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고적하던 중앙역에서 함께 갈 사람을 기다리던 마음 "혹시 오지 않을까.."에 놀라움을 주듯 발차시간 무렵에 묵직한 여행 가방들을 밀고 온 분들이 모두 타셨나요?
그런데 이 기차의 종착역은 존경이냐, 사랑이냐의 택일이라구요? 왜 그 둘이 함께일 순 없나요. 대통령도 아내에게 언제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이라는 수사를 붙이는데 우리는 '목포 살고 부산 사는'이란 수식어로 혼란스러워야 하나요. 사랑으로 가는 길에 존경은 대전쯤에 위치해서 있을 순 없을까요. 투정을 부려봅니다.
오래 전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하나 투고하고선 날마다 당선 소감을 끄적인 적이 있답니다. 얼마 전엔 논문의 초심 받으려 가는 길에 브리핑 연습은 덮어두고 감사의 글에 쓸 말들로 머리를 굴렸습니다. 자질구레한 주변 인사들 수 십 명을 나열하는 것에 넌더리가 난 탓에 간추리고 추려서 하나님, 친정 부모님, 그리고 두 아들과 남편으로 등장 인물을 축소해 봤습니다. 그리고 각자에 따르는 수식어로 영광, 기쁨, 사랑. 그리고 남편 앞에 와서는 '감사와 존경을 담아'라고 써 봤지요. 도저히 사랑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절실하게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에야 사랑과 존경이 서있는 자리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먼 사랑의 여정에 나의 일상과 수고만이 아니라 신뢰와 존경과 그외 많은 고위 개념들이 수렴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추상명사, 추상형의 존재입니다. '사랑은 움직이는거야' 하던 그 앙칼진 목소리의 청춘은 깨물어 녹일 수 있는 크기의 얼음 조각으로 사랑을 인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는데 동감합니다. 단지 그 힘과 방향이 사람마다 다르게 작용한다는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긍정과 부정의 두 줄기 산맥 사이를, 온류와 난류의 두 갈래 물줄기를 따라 쉼없이 振子운동하며 결국은 평야와 바다에 자맥질하는 사랑, 아직도, 어쩌면 언제나, 미완의 개념입니다.
망부석이 되어버린 지순한 사랑, 박제된 나비로 소유된 사랑, 그래서 추억이나 전설로 남거나 증거만이 남은 사랑은 거세된 사랑입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죽어버린 사랑 앞에 애곡은 낭비라 생각합니다. 설령 사랑이 손에 닿지 않는 유리벽 너머에 있을지라도 살아있는 존재, 움직이는 존재. 내게 삶의 활기와 이유를 주는 존재일 때 사랑의 대상으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영화 'Besieged'에서 킨스키가 찾은 것이 바로 나를 움직여 주는 존재로의 산듀레이 아닐까요. 그녀의 삶의 목적에 동참해줌으로라도 함께 가고싶다는 그의 사랑의 애절함이 그녀에게 '감사와 존경을 담아' 곁에 눕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산듀레이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순간 화면을 타고 검은 손가락의 주인에게 돌아갔겠지요. 여인이 사랑과 존경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한다면 선택은 사랑일 것입니다. 혹 두 개의 사랑 중에서라면 보다 더 큰사랑 쪽이겠지요. (여자는 算數를 잘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바친 킨스키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허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산듀레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죽은목숨이나 마찬가지의 남은 생을 살았을 테니까요. 그는 가진 것을 다 버리고 가슴속에 고인 물을 소유했습니다. 그 물이 한 마리 물고기를 갖기에 충분하다면 그는 그녀의 그림자만으로도 계속 행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하는 사랑의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내 안에서 편안하게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노는 물고기를 관상하는 것이, 신선한 물로 매일 바꾸어 주며 예뻐하는 것이 왜 안되나요?
비를 담은 바람이 낮게 붑니다. 유월을 기대하게 하는 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를 밀고 옵니다. 창 밖으로 멀리 바다가 보이는데도 소금기 없고 비린내 없는, 육질의 끈적임도 없는 해풍이 더 없이 향기롭습니다. 내 마음의 그대에게 바다 하나 안기고싶습니다. 때로 거센 출렁임과 성난 삼각 파도로 그대의 해안선을 위협해도, 아, 바위처럼 든든한 그대에게 짠 바다 하나 주고싶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를 점령한 흰 고래이고 싶습니다.
'00.5.26
사랑은 선택, 생존은 필수라 여기는 푸른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