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 즈음인 것 같다. 마을에 잔치가 있었다. 시골 마을에서의 잔치라면 온 마을 잔치가 된다. 온 마을 사람들이 잔치 집에
모여들어 일을 거들고 음식도 함께 먹는다. 나는 학교를 파하고는 집에 가방만 두고는 잔치 집으로 갔다. 풍성한 음식상을 기대하며 마당으로
들어서는 나를 주방에서 보신 어머니는 나를 불러 엄명을 내리는 것이었다. “홍아 넌 여기서 음식을 먹지 말고 집으로 가거라.” 나는
이해가 되지를 않아 의아한 얼굴로 어머니 얼굴을 올라다보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다음같이 말하셨다. “배고프다고 어린 나이에 얻어먹고
살면 안돼. 어려서의 버릇이 어른 때까지 가는 거야. 넌 이집에서 먹을 생각일랑 말고 집으로 가서 내가 아침에 나올 때 차려놓은 밥이 있으니
그걸 먹어라. 여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얼른 가거라.”
그때 내가 얼마나 섭섭하였던지 60이 넘어선 이 나이에도 그때 기억의 생생함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이다. 눈물을 훔치며 돌아선 나는 집으로 가서 식은 보리밥을 한술 뜨고는 지게를 지고 땔나무 장만하러 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내 나이 30중반에 이르러 청계천 빈민촌에서 빈민선교를 하던 때였다. 하루는 주한미군 부대에서 빈민촌 마을
어린이들을 위해 짚차 트레일러에 고기 통조림, 비스켓, 초코렛 등을 잔뜩 싣고 왔다. 트레일러에 실린 풍성한 먹을거리를 보게 된 마을 어린이들이
기대에 넘치는 얼굴을 한 채로 짚차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때 나는 고향 마을에서 겪었던 잔치 집 일이 기억났다. 그래서 미국 병사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냥 돌아가주세요. 당신들 마음은 고마우나 이 마을 어린이들에게 당신이 가져온 선물들을 풀어놓으면 그들을 가르치는데
좋지 않을것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냥 돌아가 주세요.” 내 말을 들은 미군 병사는 처음에는 “What?”하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나오더니 끝내는 내 말을 이해하고는 그냥 되돌아 같다. 짚차 주위에 모여들었던 아이들이 아쉬워하고 있던 얼굴 모습들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자기가 땀 흘려 얻은 수고의 열매로 살아가는 자립정신이 사람답게, 사나이답게 사는 길의 첫출발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어머니께 고마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