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야한 걸 좋아한다. 왜? 좋으니까. 좋으니까 좋다고 한다. 거기에 다른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야하다는 건 섹시하다는 거다. 섹시하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인 성욕을 이끌어낸다는 뜻이다. 성욕은 항시 그 충족을 갈망한다. 항상 그 공허함 사이를 무언가로 채우고자 한다.
태초의 굶주림. 무한의 미완. 그것을 채우는 것이 섹시함이요, 곧 야함이다. 야하다고 하는 것은 그 태초로부터 시작된 굶주림과 무한히 이어지는
미완의 상태를 충족시키는 본능이며 또한 행위인 것이다.
사람이 야한걸 좋아하는데 다른 이유는 필요없다. 한 가지 이유면 된다. 야하다는 거. 야한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즐겁다는 것. 야함을 통해 나 자신의 태초에 인간이기 이전부터 시작되어온, 그리고 인간이 아닌 이후까지도 이어지게 될 그 근원적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 나머지 문제는 그 다음이다. 법과 윤리, 사회와 인간에 의한 금기와 부정은 그 다음의 문제다. 비록 사회와 인간이 그것을 죄악이라 단정짓는다 하더라도 그 순간의 순수한 욕망은 그것만으로도 옳다.
근엄한 체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야한 것을 두고 천박하다고 한다. 도덕적인 척 하는 사람들은 야한 것을 두고 음란하다고 한다. 순결한 척 하는 사람들은 야한 것을 두고 불결하다고 한다. 오로지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야한 것을 죄악이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야한 것들을 빼앗는다. 사람들에게서 그 근원의 순수한 성욕을 빼앗는다. 그리고 다시 야한 것들을 돌려준다. 천박함과 음란함과 불결함과 죄악을 더해서. 그럼으로써 그들은 대중을 죄인으로 만들고 그 죄를 이유로 대중을 통제한다.
정의롭다고 하는 것은 올바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순결하다고 하는 것은 깨끗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근엄하다는 것은 단정함이 아니다. 도덕적이라 하는 것은 그 행동이 바르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적인 것은 남의 위에 군림하여 명령하는 것이다. 순결하다 하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근엄하다 하는 것은 그 생각함과 행함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며, 정숙하다고 하는 것은 그 욕망에 솔직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간결하고 솔직하고 노골적인 대중의 욕망 위에 군림하는 수단이 된다.
어떠한 도덕적인 사람도 도덕적이지 않다. 어떠한 순결한 사람도 순결하지 않다. 어떠한 근엄한 사람도 고상하지 않다. 어떠한 정의로운 사람도 정의롭지 않다. 도덕적인 사람은 도덕을 말하지 않는다. 순결한 사람도 순결을 말하지 않는다. 고상한 사람도 고상함을 강요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삶도 정의롭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자체로 도덕적이고 순결하고 고상하며 정의로울 뿐이다. 그것이 그들의 욕망이며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야함이기에 그를 지키는 것이다.
도덕적이라 말하는 것은 스스로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순결을 떠들어대는 것은 스스로 순결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고상함을 강요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고상하지 않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롭고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 정의를 스스로조차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끄럽고 요란하며 공격적이고 맹목적이다. 스스로 그러하지 못한 것들을 그러하도록 여기고 싶기에 그들은 스스로의 언어로서 스스로의 행동을 정의하려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군림하고 지배하고자 한다.
인류의 역사는 도덕과 순결과 고상함과 정의로움을 내세워 대중을 지배하고자 하는 지배자와 그로부터 자신의 욕망의 솔직함을 획득하고자 하는 대중의 투쟁의 역사다. 지배자는 지배를 위해 대중의 욕망을 거세하고 죄악시하고, 피지배민중은 스스로의 쾌락에 솔직하기 위해 그에 저항해왔다. 욕망은 곧 권력이고 욕망은 곧 힘이었으며 욕망은 곧 자유였다. 욕망의 해방은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의 해방이기도 했다. 민중의 해방은 욕망의 해방으로 인해 완성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많은 나라에서,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회에서 욕망은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배제되어야 할 악으로, 차마 말하는 것조차 불쾌한 더러운 것으로,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인양 이야기된다. 그리고 그에 종사하거나 그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죄악인양 단정하고 단죄한다. 때로는 권력에 의해 제정된 법과 행정력에 의해 그들은 처벌을 받고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그리고 그러한 나라들일수록, 그러한 욕망의 통제가 강한 나라들일수록 민중에 대한 지배계급의 억압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미국의 도덕주의는 미국의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미국의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억압적인 정치세력인 공화당과 미국 남부 개신교회는 또한 개인에 대한 통제를 가장 강하게 요구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개인의 억압 위에서 전체의 이익을 구하며, 그 전체를 지배하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도덕성을 요구했던 집단은 정의사회구현을 내세웠던 군사독재정권이었다. 그들은 검열과 탄압을 통해 대중의 욕망을 지배했다. 지금도 그러한 억압의 기제는 지배계급의 논리로서 유효하게 작용한다. 인터넷과 대중의 욕망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시각과 비판은 대중을 얽어매는 족쇄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먼저 욕망이 자유로워야 한다. 인간이 욕망에 의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으 존재이유는 살아가기 위함이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임을, 인간은 결국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동물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만이 인간은 스스로의 욕망에 자유로울 수 있고,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자유롭고자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란 인간의 욕망의 자유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야한 것은 죄가 아니다. 야한 것은 불결한 것이 아니다. 야한 것은 부정한 것이 아니며, 야한 것은 천박한 것이 아니다. 야한 것은 그 자체로 순수한 욕망이며, 자기 내면에서의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영속적인 욕망의 부름이다. 야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살아있다는 의미이며 야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유롭고자 한다는 뜻이다. 야한 것을 야한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 야함으로부터의 쾌락에 스스로 솔직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롭고자 하기에 그래서 나는 야한 것을 좋아한다.
사람이 야한걸 좋아하는데 다른 이유는 필요없다. 한 가지 이유면 된다. 야하다는 거. 야한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즐겁다는 것. 야함을 통해 나 자신의 태초에 인간이기 이전부터 시작되어온, 그리고 인간이 아닌 이후까지도 이어지게 될 그 근원적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 나머지 문제는 그 다음이다. 법과 윤리, 사회와 인간에 의한 금기와 부정은 그 다음의 문제다. 비록 사회와 인간이 그것을 죄악이라 단정짓는다 하더라도 그 순간의 순수한 욕망은 그것만으로도 옳다.
근엄한 체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야한 것을 두고 천박하다고 한다. 도덕적인 척 하는 사람들은 야한 것을 두고 음란하다고 한다. 순결한 척 하는 사람들은 야한 것을 두고 불결하다고 한다. 오로지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야한 것을 죄악이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야한 것들을 빼앗는다. 사람들에게서 그 근원의 순수한 성욕을 빼앗는다. 그리고 다시 야한 것들을 돌려준다. 천박함과 음란함과 불결함과 죄악을 더해서. 그럼으로써 그들은 대중을 죄인으로 만들고 그 죄를 이유로 대중을 통제한다.
정의롭다고 하는 것은 올바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순결하다고 하는 것은 깨끗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근엄하다는 것은 단정함이 아니다. 도덕적이라 하는 것은 그 행동이 바르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적인 것은 남의 위에 군림하여 명령하는 것이다. 순결하다 하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근엄하다 하는 것은 그 생각함과 행함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며, 정숙하다고 하는 것은 그 욕망에 솔직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간결하고 솔직하고 노골적인 대중의 욕망 위에 군림하는 수단이 된다.
어떠한 도덕적인 사람도 도덕적이지 않다. 어떠한 순결한 사람도 순결하지 않다. 어떠한 근엄한 사람도 고상하지 않다. 어떠한 정의로운 사람도 정의롭지 않다. 도덕적인 사람은 도덕을 말하지 않는다. 순결한 사람도 순결을 말하지 않는다. 고상한 사람도 고상함을 강요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삶도 정의롭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자체로 도덕적이고 순결하고 고상하며 정의로울 뿐이다. 그것이 그들의 욕망이며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야함이기에 그를 지키는 것이다.
도덕적이라 말하는 것은 스스로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순결을 떠들어대는 것은 스스로 순결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고상함을 강요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고상하지 않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롭고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 정의를 스스로조차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끄럽고 요란하며 공격적이고 맹목적이다. 스스로 그러하지 못한 것들을 그러하도록 여기고 싶기에 그들은 스스로의 언어로서 스스로의 행동을 정의하려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군림하고 지배하고자 한다.
인류의 역사는 도덕과 순결과 고상함과 정의로움을 내세워 대중을 지배하고자 하는 지배자와 그로부터 자신의 욕망의 솔직함을 획득하고자 하는 대중의 투쟁의 역사다. 지배자는 지배를 위해 대중의 욕망을 거세하고 죄악시하고, 피지배민중은 스스로의 쾌락에 솔직하기 위해 그에 저항해왔다. 욕망은 곧 권력이고 욕망은 곧 힘이었으며 욕망은 곧 자유였다. 욕망의 해방은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의 해방이기도 했다. 민중의 해방은 욕망의 해방으로 인해 완성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많은 나라에서,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회에서 욕망은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배제되어야 할 악으로, 차마 말하는 것조차 불쾌한 더러운 것으로,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인양 이야기된다. 그리고 그에 종사하거나 그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죄악인양 단정하고 단죄한다. 때로는 권력에 의해 제정된 법과 행정력에 의해 그들은 처벌을 받고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그리고 그러한 나라들일수록, 그러한 욕망의 통제가 강한 나라들일수록 민중에 대한 지배계급의 억압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미국의 도덕주의는 미국의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미국의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억압적인 정치세력인 공화당과 미국 남부 개신교회는 또한 개인에 대한 통제를 가장 강하게 요구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개인의 억압 위에서 전체의 이익을 구하며, 그 전체를 지배하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도덕성을 요구했던 집단은 정의사회구현을 내세웠던 군사독재정권이었다. 그들은 검열과 탄압을 통해 대중의 욕망을 지배했다. 지금도 그러한 억압의 기제는 지배계급의 논리로서 유효하게 작용한다. 인터넷과 대중의 욕망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시각과 비판은 대중을 얽어매는 족쇄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먼저 욕망이 자유로워야 한다. 인간이 욕망에 의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으 존재이유는 살아가기 위함이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임을, 인간은 결국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동물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만이 인간은 스스로의 욕망에 자유로울 수 있고,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자유롭고자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란 인간의 욕망의 자유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야한 것은 죄가 아니다. 야한 것은 불결한 것이 아니다. 야한 것은 부정한 것이 아니며, 야한 것은 천박한 것이 아니다. 야한 것은 그 자체로 순수한 욕망이며, 자기 내면에서의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영속적인 욕망의 부름이다. 야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살아있다는 의미이며 야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유롭고자 한다는 뜻이다. 야한 것을 야한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 야함으로부터의 쾌락에 스스로 솔직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롭고자 하기에 그래서 나는 야한 것을 좋아한다.
가져온 곳: [나노식품/나노푸드 (Nanofood)]  글쓴이: Truescience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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