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큰 길, 작은 길, 벽면이나 기둥 등 거리 곳곳엔 온통 낙서 천지다.
특히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낙서화가
그려져 있다.
광적인 열정 없이는 그릴 수 없는 위태로운 곳에 그려진 것도 태반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낙서하는 모습
그 모양새도 총천연색으로 입체감을 살려 그린
것, 단색으로 휘갈긴 것, 글씨만 쓴 것 등
참으로 다양하다.
뉴욕의 열차
낙서화는 시작부터 미술계에 논란을 일으켰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과 혐오하는 사람으로 크게
양분돼 있다.
70년 초, 낙서화가 급속도로 퍼져 나가자 뉴욕시 교통 당국은 스프레이페인트가 잘 칠해지지 않는 스텐레스로 전차를
특별 제작하기도 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지하철과 주변 낙서를 지우는데 6백 50만 달러를 사용하기도
했다니... 낙서와의 전쟁?이 아닐 수 없다.
지하철 낙서로 본격적인 것은 71년에 지하철 내부 벽면에 "Taki
183"이라고 수없이 쓰여진 글씨인데, 시민들은 그 낙서에 익숙해졌고 화제가 되어 뉴욕타임즈지가 주인공을 추적해
신문에 싣기도 했다고 한다.
주인공은 드미트리우스라는 17세 청년인데 "타키"는 그의 그리스식 이름의 애칭이며
183은 그의 거주지 주소였다.
그는 뉴욕시 일대를 전철로 돌아다니며 물건이나 서류 등을 전달하는 일을 하였는데, 그 때마마
손이 미치는 곳에 똑같은 사인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이로 인해 낙서는 뉴욕시 전역에 번졌고 스프레이캔이 등장하며 급기야
전문집단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경찰은 허겁지겁 범인을 채포하고 낙서를 지웠지만 그런 행위는 점점
확산됐으며, 결국 낙서가 뉴욕의 명물이 되었고 유럽 각국으로도 번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낙서그룹들 사이엔 선의의 경쟁이
높아져 그 모양새가 날로 훌륭해졌고,
그 계열의 영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키스 해링
미술계나 사회학자들은 낙서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원인은 백인 주도의 조직화된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민족계층이 낙서를 통해 "자기 삶을 확인하고 그 존재를 밖으로 드러낸다"고 분석했다.
결국 이들
거리미술가들은 정식으로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초대 전시를 갖게 된다.
그들 중 자기 스타일을 확보한 "대가"들은 특별히
Burner라 칭했다.
|
'비분류 美學房'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실제보다 더 사실적인 극사실주의 (0) | 2005.12.12 |
---|---|
[스크랩] 낙서화의 영웅 - 키스 해링 (0) | 2005.12.12 |
[스크랩] 아름다운 거리 - 벽화 예술 (0) | 2005.12.12 |
[스크랩] 세상에서 가장 큰 작품을 하는 작가들 (0) | 2005.12.12 |
[스크랩] 일본 키치미술의 대부 다카시 무라카미 (0) | 200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