候鳥
-김남조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마주 불러볼 정다운 이름도 없이
잠시 만난 우리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섰다.
갓 추수를 해들인 허허한 밭이랑에
노을을 등진 긴 그림자 모양 외로이
당신을 생각해온 이 한철
삶의 백가지 가난을 견딘다 해도 못내
이것만은 두려워했음이라.
눈멀듯 보고 지는 마음.
신의 보태심 없는 한 개 그리움의 별이여
이 애 타는 한 가책,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당신은 누구라고 말하리.
우리 다같이 늙어진 정복한 어느 훗날에
그 전날 잠시 창문에서 울던
어여쁘디 어여쁜 후조라고나 할까.
옛날에 그 옛날에
이러한 사랑이 있었더니라.
애 뜯는 마음이 있었더니라.
이렇게 죄 없는 얘기 거리라도 될까.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오래 몸에 밴 유림의 법도를 지키며 고요히 움직이고 소리 없이 가르치며 일가를 지키기에 한 점 흐트러짐 없던 단아한 분이었습니다. 서책을 가까이 하고 농사의 절기를 따라 하늘에 순종하며 살아온 한없이 순박한 村老였습니다. 그 분이 살았던 자취는 이제 등기소에나 망자로 이름이 남아있을 뿐 이 세상의 어느 곳에도 그 눈길이나 호흡의 온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본 적 없는 노인이 왜 지금 내 가슴속에 범종의 소리와 같은 유장한 여운을 남기며 '한 사랑의 전형'을 깨우칠까요?
그 단초는 어쩌면 법적 관계 혹은 법안에 묶여서 편안해 하는 강박된 나의 정서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분은 폐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한 女息의 존재를 그가 평생 지킨 가족 앞에 밝히게 되었습니다. 일생을 호젓하게 절제된 생활로 보내신 이의 호적에 아무도 몰래 올려진 딸의 이름. 가족들 특히 그의 부인은 혼절하도록 놀랐고 이가 부딪치는 배신감을 앙다물고 참았습니다. 누구와, 언제, 어떻게의 의문 부호가 잇따르는 중에 조용히 눈을 감은 노인의 뇌리에는 그의 마음을 앗아간 한 여인의 애잔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제껏 살아 계시다면 일흔을 넘긴 그가 아직 젊다면 젊은 사십 대에 만난 과수댁이었습니다. 그보다 대 여섯은 어린 나이에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홀로 되어 들일에 품팔이 다니는 몸피 약한 여인이었지요. 그 노인은 단지 일하는 그녀를 보았고 알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막내딸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녀는 순순히 그에게 성을 바꾸어 딸을 맡겼습니다. 그가 남 모르게 막내딸을 양육하며 들이는 마음과 비용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자기의 핏줄이 아닌 딸, 그러나 그 여자의 딸이기에 그토록 애틋하게 사랑스러운 것을 그는 가슴 깊이 즐겼습니다.
왜 그토록 기이한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는지 아마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의 임종을 지키던 아들마저도 그를 다그쳤답니다. 정말 아버지 자식이 아니라면 왜 호적을 어지럽혔습니까? 아버지처럼 유교의 도리와 순절을 지키는 분이... 책임질 일도 아니라면. 그러나 그 분의 한없이 편안하고 서늘한 시선 속에서 그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촌노의 가슴 한 모퉁이에 함초롬히 피어난 봄 수국꽃 같은 사랑의 흔적을 보았습니다. 손목 한 번 잡을 수 없는 여인의 딸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시작한 사랑, 그 극진한 마음의 사랑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의 선택은 곧 다른 하나의 배신을 의미합니다. 아니 다른 모두에 대한 배신을 말합니다. 우리 둘은 같은 열쇠를 가지고 한 집으로 돌아갑니다. 한 공간 같은 집에서 함께 숨쉬고 잡니다. 하나의 껍데기를 쓰는 두 마리 달팽이처럼 함께 식구를 만듭니다. 그리고 허용된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 출발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저 떨림의 미묘함이 내게 도착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노인이 먼저 택한 쪽은 사랑이 아닌 증거였습니다. 그의 姓을 따라 증거로 남은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은 한없이 순결하게 승화된 氣體같은 것이었습니다.
노인이 떠난 후 더욱 허망해진 것은 그의 부인이었습니다. 아무리 그 사랑을 무시해도 증거로 남아 흩트리는 그 진한 향내를 용서할 수 없는 상처로 부여안았고, 결국 노인을 찾아 의문을 풀러 떠났습니다. 아마 부인은 흘러가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새겨진 증거 때문에 서러웠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 쪽에 훈수를 두었습니다. 어머니의 상처보다는 아버지의 心象이 설득력 있었나 봅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행복이 부러웠나 봅니다. 부끄럽지 않은 사랑을 죄없이 지키기 위해 들인 노인의 마음 단속은 잊고 말입니다.
집에 돌아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실용주의자, 합리주의자, 그리고 현실주의자인 그는 일언지하에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잠 속에도 그 노인을 만났습니다. 한 마리 새를 데리고 먼길을 홀연히 걷는 그러나 외로워 보이지 않고 편안한 얼굴이었습니다. 문인 李德弘은 <退溪先生考終記>에 임종을 앞둔 퇴계선생의 마지막 부탁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를 쓰고 있습니다. 슬픔이 묻어날 틈이 없이 한없이 투명하고 담담한 죽음이었습니다. 여한이 없는 삶이란 이토록 가볍게 죽음의 경계선을 넘으며 눈물과 고통, 외로움과 막막함, 그리움과 쓸쓸함을 지워버리는 간단한 인사로 하직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런 사랑은 하얗게 뼈로 남아, 단순성의 투명한 절정을 이루고는 흘러 와서 내 뉘우침의 한숨을 씻어줍니다. 얼마나 많은 헛된 계산과 줄다리기로 망쳐버린 시간의 무상함인가. 보이지 않는 빛의 입자를 좇아 헤매였던 긴 여로인가. 눈물과 욕망의 분비물 속에 질척이던 고통인가. 이 모두의 내면에 감추어진 상처나 탄식까지도 휘갑아 안아주며 깊고 은근한 그림자를 던져줍니다.
증거 속에는 사랑이 있다고요? 남은 자에게 배신이 되는 증거를 선택할 용기가 없습니다. 아, 그런 사랑을 키울 여백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항상 내 심해의 말미잘들은 온 촉수를 세워 억압도 아니고, 통제도 아닌 사랑을 향해 너울거리는 것일까요. 한 노인의 사랑의 궤적을 따라 이따금 물소리 흐르는 산길을 걷는 것일까요. 종소리 은은한 산사 쪽을 고개 돌려 바라보는 것일까요. 김남조님의 候鳥는 한 철 우짖는 철새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통한 자의 생애의 무게가 담긴 예리한 울음으로 시간과 공간을 건너 한 줄기 섬광처럼 건너옵니다.
'00.5.31
모든 음악의 끝처럼 단호한 오월의 마지막 밤에
푸른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