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23일 화요일) 지리산 두레마을의 양지바른 산기슭에 어머니를 안장하였다. 어머니께서 손수 고르신 묘터였다. 60년 전인 1947년
10월에 작고하신 아버지 묘지를 경북 청송의 고향 땅에서 이장해와서 어머니와 합장하여 모셨다. 묘를 꾸밀 때에 평장(平葬)으로 하였다. 그
자리에 감나무, 살구나무, 매실나무, 복숭아나무를 심어 과일동산으로 꾸미려는 마음에서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작고하실
때에 마지막 유언을 다음 같이 남기셨다. “자녀들의 교육을 부탁합니다. 특히 셋째 홍이 교육에 신경 써주세요.” 나를 일컬어 ‘셋째
홍’이라 이르신 것이다.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가끔 이르시기를 “다같은 자식인데 왜 하필이면 셋째인 너에게 신경을 쓰라”하였는지 모를 일이다고
하시곤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때에 중학교로 진학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버지께서 남긴 유산이라곤
재봉틀 한 대 뿐이었다. 그것으로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셔서 우리들 4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마치게 하였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어머니가 겪은
고생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집안 어른들이 대장간에 심부름꾼으로 내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나를 앞에 앉혀두고 우시면서 나에 대한 아버지의 유언을 일러주시는 것이었다.
“너의 아버지가 숨을 거두면서 특별히 너의
교육에 마음 써 달라 하였거늘 어찌 너를 대장간 심부름꾼으로 보낼 수 있겠느냐. 내가 어쩌든지 너만은 공부를 시킬테니 너도 힘들더라도 잘 이겨
내야 하느니라.” 하시고는 고향의 안덕 중학교에 입학금을 외상으로 하고 입학시켰다. 3월에 그렇게 입학한 내가 입학금을 9월에야 낼 수 있었으니
그간에 입학금 가져오라고 학교에서 시달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께 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하고는 참고 견뎠다.
그때 어머니의 눈물어린 당부가 없었더라면 나의 삶은 전연 달라졌을 것이다. 어머니들의 지성(至誠)이 자식의 장래를 결정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