수록되었다. 《세종실록》은 다른 왕들의 실록에서 볼
수 없는 특색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편년체의 기사 외에 많은 ‘지(志)’가 첨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권1부터 권127까지는 다른 실록과 같이
매일의 기사를 일기체로 엮었는데, 여기에도 풍부한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세종실록》의 ‘지’는 권128로부터 권135까지가 《오례(五禮)》며,
권136으로부터 권147까지가 《악보(樂譜)》 <악보(樂譜)·악장(樂章)>, 권148로부터 권155까지가 《지리지(地理志)》,
그리고, 권156으로부터 권163까지가 《칠정산(七政算)―내·외편―》 그리고 말미에 부록으로 편사관(編史官)의 명단이 실려 있다. 《오례》는
길(吉)·흉(凶)·군(軍)·빈(賓)·가례(嘉禮)에 관한 예식 의주(禮式儀注)로 성종 때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모본인 바,
정척(鄭陟)·변효문(卞孝文) 등이 주가 되어 찬술한 것이다. 《악보》는 주로 세종 시대에 완성된 아악을 집성한 것으로, 유사눌(柳思訥)·정인지
(鄭麟趾)·박연(朴堧)·정양(鄭穰) 등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지리지》는 세종이 윤회(尹淮)·신장(申檣)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종합적 지리지인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와 그 궤를 같이 한 것으로서, 내용을 보다 상밀(詳密)히 한 것이다. 그리고 《칠정산》
내외편은 천문에 관한 것으로서, 우리 나라의 천문(天文)·역법(曆法)을 재정리하여 집대성한 것이다. 《세종실록》의 편년체 기록 중에서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세종은 즉위 후 4년(1422)까지는 상왕으로 있었던 태종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태종대에 이룩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소신 있는 정치를 추진하였다. 세종대에는 개국공신 세력이 사라지고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학자적 관료들과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다. 세종 18년에는 육조직계제를 다시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바꾸면서 정치체제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익년에는
세자(世子 : 뒤의 문종)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재결(裁決)토록 함으로써 정치는 더욱 안정되고 유연해졌다. 세종 전반기에는 집현전을 통해 많은
학자가 양성되었고, 그 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리와 수많은 편찬사업을 펼쳤다. 세종 18년에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의
이행도 이상적인 유교정치의 표현이었다. 세종 후반기에는 왕의 건강이 극히 악화되었으나, 의정부서사제 아래에서 군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성세를 구가하였다. 황희(黃喜)를 비롯 최윤덕(崔潤德)·신개(申勘)·하연(河演) 등 의정부 대신들이 비교적 안정되게 국왕을 보좌하였다. 이러한
안정된 정치체제와 분위기가 세종시대를 이룩하는 토대가 되었다. 또한 집현전을 통해 양성된 인재들은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세종은 유교적인 의례· 제도를 정비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연구를 시켰다. 여기에는 예조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의 관료들도 참여하였다. 이들 기관에서 오랜 연구와 검토를 거쳐 국가의 의례인 오례(五禮 : 吉禮·嘉禮·賓禮·軍禮·凶禮)를
비롯한 제반 제도가 정리되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틀은 세종대에 짜여져서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었고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세종대의 문화 사업은 방대한 편찬사업을 수반하여 15세기 민족문화의 정수를 이루게 하였다. 세종대의 편찬물의 중요한 것을 연대순으로 열거하면,
《孝行錄》(세종 10), 《農事直說》(세종 11), 《三綱行實》(세종 14), 《八道地理志》(세종 14),
《無寃錄註解》《鄕藥集成方》(세종15), 《資治通鑑訓義》 (세종 16), 《韓柳文註釋》(세종 20), 《國語補正》(세종 22), 《明皇誡鑑》(세종
23), 《絲綸全集》(세종 24), 《杜詩諸家註釋》(세종 25), 《韻會諺譯》, 《五禮儀註》, 《七政算內外篇》(세종 26), 《治平要覽》(세종
27), 《龍飛御天歌》,《龍飛御天歌註解》《諸家曆象集》《醫方類聚》《訓民正音》(세종 28), 《東國正韻》(세종 29), 《四書諺解》《高麗史》(세종
30) 등이다. 이들 중에서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 대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직접 창제를 지휘하였고,
집현전의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과학과 기술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다. 세종 14년부터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과 석축 간의대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이는 높이 약 6.3m, 세로 약 9.1m, 가로 약 6.6m의 규모로 세종 16년에 준공되었다. 그리고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와 방위(方位) 지정표(指定表)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 등이 그것이다. 세종 15년에는
정인지·정초 등에게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게 하여 24년에 완성하였고, 《칠정산외편》도 이순지·김담에 의해 편찬되었다. 세종 27년에는
천문·역법의 총정리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제가역상집》이 이순지에 의해 편찬되었다. 측우기는 세종 23년 8월에 발명되었고, 이듬해 5월에
개량·완성되었다. 세종 13년과 28년에는 도량형제도를 확정하여 후에 《경국대전》에 수록하였다. 인쇄술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1403년에
주조된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로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세종 16년에는 더욱 정교한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다. 세종 18년에는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가 주조됨에 따라 조선시대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이 완성되었다. 화약과
화기(火器)의 제조기술도 크게 발전하였다. 세종대는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어 완구(碗口),
소화포(小火砲)·철제탄환·화포전(火砲箭)· 화초(火瑟) 등이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아직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 26년에
화포주조소(火砲鑄造所)를 짓게 해 뛰어난 성능을 가진 화포를 만들어냈고, 이에 따라 이듬해는 화포를 전면 개주(改鑄)하였다. 세종 30년에
편찬·간행된 《총통등록 銃筒謄錄》은 그 화포들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 그리고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한 책이었다. 세종대에는 많은 농서가
편찬되었는데,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 農桑輯要》·《사시찬요 四時纂要》 등과 우리 나라 농서인 《본국경험방 本國經驗方》,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
農事直說》등의 농업서적을 통해 농업기술을 계몽하고 권장하였다. 의약서로는 《향약채집월령 鄕藥採集月令》·《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 《의방유취
醫方類聚》 등이 편찬되었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의 편찬은 15세기까지의 우리 나라와 중국 의약학의 발전을 결산한 것으로 우리 과학사에서
빛나는 업적이 된다. 세종은 음악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중국의 각종 고전을 참고해 아악기를 만들고, 아악보를 새로
만들게 하였다. 조회아악(朝會雅樂)· 회례아악(會禮雅樂) 및 제례아악(祭禮雅樂)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아악은 국가·궁중의례에 연주되었고,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다. 그리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 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해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 흠휼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관해서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다. 그리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조선의 전세제도(田稅制度) 확립하였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을 폐지하고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해
연구와 시험을 거듭해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국토의 개척과 확장도 세종 대의 큰 업적이다.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서 육진을
개척하게 하였고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해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영토로 편입하였다. 세종 1년에는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반면 세종 8년에는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세종 25년에는 계해약조를 맺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초기에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말년에는 매우 심취하게 되었다. 이는 세종 26년에 광평대군(廣平大君), 그
이듬해에 평원대군(平原大君), 세종 28년에 왕후를 연이어 잃게 됨에 따라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왕 자신의 건강도 악화된 것이 불교에
심취하는 데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세종은 말년에 유학자 관료들과 불교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과 논란을 벌였다. 이는 유교가
정치이념·학문·철학·윤리적인 면의 수요를 채워줄 뿐, 종교적인 욕구가 충족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세종 대에는 금속화폐인 조선통보의
주조,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한 불서언해(佛書諺解) 사업을 추진하였다.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봉사하게 하였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묘를
사전(祀典)에 올려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한, 종래 춘추관·충주의 두 사고(史庫)였던 것을 성주·전주 두 사고를 추가로 설치하게 하였다.
세종의 시호는 장헌(莊憲), 존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능호는 영릉(英陵)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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