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춘추관의 전후 관원은 다음과 같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심연원(沈連源) 지춘추관사: 윤개(尹漑), 상진(尙震), 신광한(申光漢),
김광준(金光準), 임권(任權), 정사룡(鄭士龍), 윤사익(尹思翼), 김인손(金麟孫), 최연(崔演), 안현(安玹), 송겸, 홍섬(洪暹) 등 12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박수량(朴守良), 송세형(宋世珩), 조광원(曺光遠), 김명윤(金明胤), 남세건(南世健), 강현(姜顯),
김만균(金萬鈞), 윤원형(尹元衡), 신영(申瑛), 김광철(金光轍), 나세찬(羅世纘), 정만종(鄭萬鍾), 유진동(柳辰仝), 박우(朴佑),
권찬(權纘), 송기수(宋麒壽), 조사수(趙士秀), 정유선(鄭惟善), 심광언(沈光彦), 채세영(蔡世英), 이찬(李澯), 임호신(任虎臣),
주세붕(周世鵬), 이명(李蓂), 한두 등 25인 편수관(編修官): 심통원(沈通源), 정언각(鄭彦慤), 원계검(元繼儉), 이세장(李世璋),
경혼(慶渾), 정유길(鄭惟吉), 홍담(洪曇), 박충원(朴忠元), 안위(安瑋), 노한문(盧漢文), 이원손(李元孫), 민기(閔箕),
김충렬(金忠烈), 장옥(張玉), 김반천(金半千), 윤현(尹鉉), 이영현(李英賢), 성세장(成世章), 박공량(朴公亮), 김개(金鎧),
김확(金擴), 남응룡(南應龍), 조광옥(趙光玉), 유강(兪絳), 김천우(金天宇), 백인영(白仁英), 윤우(尹雨), 민전, 이택(李澤),
남응운(南應雲), 이무강(李無彊), 송찬(宋贊), 윤옥(尹玉), 윤부(尹釜), 정유(鄭裕), 우상, 안방경(安方慶), 김주(金澍),
이사필(李士弼), 강위(姜偉), 홍춘년(洪春年), 남경춘(南慶春), 노경린(盧慶麟), 이건(李楗), 이추(李樞) 등 45인 기주관(記注官):
윤잠(尹潛), 임내신, 이영(李瑛), 고맹영(高孟英), 정준(鄭浚), 정종영(鄭宗榮), 박영준(朴永俊), 박대립(朴大立), 권벽(權擘),
이감(李戡), 이수철(李壽鐵), 함헌(咸軒), 이탁(李鐸), 강억(姜億), 원호섭(元虎燮), 윤춘년(尹春年), 권용(權容) 등 17인
기사관(記事官): 정순우(鄭純祐), 남궁침, 이억상(李億祥), 신여종(申汝悰), 이지신(李之信), 한지원(韓智源), 심수경(沈守慶),
허엽(許曄), 황준량(黃俊良), 강욱(姜昱), 임여(任呂), 김적(金適), 이우민(李友閔), 이언충(李彦忠), 이중경(李重慶),
이광진(李光軫), 고경허(高景虛), 기대항(奇大恒), 김규, 황호(黃祜), 최언수(崔彦粹), 민지, 이순효(李純孝), 김익(金瀷),
이문형(李文馨), 정사량(鄭思亮), 김질충(金質忠), 목첨(睦詹), 강사안(姜士安), 이지행(李之行), 강섬(姜暹), 유순선(柳順善),
이명(李銘), 김귀영(金貴榮), 유신(柳信), 이관(李瓘), 이희백(李希伯) 등 37인
2.《중종실록》의 내용
중종(中宗: 1488~1544)의 이름을
역(懌), 자는 낙천(樂天)이며, 성종(成宗)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이다. 1494년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고, 1506년 9월 2일 반정(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뒤,
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성희안 (成希顔) 등에 의해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弊政)을 이어 즉위하여 전조에 행하여지던
각종 폐습을 혁파하고, 조종조(祖宗朝)의 옛 법도를 복구하기에 노력하였다. 중종은 왕의 전제적 권한의 행사를 피하고 유능한 유학자들을 등용하여
우대하였다. 이에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의 소장 학자들이 크게 등용되었다. 중종도 숭유 억불(崇儒抑佛) 정치를 답습하였고, 소장 유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숭상 장려하고, 유교적 이상정치(理想政治)의 실현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유교적인 미풍 양속에
어긋나는 미신을 타파하고 일반 민중의 유교 윤리적인 교양을 갖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권선징악과 상부 상조를 그 정신으로 하는 향약(鄕約)을
8도에 시행하려던 시도라든가, 찬집청(撰集廳)을 두어 권선 징악의 서적을 찬수(撰修), 언역 (諺譯)하게 한 일은 이를 뒷받침하는 조처였다. 또
서원이 본격적으로 설치된 것도 중종조에 시작된 일이었다. 반면 유교 이외의 종교와 풍습에 대해서는 탄압과 금지를 강화하였다. 국초부터 시행되어
오던 승과(僧科)의 폐지, 각도 혁폐사사(革廢寺社)의 전지에 대한 향교 귀속, 사찰의 중창 엄금,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도승(度僧) 조항
삭제, 사찰의 노비와 전지의 속공(屬公), 승려 금단 절목(僧侶禁斷節目) 제정,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 수록된 이외의 사찰 철훼 및
소격서(昭格署)의 혁파 등이 이러한 조처였다. 중종 대의 정치는 소강 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크고 작은 정변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중종이
즉위한 이듬해의 박경(朴耕)의 옥과 이과(李顆)의 옥을 비롯하여, 왕 14년(1519)에는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했고,
16년(1521)에는 송사련(宋祀連)의 고변, 22년(1527)에는 동궁 작서의 변[東宮灼鼠之變]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기묘 사화는
연산조의 무오·갑자 양대 사화에 이어 일어난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이었다. 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조광조 일파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정책을 강행하여 노장 훈구파(勳舊派)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조광조 등은 종래의 과거제도를 바꾸어 현량과(賢良科)라는 새로운
인재 등용 제도를 건의 실시하고, 이를 통하여 그 일파가 대거 등용되었다. 이밖에도 반정 때의 위훈(僞勳)을 삭제할 것을 집요하게 촉구하였으므로
훈구파의 미움과 반발을 빚게 되었다. 이들 훈구파의 반발은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여,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모략으로 왕을
움직여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를 일망 타진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사림파의 혁신적 정치는 중단되고, 사림파는 크게 그 세력이 꺾였다. 동궁
작서의 변은, 중종 22년에 세자로 있던 인종(仁宗)의 생일날 불에 탄 쥐가 동궁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이는 태어나자마자 모비를 여읜 세자를
저주한 것으로서 그 혐의는 세자의 서형(庶兄)인 복성군(福城君)과 그 어머니 경빈 박씨(敬嬪朴氏)에게로 돌아가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그
뒤에는 또 세자와 배 다른 아우인 명종(明宗)을 둘러싸고 그 외척들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대윤(大尹)·소윤(小尹)의 정쟁이다. 이
대·소윤의 대립은 후일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빚게 되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중국의 명조(明朝)와는 여전히 사대(事大)의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북쪽의 야인(野人)과 남쪽의 왜구(倭寇)는 항상 기회 있을 때마다 충돌하게 되었다. 중종 7년(1512)에는 야인이 갑산(甲山)·창성(昌城)
등지에 침입하였고, 18년(1523)에는 여연(閭延)·무창(茂昌)에 들어와 사는 야인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또 25년(1530)에는 야인이
산양회보(山羊會堡)에서 변란을 일으켰으나, 곧 물리쳐 평정하였다. 남쪽의 왜에 대해서는 세종 때에 제포(薺浦)·부산포(富山浦)·염포(鹽浦)의
3포(浦)에 한하여 거주를 허용하여 왔는데, 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소동을 그치지 않았다. 중종 5년(1510)에 이들 3포에 사는 왜인들이
대마도(對馬島)의 도왜(島倭)와 연결하여 변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른바 3포왜란으로, 관군의 출동으로 즉시 진압되었으나, 동 17년에는
추자도(楸子島) 등지에, 39년(1544)에는 사량진(蛇梁津)에서 변란을 야기하는 등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었다. 남과 북의 이와 같은 왜구에
대비하여, 조정에서는 축성사(築城司)를 설치하였고, 뒤에 이를 비변사(備邊司)라고 개칭하였다. 처음에 하나의 임시 기구였던 이 비변사가 의정부의
기능을 능가하는 상설 기구로 변모하여 조선 왕조 말년까지 존속되었다. 이와 같은 내외 정세의 불안정 속에서도 중종 대에는 많은 문화적 업적이
있었다. 중종 4년(1509)에는 성종대에 이미 완성 반포되었던 《경국대전》과 새로 편성한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출판되었고,
37년(1542)에는 《속록》 이후의 수교(受敎)와 승전(承傳)을 정리하고, 이듬해에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을 완성하였다.
6년(1511)에는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를, 9년(1514)과 13년(1518)에는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속동문선(續東文選)》을,
12년(1517)과 22년(1527)에는 《사성통해(四聲通解)》·《훈몽자회(訓蒙字會)》를, 25년(1530)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을 간행하였다. 이러한 편찬 사업과 아울러 11년(1516)에는 주자 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동활자(銅活字: 丙子字)를 제조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언해하였다. 또 33년(1538)에는 성주 사고(星州史庫)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35년(1540)에 사고를 복구하고, 역대 실록을 등사(謄寫)하여 이를 봉안하였다. 중종은 1544년 11월 14일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날 승하하였다. 시호는 공희(恭僖), 존호는 휘문소무흠인성효(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묘호는 중종(中宗)이며, 능호는 정릉(靖陵)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