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장난감이 있다. 누군가 어린아이가 그 장난감을 소중히 다루며
재미있게 논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장난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바퀴가 망가졌다. 자동차인데 자동차를 굴릴 바퀴가 망가진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는 그 자동차 장난감을 어떻게 할까? 버리거나, 버리지 않더라도 한구석에 처박아둘 것이다. 바퀴가 없는 자동차 장난감은 더이상 자동차
장난감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을테니.
전근대 여성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생식이 전부였다. 남성의 욕망을 받아들이고, 남성의 정액을
받아 수정해서 아이를 낳는 것. 그리고 그 아이를 기르는 것. 그것이 여성이 존재하는 의미의 전부였다. 그래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은 대개
미인들이다. 아름답고 현숙한, 남성의 욕망이 만들어낸 판타지. 설사 미인이 아닌 이들이라 할지라도 어느새 미인이 되어 그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성적인 것이 여성의 존재의 모든 것이라고 했을 때 당연히 성적인 것 - 즉 정조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여성의 존재 자체를
지키는 것이다. 정조를 잃는다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는 것.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조를 잃은 여성에 대한 처분은 가혹했다.
자살을 강요당하거나, 심지어 명예를 위해 가족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당연했다. 오로지 여성의 가치란 성적인 것 - 정조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퀴를
잃은 자동차가 버려지듯, 성적인 순결을 잃은 여성은 그렇게 사회적으로 폐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전근대 사회에
만연했던 남성위주의 성기를 중심에 둔 사고 때문이었다. 남성의 욕망을, 여성을 성적으로 소유하고 유린하고 싶어하는 성적인 욕망을 전제하고, 그
객체로서의 여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남성의 성적인 욕망을 해소하고 남성을 위해 아이를 낳는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전제하기에, 오로지 그 성적인
요소만이 전부인 양 그렇게 여겨진 것이다.
당연히 여성에게는 자신의 성을 지켜야 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여성 스스로의 성이 아닌,
남성의 소유물로서의 성을, 남성을 위해 여성 스스로 지켜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 것이다. 그것이 정조다. 그것이 순결이고. 처녀막의 신화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게 여성은 성처녀가 되기를 강요받고, 그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 죽음까지 동반한 가혹한 처벌이 가해진다. 그것이
전근대사회 여성인권의 현주소였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전근대 문화권에서 강간피해자는 가해자 만큼이나, 아니
가해자보다 더한 책임이 물려졌다. 때로는 자살을 강요당했고, 때로는 가족이나 마을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자신의 존재가치인 성적인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근대 강간은 가해자의 범죄인 동시에 피해자의 남성의 소유물이어야 할 정조를 지키지 못한 범죄였던
것이다.
그나마 근대가 되어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면서 여성의 가치는 더이상 성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게 되었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 각분야에 여성들이 활발하게 진출했고 공격적으로 남성의 지위를 위협하기도 하게 되었다. 더이상 여성의 가치는 그네들의 풍만한
젖가슴과 펑퍼짐한 엉덩이가 아닌 그녀들의 머릿속, 그녀들의 손에 있게 된 것이다.
여성의 지위가 달라졌으니 정조에 대한 개념 또한
당연히 전혀 다른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과거의 정조가 여성의 전부, 즉 여성의 존재의의인 성적인 순결함을 지키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근대에
이르러 정조란 한 인간으로서의 성적인 자기결정권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스스로 선택하고 동의하지 않은
행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로 전혀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현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강간죄를 처벌할 때 정조의 개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자기결정권을 가해자가 침해했느냐의 여부로 결정한다. 과거의 강간에 대한 처벌이 여성이 얼마나 자신의 정조를 지키려
노력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제 비로소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얼마나 침해당했는가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
것이다.
"No means no"라던가? "싫다고 하는 건 싫다고 하는 것이다."라는 아주 당연한 말이다.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감히 토를 달 수 없는. 그런데 과거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자의 No는 Yes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써왔다. 그리고 그러한 편견을
전제로 여성을 대해왔다. 성적인 대상으로서. 오로지 남성을 위한 성기이고 자궁으로서. 과거 강간에 대한 부당한 편견과 법적인 적용은 그러한
잘못된 전제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비로소 싫은 것은 싫은 것으로,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그것을 어기면 처벌받는 그런 것으로
법체계가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서로 합의해서 침대까지 갔다 하더라도 마지막 삽입의 순간 거부했음에도 그에 응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강간이다. 여관까지 따라갔다 할지라도 전혀 할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싫다고 말했다면 강간이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동의를 추정할 수 있는
어떠한 행위를 했느냐가 아니다. 거부의 말과 행동을 분명히 보였으며, 그러한 거부의 말과 행동을 할 수 없도록 강제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의 강간의 의미다.
문제는 이러한 세계적인 변화가 우리와는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싫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싫은 것이다? 우리나라 사법부에서는 결코 그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여관까지 갔으면 그것은 화간이다. 인사불성이 되어
있어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으면 화간이다. "싫다." "아니다."라고 하는 피해자의 거부의사가 중요한 것이 아닌, 가해자가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강간죄에 대한 사법체계는 딱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다. 남성의 성욕을 긍정하고 전제하며, 여성을
그 객체로서 두는. 그래서 남성이 성욕을 스스로 억제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 그 성욕을 유발하지 않도록 책임을 지우는 딱 그
수준이다. 그래서 여성의 옷차림이 어떻고, 평소 행실이 어떻고 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심지어 처녀인지 아닌지까지 물어볼
정도로.
그런 나라이다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성추행범은 처벌받아도 강간범은 무죄로 풀려난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주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정신지체아 의붓딸을 강간한 아비더러 피해를 당한 여자아이가 학교에 정상적으로 등교했다고 무죄란다. 술먹고 인사불성인 처제를 강간한
형부더러 맨정신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으니 무죄란다. 어떤 정신지체아는 임신과 낙태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고 항거불능이 아니었다고
하고.
딱 그 수준인 것이다. "오죽하면 강간당했겠냐?"고 하는. 강간당한 여성에게 정조를 잃은 책임을 물어 자살을 강요하고, 때로
명예살인을 일삼던 조선시대, 딱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 나라의 사법체계라는 것은. 이 나라의 법관이라고 하는 인간들은. 그 인간들의
강간에 대한 의식수준은 19세기, 아니 18세기 이전에 머문 채 전혀 발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21세기 한국 법조계의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법관이라고 하는 인간들은 죽어라 법전만 파고 사법고시 공부해서 법관이 된
인간들이다. 일반의 사회적 상식에 익숙해질 틈 없이 법이라고 하는 특수한 전문분야만을 공부하고 법관이라고 하는 특권계급에 편입된 인간들이다.
그들에게 사회일반의 상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앞뒤 꽉막힌 법바보들에게 무슨 일반의 당연한 상식을
요구하겠는가?
공자왈맹자왈하던 선비들이 처음부터 공자왈맹자왈만 하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선비라 하는 것은 칼도 좀 쓸 줄 알고,
활도 좀 쏠 줄 알고, 어느정도 잡기도 할 줄 아는, 살아가는 제반의 지식을 갖춘 종합지식인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논어맹자 사서오경만 외우면
입신을 할 수 있게 되니 오로지 경전 하나만을 파게 되면서 우리가 아는 고리타분한 선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법관들도 마찬가지다.
사법고시만 잘 보면 법관이 된다. 다른 것 필요없다. 다른 상식은 필요없다. 일반의 상식이라든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정의 같은 것도
필요없다. 법조문과 그 법조문을 해석해 적용하는 법관의 권위만이 전부다. 법바보들. 법청맹과니들. 말 그대로 덜떨어진 엘리트집단이라고나 할까?
강간피해자에게 피해의 책임을 묻는 사법기관의 현재는 그 결과일 것이고.
하긴 법관만 탓할 일도 아니다. 일반인들은 안 그런가?
강간을 저지른 놈과 강간피해를 당한 사람이 있으면 강간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더 비난과 조롱을 퍼부어대는 것이 우리 사회다. 강간을 저지른 놈은
큰소리치고 다니고, 강간의 피해를 입은 사람은 죄지은 양 숨어서 숨죽여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니 저따위 법관들도 나오는
것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모두 똑같은 인간들인 걸.
괜히 강간발생율 1위, 강간신고율 2%의 강간공화국이 아니다. 여자들이
밤길조차 마음놓고 나다니지 못하는 사회. 여자들이 남자들과 마음놓고 어울릴 수 없는 사회. 거의 모든 남자들이 여성을 오로지 성기로만 보는,
남자인 나조차도 쪽팔리고 역겨운 사회가 이 나라를 강간공화국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짜 딸 낳아 기르기 두려운 나라.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자랑스러운
자동차 장난감이 있다. 누군가 어린아이가 그 장난감을 소중히 다루며
재미있게 논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장난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바퀴가 망가졌다. 자동차인데 자동차를 굴릴 바퀴가 망가진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는 그 자동차 장난감을 어떻게 할까? 버리거나, 버리지 않더라도 한구석에 처박아둘 것이다. 바퀴가 없는 자동차 장난감은 더이상 자동차
장난감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을테니.
전근대 여성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생식이 전부였다. 남성의 욕망을 받아들이고, 남성의 정액을
받아 수정해서 아이를 낳는 것. 그리고 그 아이를 기르는 것. 그것이 여성이 존재하는 의미의 전부였다. 그래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은 대개
미인들이다. 아름답고 현숙한, 남성의 욕망이 만들어낸 판타지. 설사 미인이 아닌 이들이라 할지라도 어느새 미인이 되어 그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성적인 것이 여성의 존재의 모든 것이라고 했을 때 당연히 성적인 것 - 즉 정조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여성의 존재 자체를
지키는 것이다. 정조를 잃는다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는 것.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조를 잃은 여성에 대한 처분은 가혹했다.
자살을 강요당하거나, 심지어 명예를 위해 가족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당연했다. 오로지 여성의 가치란 성적인 것 - 정조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퀴를
잃은 자동차가 버려지듯, 성적인 순결을 잃은 여성은 그렇게 사회적으로 폐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전근대 사회에
만연했던 남성위주의 성기를 중심에 둔 사고 때문이었다. 남성의 욕망을, 여성을 성적으로 소유하고 유린하고 싶어하는 성적인 욕망을 전제하고, 그
객체로서의 여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남성의 성적인 욕망을 해소하고 남성을 위해 아이를 낳는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전제하기에, 오로지 그 성적인
요소만이 전부인 양 그렇게 여겨진 것이다.
당연히 여성에게는 자신의 성을 지켜야 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여성 스스로의 성이 아닌,
남성의 소유물로서의 성을, 남성을 위해 여성 스스로 지켜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 것이다. 그것이 정조다. 그것이 순결이고. 처녀막의 신화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게 여성은 성처녀가 되기를 강요받고, 그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 죽음까지 동반한 가혹한 처벌이 가해진다. 그것이
전근대사회 여성인권의 현주소였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전근대 문화권에서 강간피해자는 가해자 만큼이나, 아니
가해자보다 더한 책임이 물려졌다. 때로는 자살을 강요당했고, 때로는 가족이나 마을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자신의 존재가치인 성적인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근대 강간은 가해자의 범죄인 동시에 피해자의 남성의 소유물이어야 할 정조를 지키지 못한 범죄였던
것이다.
그나마 근대가 되어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면서 여성의 가치는 더이상 성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게 되었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 각분야에 여성들이 활발하게 진출했고 공격적으로 남성의 지위를 위협하기도 하게 되었다. 더이상 여성의 가치는 그네들의 풍만한
젖가슴과 펑퍼짐한 엉덩이가 아닌 그녀들의 머릿속, 그녀들의 손에 있게 된 것이다.
여성의 지위가 달라졌으니 정조에 대한 개념 또한
당연히 전혀 다른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과거의 정조가 여성의 전부, 즉 여성의 존재의의인 성적인 순결함을 지키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근대에
이르러 정조란 한 인간으로서의 성적인 자기결정권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스스로 선택하고 동의하지 않은
행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로 전혀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현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강간죄를 처벌할 때 정조의 개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자기결정권을 가해자가 침해했느냐의 여부로 결정한다. 과거의 강간에 대한 처벌이 여성이 얼마나 자신의 정조를 지키려
노력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제 비로소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얼마나 침해당했는가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
것이다.
"No means no"라던가? "싫다고 하는 건 싫다고 하는 것이다."라는 아주 당연한 말이다.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감히 토를 달 수 없는. 그런데 과거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자의 No는 Yes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써왔다. 그리고 그러한 편견을
전제로 여성을 대해왔다. 성적인 대상으로서. 오로지 남성을 위한 성기이고 자궁으로서. 과거 강간에 대한 부당한 편견과 법적인 적용은 그러한
잘못된 전제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비로소 싫은 것은 싫은 것으로,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그것을 어기면 처벌받는 그런 것으로
법체계가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서로 합의해서 침대까지 갔다 하더라도 마지막 삽입의 순간 거부했음에도 그에 응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강간이다. 여관까지 따라갔다 할지라도 전혀 할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싫다고 말했다면 강간이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동의를 추정할 수 있는
어떠한 행위를 했느냐가 아니다. 거부의 말과 행동을 분명히 보였으며, 그러한 거부의 말과 행동을 할 수 없도록 강제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의 강간의 의미다.
문제는 이러한 세계적인 변화가 우리와는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싫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싫은 것이다? 우리나라 사법부에서는 결코 그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여관까지 갔으면 그것은 화간이다. 인사불성이 되어
있어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으면 화간이다. "싫다." "아니다."라고 하는 피해자의 거부의사가 중요한 것이 아닌, 가해자가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강간죄에 대한 사법체계는 딱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다. 남성의 성욕을 긍정하고 전제하며, 여성을
그 객체로서 두는. 그래서 남성이 성욕을 스스로 억제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 그 성욕을 유발하지 않도록 책임을 지우는 딱 그
수준이다. 그래서 여성의 옷차림이 어떻고, 평소 행실이 어떻고 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심지어 처녀인지 아닌지까지 물어볼
정도로.
그런 나라이다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성추행범은 처벌받아도 강간범은 무죄로 풀려난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주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정신지체아 의붓딸을 강간한 아비더러 피해를 당한 여자아이가 학교에 정상적으로 등교했다고 무죄란다. 술먹고 인사불성인 처제를 강간한
형부더러 맨정신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으니 무죄란다. 어떤 정신지체아는 임신과 낙태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고 항거불능이 아니었다고
하고.
딱 그 수준인 것이다. "오죽하면 강간당했겠냐?"고 하는. 강간당한 여성에게 정조를 잃은 책임을 물어 자살을 강요하고, 때로
명예살인을 일삼던 조선시대, 딱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 나라의 사법체계라는 것은. 이 나라의 법관이라고 하는 인간들은. 그 인간들의
강간에 대한 의식수준은 19세기, 아니 18세기 이전에 머문 채 전혀 발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21세기 한국 법조계의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법관이라고 하는 인간들은 죽어라 법전만 파고 사법고시 공부해서 법관이 된
인간들이다. 일반의 사회적 상식에 익숙해질 틈 없이 법이라고 하는 특수한 전문분야만을 공부하고 법관이라고 하는 특권계급에 편입된 인간들이다.
그들에게 사회일반의 상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앞뒤 꽉막힌 법바보들에게 무슨 일반의 당연한 상식을
요구하겠는가?
공자왈맹자왈하던 선비들이 처음부터 공자왈맹자왈만 하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선비라 하는 것은 칼도 좀 쓸 줄 알고,
활도 좀 쏠 줄 알고, 어느정도 잡기도 할 줄 아는, 살아가는 제반의 지식을 갖춘 종합지식인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논어맹자 사서오경만 외우면
입신을 할 수 있게 되니 오로지 경전 하나만을 파게 되면서 우리가 아는 고리타분한 선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법관들도 마찬가지다.
사법고시만 잘 보면 법관이 된다. 다른 것 필요없다. 다른 상식은 필요없다. 일반의 상식이라든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정의 같은 것도
필요없다. 법조문과 그 법조문을 해석해 적용하는 법관의 권위만이 전부다. 법바보들. 법청맹과니들. 말 그대로 덜떨어진 엘리트집단이라고나 할까?
강간피해자에게 피해의 책임을 묻는 사법기관의 현재는 그 결과일 것이고.
하긴 법관만 탓할 일도 아니다. 일반인들은 안 그런가?
강간을 저지른 놈과 강간피해를 당한 사람이 있으면 강간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더 비난과 조롱을 퍼부어대는 것이 우리 사회다. 강간을 저지른 놈은
큰소리치고 다니고, 강간의 피해를 입은 사람은 죄지은 양 숨어서 숨죽여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니 저따위 법관들도 나오는
것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모두 똑같은 인간들인 걸.
괜히 강간발생율 1위, 강간신고율 2%의 강간공화국이 아니다. 여자들이
밤길조차 마음놓고 나다니지 못하는 사회. 여자들이 남자들과 마음놓고 어울릴 수 없는 사회. 거의 모든 남자들이 여성을 오로지 성기로만 보는,
남자인 나조차도 쪽팔리고 역겨운 사회가 이 나라를 강간공화국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짜 딸 낳아 기르기 두려운 나라.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강간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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