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우리는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외 1

鶴山 徐 仁 2016. 1. 7. 16:50

1월 7일 (목)
칼의 노래 - 겔 21:8-15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1. 그 칼을 손에 잡아 쓸 만하도록 빛나게 하되 죽이는 자의 손에 넘기기 위하여 날카롭고도 빛나게 하였도다 하셨다 하라
12. 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 이것이 내 백성에게 임하며 이스라엘 모든 고관에게 임함이로다 그들과 내 백성이 함께 칼에 넘긴 바 되었으니 너는 네 넓적다리를 칠지어다
13. 이것이 시험이라 만일 업신여기는 규가 없어지면 어찌할까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 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9-10절).

날카롭고도 빛나는 여호와의 칼의 노래입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는 그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왜 작가는 남해에 널린 섬들을 버려졌다고 생각했을까요? 뭍에서 떨어져 나간 섬들이 어쩌면 당시 이순신의 처지와도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한 문장으로도 이순신의 외로움과 슬픔이 짙게 느껴졌습니다. 소설은 봄으로 시작하여 겨울로 끝납니다. 비록 버려진 섬일지라도 꽃은 피고 또 눈은 내립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이 없었다>고 진술합니다.

오늘 본문을 예언한 에스겔 선지자의 심경이 바로 이순신 같지 않았을까요?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전하라>며 <칼의 노래>를 부르게 하신 하나님과 그 칼 앞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성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요? <부르짖어 슬피 울고 싶다>(12절)는 말씀이나 <이것이 시험이라>(13절)고 한 고백이 그 점에서 다 공감이 되고도 남습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는 이순신의 또 이런 독백이 나옵니다. <칼이 뜨거운 물건인지 차거운 물건인지를 나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렇습니다. 칼은 그것을 손에 쥔 자의 열망이어서 뜨겁고, 그 칼에 베이는 자들의 목숨을 가져가니 차갑습니다. <...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14절).

주님도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이 부른 여호와의 <칼의 노래>를 잊지 마십시오. 새해에는 늘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15절)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여호와의 칼을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성도가 되시길 빕니다.

 
   
   
 

-<칼이여 칼이여>하며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던 에스겔 선지자의 심경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칼은 강도의 손에 있으면 남을 해치는 살인의 도구지만 의사의 손에 있으면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메스가 됩니다. 여호와의 심판의 칼이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구원의 칼임을 믿으십니까?

-올 한 해 늘 여호와의 <칼의 노래>를 기억하시며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자기관리에 더욱 힘씁시다.

 
   
   
 

주님,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하신 대로 여호와의 날카로운 칼 앞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보며 이 시대 저희로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허락하신 이 새해에는 부르짖으며 슬피 울 일도, <칼의 노래>를 부를 일도 없게 해주시옵소서. 심판이 아니라 축복을 누리고,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나날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요새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다.
마치 믿지 않아야 똑똑한 줄 알고 끊임없이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살면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런 끝없는 회의주의자나 모든 사실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평화도 없다.
우리가 진정 평화를 얻기 원하면 어느 지점에서
우리의 믿음이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작자 미상의 글 ‘평화를 얻는 3대 원천’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의문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런 고백이 없다면 삶은 고통과 절망으로
평화를 얻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 믿겠다고 하면
어떤 것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며 평화의 원천은 믿음입니다.

 
     
       
 

시편 31:21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Praise be to the LORD, for he showed his wonderful love to me when I was in a besieged city.

 
       
 
   
  산정현교회 김관선 목사
  불안장애
   
   

 

 

1월 6일 (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 고린도전서 10장 1-12절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면,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과거에 일어난 뼈아픈 사건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어리석은 일들을 되풀이 하면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성경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뼈아픈 사건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또 그 죄의 길을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6절과 11절, 두 번에 걸쳐서 사도 바울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본보기, 즉 Sample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6.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구체적인 예로서 8절을 보면, 민수기 2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이르러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한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여인과 음행할 뿐 아니라, 그 여인들이 믿고 있는 이방신들을 섬김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만 삼천 명이 죽었습니다.

문제는 바울 당시의 사람들은 그 범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또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서슴없이 우상 숭배하는 일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찌 바울시대 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는 죄의 문제는 역사의 물줄기를 통해서 변하지 않고서 오늘 우리에게도 흐르고 있습니다.

돈의 우상, 명예의 우상, 권력의 우상, 자녀의 우상... 우리에게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상을 찾아가서 우리의 삶의 주인의 자리를 바꾸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했던 우상에 절하는 죄에 또 다시 쓰러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경고합니다.

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오늘,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주신 성경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말고,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교만해서 자신의 뜻대로 살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 오늘 내 삶에 우상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들은 없는지 곰곰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적어봅시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앞선 것이 있다면, 오늘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일’을 시작합시다.

 
   
   
 

- 살아계신 예수님! 성경에 나오는 많은 아픈 이야기를 읽으면서 단지 과거의 이야기를 읽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 내 안에 있는 죄를 바라보면서 통곡하게 하옵소서!

-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성경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 하나 배워가는 삶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예배는 십자가를 높이 드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꺾으셨다는 것을 알고 십자가를 높이 드는 것이다.
주님의 승리의 십자가를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모두 십자가 위에 못 박았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완성된 것으로.
나의 죄를 도말하고 원래의 모습을 죽이는 과거의 일이다.
법적으로는 과거형이지만 우리는 현재형으로
이를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김승욱 목사의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나’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면에서
오늘도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야 하고 매일 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죄의 본성은 씻어주셨지만
죄의 습성은 계속되고 있으며.
죄의 꼬리는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이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늘 깨끗하고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관계적으로
나 자신을 못 박는 행위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높이 드는 예배를 통해 마귀를 꺾어야 합니다.

 
     
       
 

시편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Surely goodness and love will follow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산정현교회 김관선 목사
  남아도는 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