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고난을 ‘위로의 능력’으로 바꾸라(고린도후서 1장 1-11절)

鶴山 徐 仁 2021. 2. 10. 12:20

고난을 ‘위로의 능력’으로 바꾸라(고린도후서 1장 1-11절)

 

 

02월 10일 (수)

   

고난을 ‘위로의 능력’으로 바꾸라(고린도후서 1장 1-11절)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며, 다른 사람들은 아무 문제나 걱정도 없이 행복한 것 같고, 

나만 힘들고 하나님이 나에게만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인생에 고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경에서 부러워하는 인물들도  많은 고난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마치 회전문 같아서 내가 어디로 나가야겠다고 결정하고 출구를 향하여 발을 

내딛지 않으면, 끝없이 돌고 도는 질문입니다. 오늘 고린도후서의 말씀에 보면 사도바울은 

그가 많은 고난가운데서도 어떻게 믿음으로 출구를 향하여 나아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 때문에 누구보다도 극심한 고난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그의 고백을 보면, 사도바울은 수많은 죽음의 위협과 감옥살이와 

태장과 채찍과 돌에 맞음 등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고난들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고난들 때문에 낙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위로를 위한 통로”였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이 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돌이켜보면,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리로 나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바울을 비롯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이 어떻게 회복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고난을 해결해 주시거나 설명해 주어서 회복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모든 만물을 운행하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안에 거할 때, 이해가 아닌 믿음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가 아닌,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7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난은 나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고난가운데 그것을 집중하고 공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이 과정 속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섰는지를 말하게 

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을 당한다.”고 말하지 않고,

“고난에 동참한다.”고 말합니다. 함께 고난을 통한 은혜를 나누기 위해 고난을 주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허락하신 “고난”을 “당하는 자”가 

아닌 “동참하는 자”로 살아가는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고난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복음이 전해진다고 믿고, 나의 삶에 있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집중하여 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나에게 허락하신 이 고난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용기를 주시고 고난의

회전문을 돌고 도는 자가 아닌, 출구를 향해 발을 내딛는 삶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리셋

 

“리셋 증후군은(중략) 현실을 가상현실과 혼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범

죄를 저질러도 그것을 컴퓨터 게임 정도로 착각합니다.‘리셋’해버리면

그만인 것쯤으로 간주해버립니다. 게임을 다시 시작하면 과거의 흔적이

말끔히 지워지듯이 현실에서도 그럴 것으로 혼동하는 것이지요.”

 

정균승 저(著) 《내가 나로 살아가는 이유》 (터닝 포인트, 158-15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1997년 5월 일본 고베시에서의 초등학생 토막살인 사건은 세계를 경악케

했습니다.  희생자의 신체 일부와 함께 이런 쪽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자, 게임이 시작되었다. 미련한 경찰 여러분,나를 좀 멈춰줘. 나는

살인이 즐거워 견딜 수 없어”

범인은 놀랍게도 14세 중학생이었습니다. 그가 컴퓨터 게임광이었다는

사실이 알려 지면서 ‘리셋(Reset)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퍼지게 되었

습니다. 리셋 증후군은 컴퓨터가 느려지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리셋 버튼만 누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현실 세계에

서도‘리셋’이 가능할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리셋 증후군은 국내에선 1990년대 말부터 경찰 백서에 등장하기 시작

했고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에서는 이를 게임 중독,주식중독,

음란물 중독처럼 인터넷 중독의 한 유형으로 꼽았습니다.

리셋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넘어졌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용기를 내는 데는 마음의 리셋이 필요합니다.

‘회복 탄력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패하고 좌절하는 체험을 하

지만 다시 힘을 내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불굴의 의지와 기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닥에 유리를 떨어 뜨리면 깨지지만 공을 떨어

뜨리면 튀어 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성도는

넘어지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존재입니다.  

오뚝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은 아랫 중심에 무거운 추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말

씀이 있는 사람은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날아 오릅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

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잠24:16)

   

시편 42편 3절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편 42편 3절

My tears have been my food day and night, while men say to me all day long, "Where is your God?" 

Psalms 42:3

   

요나의 회개의 고백

심리학자 에이브라함 메슬러는 말하길

“사람이 죄책을 느껴야하는 상황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이것은 결코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아의 실현을 위해 한 사람이 성숙으로 인도되기 위한

필연적이고 내면적인 체험일 수 있다.” 

죄책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내게 필요한 회개의 고백은 무엇인가? 

그리고 회개의 고백은 왜 필요한 것일까?

고백이 필요한 이유는 첫째, 자신을 살리는 일이고 

둘째는 이웃을 살리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다. 

-이동원 목사의 ‘요나의 회개의 고백’에서-

 

요나가 끝내 고백하지 않았다면, 

회개, 돌이킴, 자백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나는 이 고백을 할 때 

‘이 사건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십시오”

죽음을 각오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부터 요나의 드라마는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손길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피하려고

은근히 도망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고백을 미루지 마십시오.

자신과 이웃을 살리고 결국은 주님을 높이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