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다윗의 미친 짓 (삼상 21:10-15)

鶴山 徐 仁 2020. 11. 2. 10:49

다윗의 미친 짓 (삼상 21:10-15)

 

11월 02일 (월)

   

다윗의 미친 짓 (삼상 21:10-15)

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10절).

다윗이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피신하여 보자기에 싸 제사장의 에봇과 함께 보관하던 골리앗의 칼과 거룩한 떡, 즉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진설병을 얻어 거기서 다시 급하게 이번에는 블레셋의 성읍인 <가드>로 갑니다. 

 

<가드>는 <놉>에서 남서쪽으로 약 37km 정도 떨어진 성읍으로 블레셋에게는 지정학 상 대단히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라 한 것은 당시 블레셋에게는 중앙집권적 왕이 없었고 단지 각 도시 국가를 다스리는 방백만이 있었는데 <아기스>가 바로 <가드> 지역을 통할하는 최고 권력의 방백이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굳이 <가드>로 도망간 이유는 우선 놉에서 가장 가까운 이방 성읍이었기 때문이고, 이미 다윗의 이름이 블레셋에도 잘 알려진 마당에 사울로부터 쫓겨난 신세라고 하면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환영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의 분위기는 다윗의 그런 바람과는 사뭇 다르게 돌아갔고, 따라서 다윗은 아기스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13-15절).

 

아무리 긴박한 상황에서 발휘한 기지라 해도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어쨌든 다윗은 이렇게 미치광이 연기를 통해 블레셋에서의 위기를 모면하고 벗어납니다. 그저 다윗의 임기응변과 연기력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실은 하나님이 역사하사 아기스로 하여금 <저 놈이 일부러 연기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저런 미친 사람을 해치거나 죽여서 뭐하냐?>하는 마음을 갖게 하신 겁니다. 15절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블레셋으로, 그것도 자신이 목을 벤 골리앗의 고향 <가드>로 피신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신은 다윗의 미친 사람 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편 34, 52, 56편의 표제어들을 확인하시고 다윗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쓴 시들인지를 적어 보십시오.

 

주님, 사울을 피해 놉으로 갔던 다윗이 거기서 다시 블레셋 땅 <가드>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크게 위협을 느껴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며 그 상황을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결코 떳떳하거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사 아기스의 마음을 주관하시므로 그 위기를 벗어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저희들로 하여금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결코 요동치 않는 피난처 되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의 눈을 보았는가?

 

“네가 메시아를 넘겨 주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그러자 목사는 괴로워하며 반문했습니다.

“제가 무슨 수로 그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중략) 단 한 번이라도 소년을 찾아가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면 너는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헨리 나우웬 저(著) 최원중 역(譯) 《상처 입은 치유자》

(두란노, 4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한 젊은이가 전쟁 중에 적을 피하여 한 마을에 숨어듭니다. 마을 사람

들은 그 청년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그런데 적들이 그 마을에 들이닥쳤

습니다. 청년을 내놓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을 해치겠다고 합니다. 마

을의 지도자인 목사님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온 백성이 망하는 것

보다 낫다.” 성경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청년이 숨은 곳을

알려 줍니다. 청년은 적들에게 넘겨지고,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날 밤 천사가 그를 찾아와서 말합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네가 넘긴 청년은 메시야였다.”

“그가 메시야였다니요?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합니다. “그 젊은이를 찾아가서 그의 눈을 들여다 보

았다면 너는 알았을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공리적,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지

말라고 말합니다. 핵심은 이 청년의 눈을 들여다 보았어야 한다는 것,

이 청년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을 때, 아마도 바리새인을 고르면 제일 좋을 것

입니다. 이들은 명문가 출신이었고,학문적인 훈련도 받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 중에서 제

자를 뽑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웃의 얼굴도 눈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와 원칙 속에서 이웃을 정죄하며 살았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23:27)

   

누가복음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For nothing is impossible with God.(NIV)

   

나라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 

우리를 곤경에서 돌이켜 주신다. 

지금 국제관계가 너무 복잡하고

 나라 역시 경제 정치 등이 모두 어렵다. 

교화까지 교인들의 수가 감소하는 등

큰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최고의 재앙이다. 

이걸 모르고 교회와 믿음의 지도자들이

침묵하거나 부르짖지 않는다면 

그들은 거짓 선지자이거나 

양 떼를 악의 세력에게서 지키지 않는 

죄인일 뿐이다.

-한상진 목사의‘흥망성쇠에서-

 

그러나 이 모든 위기가 영적으로 죽어버린 

한국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으로 알고 

회개하며 부르짖는다면 

이 나라와 민족은 소망이 있습니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부르짖는다면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을 거두실 뿐 아니라 

좋은 방향에서 통일이 되게 하시고 

그때 한국을 세계 제일가는 나라로 우뚝 세워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