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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낙서화의 영웅 - 키스 해링

鶴山 徐 仁 2005. 12. 12. 08:52

키스 해링은 바스키아와 함께 낙서화가들 중 가장 출세한 인물이다.

     


그 요인은 몇가지가 있는데, 낙서화가들 중 드물게 중산층 출신의 백인이라는 점과
정식으로 미술 대학을 다녔으므로 낙서화가 갖는 의미와 작품 내용을 비교적 논리적으로
인터뷰나 글을 통해 설명할 기회를 얻었고 그것을 십분 활용했다는 점 등이다.
 그는 스스로 자기 작품을 어떻게 선전해야 하는지 알았다.
거리로 작업하러 나갈 때는 사진 작가를 동반하여 작업 과정과 완성작을 사진으로 남겨 그것을
책으로 출판할 정도였다.

 
  경찰이 오는 것을 살피며   낙서하다 경찰에게 잡혀가는 해링
  작업하는 해링
 
 
   지하철역 광고벽의 낙서

  해링은 1970년 쯤 뉴욕에 와 첫눈에 지하철 낙서에 반했다고 고백한다.
 "내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전철 바퀴 위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내 눈에 비쳐졌다. 나는 즉시 지하철 낙서에 매료됐다. 드로잉의 완숙함, 색채와 스케일, 대중적 이미지, 잡힐지도 모른다는 위험, 작가와 관객의 직접적인 관계 등이 나를 사로 잡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유행에 편승하거나 그 스타일을 모방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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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 광고벽의 낙서.  백묵


  

 1980년 나는 새로운 목적과 실체를 갖고 드로잉을 시작했다. 내가 드로잉 작업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야 했다. 즉 대중을 위한 예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술이 살아있는 유일한 방법은 관객의 체험을 관통하는 것이다.
미술의 실체란 상상력과 창조성, 그리고 문제와의 대결을 통해 얻어진 힘이며 그것을 바라본 사람의 눈을 통해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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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느날 타임스퀘어 지하철역에서 광고가 없어 검은 종이로 덮인 광고벽을 보고 즉시 백묵을 사가지고 와 드로잉을 했다. 그때 나는 그것을 일종의 취미로 했다. 그후 나는 드로잉을 위해 지하철을 자주 탔으며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드로잉을 했다.
얼마쯤 지난 후, 내 지하철 드로잉들은 취미 이상의 책임감을 나에게 지워왔다.
많은 사람들이 내 행운을 빌어줬고 그것을 계속하라고 독려했다.
이렇게 되자 이것을 중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처럼 시작된 지하철벽 광고판 위의 드로잉은 전시회에 초대되고 큰 인기를 얻었다.
그의 작품은 기호적인 특성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이해했으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30대의 나이로 미술계의 떠오르는 별이 되었으며 pop shop이라는 가게도 차렸다.
거기엔 아무것도 안그려진 셔츠가 그의 드로잉이 프린트돼선 5~6배의 가격에 팔렸다.

                 
  소호의 팝숍.                                                                         

  
 

 

     



 그의 특징은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한다는데 있다.
주로 소수 민족 등 약한자의 편에 서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에이즈 퇴치 운동까지 하였지만 정작 자신은  에이즈로 31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아루숲 (artso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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