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을 앞 둔 사람의 마음은 모두 그렇겠지요. 아쉬움과 혼자됨의 두려움과... 그러나 떠나는 자는 좀 더 여유가 있을 겁니다. 새 길을 준비하고 또 희망과 계획이 있는 떠남이니까요.
오래 전 이 소도시에 붙박이가 되고 나서 사람 사귀는 일이 몹시 두려웠답니다. 조금 마음을 기울여 정을 붙이기 시작하면 금새 떠나는 사람들 때문이지요. 그들에게는 출세의 한 과정으로 지나가는 간이역 같은 곳에 내가 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서울 쪽을 향한 주화성의 미생물처럼, 나도 어쩌면 아직 버리지 못한 속성인지 모릅니다.
이명애님, 누군가와 이별을 앞두고, 그것이 설령 그다지 오래지 안았다해도 한 덩어리의 땅 위에 숨쉬고 있었으며,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함께 생각을 나누었던 이가 멀리 異國으로 떠난다하니, 은연중 아쉽고 두렵습니다. 물론 컬럼을 통해 똑 같이 만난다지만 말입니다.
나는 언젠가 마음을 이미 많이 기울여버린 이에게 물었답니다. 혹시 이민은 안 갈 것인지, 외지로 이사는 안 갈 것인지, 그리고 절대 안간다는 답을 듣고야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놓았습니다. 백치 아다다가 돈이 빌미가 되어 떠나는 사람이 두려워 열심히 번 남편의 돈을 모두 강물에 뿌리는 단순함같이 그가 더 이상 성공하지 않기를 바랐답니다. 그러나 한편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이별 연습을 했던가, 다시 못 올 길로 부모님과 육친을 떠나 보내고도 잘 살지 않았던가, 아들과의 짧은 이별도 이젠 익숙하지 않은가. 헤어짐을 그토록 가슴 아파했어도 오랜만의 만남엔 또 그리 어색해 하면서.
다시 산듀레이의 마지막 밤 이야기나 할까요? 그녀는 기다리던 남편과의 재회에 옷과 술을 준비한다지요. 아마 그에 따른 몸과 정염과 설래임 모두를 챙겼을 것입니다. 남편은 그 자신의 外皮이며 祖國이자 思想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까지 킨스키에게 받은 많은 것들이 무거운 짐이 되어 어깨를 눌렀습니다. 꽃과 향기와 그의 파워풀한 전략, 모두가 갑자기 그녀를 포위하며 무게를 주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과 삶의 중심을 위한 협력자에게 보답해야할 작은 선물, 그녀는 그것이 아마 육체라 할지라도 가장 절실한 것이라면 주고싶어졌을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육체는 일시적 투항의 자세를 취했겠지요. 단지 그가 원한다면... 그의 뜻에 맡기기로.
그들이 어떻게 침대에서 헤어졌는지 영화를 보지 못한 나는 알 수 없지만, 함께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킨스키는 산듀레이의 마음의 선물은 받았겠지요. 'I love you'가 적힌 쪽지는 못 받아도 마음은 알았겠지요. 사람 사이의 사랑이 승화되는 최후의 모습은 아마 균질적이고 중성적인 모습, 그래서 육질의 냄새는 모두 탈취되고 이별도 두렵지 않은 상태가 아닐까요? 쌍방향의 통속적 사랑이 그들에게 있으려면 굳이 촉박한 마지막 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날들 속에 뜨거운 프로포즈와 공략에 녹지 않은 산듀레이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정말 나 혼자일까요?
이따금 함께 티브이 드라마를 보면서, 작은아들이 불쑥 '흥, 불륜이군'하는 단정적 표현을 쓸 때마다 나는 몹시 불쾌합니다. 정상적 사랑의 기준도 아직 파악 못한 나이에 셋만 나오면 자신있게 불륜론을 들먹이니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답답합니다. 사회가 그렇다고, 누구나 그런 식이다고, 그렇게 쉽게 같은 잣대로 재단하여서 남는 것이 무엇인지 참 단세포적 선입견입니다. 정신의 우아함은 사랑을 통해 깨달아지는 존재의 통찰력이 내비칠 때 아닐까요. 육체에 머물지 않는 사랑을 생각하고 지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운 좋은 사람에게 여러 번의 기회를 주고, 또 현명한 사람에게 각기 다른 형과 색으로 정리할 능력도 준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제껏 단 한 번의 사랑도 못해보고 '교통사고 같은 사랑'을 기다린다는 어떤 노처녀의 수동적 사고에 연민을 느낍니다. 사랑은 당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수용하는 것이므로 준비가 필요할 터인데요. 교통 사고 같은 사랑이 그녀에게 남길 내상과 손실과 통증을 생각하면 제발 그리되지 않기를 빌어준답니다.
이명애님, 아무튼 장소를 옮기셔도 다름없는 본질 탐구의 영화 읽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번 컬럼은 내 마음의 암호를 많이 알아채셔서 섬짓했습니다. 언젠가 완벽한 퍼즐 그림을 맞추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어느 분 글 지적처럼 비슷한 색깔의 영혼들이 우글거리는 곳, 소름이 돋으면서도 스릴있는 곳입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시고 건필을 기원합니다.
쏘 롱!
'00.5.29
잠 못 이루는 모든 날들의 마지막 밤에 푸른샘 씀
ps; 글 올리기 전 님의 글을 읽고 역시 아직도 이별은 슬프다고 외치게 되는군요. 개인의 정서가 서로 공유되며 위로받을 수 있다면 하는 바램입니다. 칭찬에 감사드리고요. 힘찬 첫발자국을 꽉 찍으시며 당당하게, 단단하게 그리고 담담한 여인으로 살아주세요. 다시 한 번 쏘 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