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사고라 함은 충주 사고(忠州史庫)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춘추관의 사고를 말하는 것이다. 《정종실록》은
세종 8년 8월에 변계량·윤회·신장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하였으나, 세종 20년(1438) 9월 25일(병오) 《태조실록》 중 의 제1차 왕자의
난인 소위 방석의 난과 《정종실록》 중의 제2차 왕자의 난인 박포(朴苞)의 난에 대하여 소문과 다르게 기록하였다 는 말이 있어 《태조실록》과
《정종실록》을 개편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리하여 세종 24년(1442) 9월 4일(신유)에 춘추관 감관사 신개와 지관사 권제, 동지관사
안지(安止) 등이 태조·정종·태종 실록을 개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실록은 그 임금이 즉위한 날로부터 퇴위한 날까지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원칙인데, 《정종실록》은 원년 정월 1일부터 2년 12월 말 일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여 즉위년 기사는 없고, 2년 기사에는 태종 즉위년 기사가
포함되어 있다. 즉위년 기사는 《태조실록》을 편 찬할 때 이미 편찬하여 《태조실록》에 수록하였고, 2년의 기사는 태종 즉위년에 포함시켜 편찬한
때문이었다. 《정종실록》과 《태종실록》 을 함께 편찬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정종실록》은 본래의 서명이 《공정왕실록(恭靖王實錄)》이었다.
정종은 승하한 뒤 묘호(廟號)를 올리지 아니하였고 명(明)나라 황 제로부터 받은 시호(諡號) 공정(恭靖)을 칭호로 하였기 때문에, 실록도
《공정왕실록》이라 한 것이다. 숙종 7년(1681)에 그에게 정종 (定宗)이란 묘호를 올리면서 실록도 《정종실록》이라 하고 표제(表題)만
바꾸었다. 《정종실록》 맨 끝에 부기(附記)되어 있는 편찬자 명단 가운데에는 다만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윤회(尹淮)·신장(申檣) 두 사람
의 이름이 보일 뿐이다. 변계량은 세종 12년 4월 22일(계사) 《태종실록》을 편찬하던 도중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이 빠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태종실록》 이후의 역대 실록은 모두 그 후미에 편찬에 관계한 춘추관의 영관사(領館事)·감관사(監館事)·지관사·
동지관사·수찬관(修撰官) 등 당상(堂上)과 편수관(編修官)·기주관(記注官)·기사관(記事官) 등 낭청(郞廳: 정3품 통훈대부 이하의 당 하관)의
이름을 다 기록하였으나, 《태조실록》과 《정종실록》에는 감수자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종실록》과 《태종실록 》은 동시에
편찬되었으므로, 《태종실록》의 후미에 실린 기주관 안지(安止)·윤형(尹炯)·조서강(趙瑞康)·이옹(李壅)과 기사관 안수기
(安修己)·이선제(李先齊)·박시생(朴始生)·오신지(吳愼之)·권자홍(權自弘)·장아(張莪)·어효첨(魚孝瞻)·김문기(金文起)·강맹경(姜
孟卿)·이종검(李宗儉) 등 모두 14명의 낭청이 《정종실록》의 편찬에도 관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2.《정종실록》의 내용
정종의 초명은 방과(芳果), 자는
광원(光遠)이었으나, 즉위한 후 이름을 경(黔)으로 고쳤다. 태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 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태조 7년
8월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세자 이방석(李芳碩)이 죽게 되자 대신 세자로 책봉되고, 동년 9월 5일 태조의 선양(禪讓)을 받아 즉위하였다.
정종은 일찍부터 관직에 나아가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였고, 1390년 1월에는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공으로 추충여절익위공신
(推忠礪節翊衛功臣)에 책록되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고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로 병권을 잡기도 하였다. 1398년 8월 정안군 방원(靖安君芳遠)이 주도한 제1차 왕자 의 난이 성공한
후 태종의 추천으로 세자가 되었다가, 9월에 태조의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다. 그러나 정종은 태종의 공작에 의해 즉위하였으므로 독자적인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태종의 주도에 의지하였다. 정종은 원년인 1399년 3월에 조정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같은 해 8월에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여 권세가들의 세력 을 약화시켰다. 1399년 3월에는 집현전을 설치하였고, 5월에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을 간행하였다. 11월에는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였다. 1400년 2월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안군[태종]이 주도권을 잡자 그를 세제로 책봉하였다. 그 해 4월에는 분란이 많았던 사 병(私兵)을 혁파하고 국가의 병권을 의흥삼군부에
집중시켰다. 이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 三軍府)로 고쳐, 군권을 가진 자들이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 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모두 태종의 영향 아래 이뤄진 것이다. 6월에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하였다. 태종의 정권 주도에 압력을 받던 정종은 2년 11월 11일에 왕위를 그에게 양위하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이후 그는 20년 동안 한가 롭게 지내다가, 세종 원년(1419) 9월에 63세로 승하하였다. 그의 시호는 공정(恭靖)이었고, 존호는
처음 온인순효(溫仁恭勇順孝)였 고, 숙종 때 정종(定宗)이라는 묘호(廟號)를 받았다.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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