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요한복음 13장 8-17절)
02월 11일 (목)
섬김,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요한복음 13장 8-17절)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교회에서는 ‘섬김’이라는 말을 자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섬김’이라는 단어는 세상적인 정의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섬김’과 성경의 ‘섬김’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의 ‘섬김’은 ‘내가 양보하고, 내가 배려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한계는 ‘나’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으면, 그 때부터 그 ‘섬김’은 해야 할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섬김’은 예수님처럼 ‘내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그 길을 가야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세족식’의 장면입니다. 제자들을 씻기시면서 베드로의 체례가 되었을 때, 베드로는 “절대로”라는 말을 사용하며 거절합니다. 베드로의 거절은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발을 씻기는 것은 그 집의 가장 낮은 종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것은 두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화려하고, 경건한 예배를 드리고 많은 종교적인 헌신을 한다 하더라도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섬김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예수님이 제자들과 사람들을 섬기신 이유는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 1절에 보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섬기신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섬김’에 한계가 있는 이유는 잘 생각해 보면,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를 섬길 때, 우리는 이미 무한한 섬김으로 자녀를 섬기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온전히 섬길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예수님처럼 목숨을 다해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 안에 주님이 행하시면 가능합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진정한 사랑으로 진정한 섬김의 자리에 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부족하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의 사랑을 우리 가운데 부어주셔서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내가 ‘섬김’을 실천해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해 보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한 가지씩 실천해 봅니다.
주님! 주님이 가신 섬김의 길을 가지 않으면, 나와 주님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두려워하게 하시고, 오늘 하루 ‘섬김’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나에게도 부어주셔서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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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앞에서 교회 욕하지 마십시오
“미국에서 교인들의 자녀 가운데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이들의 원인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 가운데 80퍼센트가 성장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 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이동원 저(著) 《블레싱》(규장, 70쪽)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일찍 미망인이 되어 시장에서 떡 장사를 하면서 힘들게 딸을 공부시킨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딸은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딸과 함께 교회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마침내 딸은 교회에 오게 되었습니 다. 어머니는 예배에 들어가고, 딸은 친교실에 있었습니다. 앉아 있 노라니 교인들이 서로 헐뜯는 이야기 돈 이야기 등 지저분한 말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배 마치고 나온 엄마에게 딸은 말했습니다. “엄마. 교회가 참 엉망이고, 저질 집단이야!” 다 들은 엄마가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교회 다니면서 주님만 봤는데, 너는 하루 교회와서 다른 것만 보았구나!” 엄마의 이 말에 딸은 고개를 숙였습니다. 완벽한 교회란 존재 하지 않습니다. 교회 또한 아직 극복해야 하는 죄 성들이 많은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 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의 핏값으로 사신 곳 이기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기대하고 힘을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 피게 하셨느니라.” (행2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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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편 5절
시편 42편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Why are you downcast, O my soul?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my G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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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 나는 이것을 소크라테스 복음이라 하는데,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이 시대의 비극이 생기는 것이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탄식과 같은 것이다. “내가 볼 때 네 가련한 것, 눈먼 것, 헐벗은 것을 너는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부자이고 나는 지식인이고, 꿈을 가지고 있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젼과 꿈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다. -이동원 목사의 ’요나서 강해‘에서-
내 자신의 벌거벗은, 눈먼, 헐벗은 추한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만나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집에 들어가자 마자 TV를 켜야 하고 책을 읽는다. 음악을 듣는다. 등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나를 만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내 적나라한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워, 자신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 음악 속으로 책 속으로, 노이즈 속으로, 브라운관 속으로 도피하는 것은 아닐까요? 시편 기자의 고백이 필요할 때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내가 가야 할 곳에 다시 한 번 나를 세워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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