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 속에는 이미 고유의 방법과 과정이 내포되어 있어서 '어떻게'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즉, 라스베가스를 가보지도 못하고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 쓴다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일까 웃음이 납니다. 그래서 내 짧지 않은 생을 돌아다보니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여행과 영화 보기 그리고 유행 쫓기였음을 깨닫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은 이상한 거부감 혹은 개성(?)으로 하지 않고 버티기가, 내게 시행착오의 우는 피하게 해주었지만 결국 협소하고 깐깐한 잔소리꾼으로 굳어지게 한 것 같습니다. 요즘 세대들의 취미나 하고싶은 일을 적은 것을 보면 거의가 여행, 음악 감상, 영화 감상인데 그런 애들에게 먼저 갖출 경제력 운운하며 답답한 소리나 늘어놓으니까요.
돌김님처럼 지난 시간을 돌아다보니,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갈등과 번민에 휩싸이는 것을 이젠 견인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젊었기에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십 대 후반의 갈등도 너무 힘들어서 빨리빨리 삼십이 되었으면 하고 바랬지요. 건너기 힘든 강을 건너버린 것 같은 안도감도 잠시, 가난과 가족관계의 갈등이 그 옛날의 자존심을 마구 짓부셔버릴 때 빨리빨리 늙고싶었어요. 끝이 오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시간은 야속하기도 하지만 고마운 것이네요. 이렇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아쉽게 음미하며 살 기회도 주니까요. 그리고 결국은 어떤 큰 고통이나 환희도 다 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제는 서서히 노을을 향해 걸으며 가장 아름답게 뒷모습을 남길 일을 궁리합니다. 내가 살았던 한 세상, 라스베가스를 떠날 때...
명애님, 사람들은 흔히 내가 한 십 년만 젊었어도... 하는 가정법의 소원을 말합니다. 내가 가진 상처는 다 버리고 만약 내가 그 당시로 되돌아간다면... 그 때라면 나는 내 인생의 마스터 플렌을 다시 짤 것입니다. 테니스와 수영으로 날이 날마다 놀아버리고, 애들 과외 주선하느라 전화에 매달리고, 반찬 만들기에 머리 쓰고, 계모임에 점심 먹고 그런 보편적 아줌마로 살지는 않고 싶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일을 계속했으니 덜 허무했지, 아니면 思秋期의 우울증으로 정신과 좀 다니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열 아홉부터 세운 십 년 터울로 진행되는 '10년 개발계획'이 3차까지는 무난히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1년 혹은 2년 단위의 단기 발전 계획을 세울 것 같습니다. 장기적 계획의 안일함을 벗고싶기도 하고 또 하나 이유는 이제 그렇게 긴 계획은 급변하는 세상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남은 육 개월 안에 이루고싶은 일과 정리해 둘 일이 내년부터 시작되는 또 한 터울을 위한 힘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일의 근간은 공부와 인간관계, 그리고 자아실현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더욱 내포가 커지고 충실해지는 시간이 되게 하고싶습니다.
사 년 반 전, 내 청춘의 희망과 고통이 회오리치는 곳, 신촌을 다시 찾으며 느꼈던 넘치는 갈구와 자기 다짐의 발걸음이 굴다리 아래를 지날 때, 내 손에 쥐어진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선전지를 기억합니다. 신촌역 근처 어느 소극장에서 상영되는, 그래서 쉽사리 밤 시간을 내리라고, 좀 문화적 자양분도 섭취하리라고 계획했던 그 주간의 바쁨도 기억납니다. 그러나 원인은 내가 가진 중요도에서 처져버렸던 영화를 위해, 이제는 연극영화과에서 가르치는 제부의 도움도 좀 받아야겠습니다.
알겠군요. 살고 보니 친구가 좋아하던 모든 것이 얼마 후쯤엔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다시 남는 것은 친구가 내게 준 흔적이었음을. 새벽마다 보내주던 편지 쓰기와 태권도가, 박물관 대학과 그릇 빚기가, 키타 연주와 노래와 보석이, 친구가 좋아하던 만큼 내게 영향을 주었음을 느낍니다. 이제는 명애님처럼 요리와 영화와 여행, 그리고 또 무엇이든 깊이 즐기며 사랑하는 것을 또 닮아갈 것입니다. 짧고 깊게 응시하는 호흡법으로 말입니다.
다시 한번 한국의 딸로서 당당하게, 단단하게 그리고 담담히 살아가시길 빕니다.
김종철님의 <딸에게 주는 가을>을 인용합니다.
딸아, 잠시 후면 바람이 불고
잠시 후면 날이 기울고 그림자 갈 때
이 젊은 애비가 붙들고 있는
거친 들을 너는 보게 될 것이다.
아직 세상의 아무 이름도 갖지 않은 딸아
네가 가질 바다와 숲과 땅에
어찌 북풍으로 그 품을 채우겠느냐.
가을은 언제나 노루와 들사슴으로 우리에게 부탁하더라
오직 우리의 살이 아프고 마음만 슬플 뿐이더라
딸아 빛은 어두운데 가깝다 하는구나
이 애비가 너와 함께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00.7.2
짧은 여행을 앞두고 푸른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