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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AGAIN 살수대첩 [ 9 ]

鶴山 徐 仁 2009. 3. 1. 09:24

august 의 軍史世界

 

AGAIN 살수대첩 [ 9 ]

 

 

 

국군의 몰락과 靑星의 절치부심

 

하지만 5월 말 개시된 중공군의 제2차 춘계 대공세는 국군의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지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중부전선의 가평에서 영국군에게 저지당해 1차 대공세를 실패한 중공군은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방어막이 약하다고 판단한 동부전선에 돌파구를 형성하고자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곳 전선의 대부분을 한국군이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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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에서 막혔던 중공군은 다른 곳으로 돌파를 시도합니다 ]

 

1차 대공세 당시 초전에 6사단을 패퇴시켜 재미를 보았지만 인접 미 해병 1사단, 미 24사단의 측면 방어를 뚫지 못해 돌파구를 넓히는데 실패하였고 또한 6사단을 대신한 영연방 27여단이 공세를 막아내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국군끼리 방어선을 형성한 지역을 크게 찢어 돌파구를 확대하면 결국 서부전선에도 영향을 주게 되므로 전선을 서울이남 으로 밀어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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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이 전담하고 있던 동부전선이 중공군의 새로운 목표가 됩니다 ]

 

1951년 5월 15일, 드디어 피로 얼룩진 중공군의 5월 공세가 개시 되었고 예상대로 공산군 주력은 미 10군단 우익을 맞고 있던 국군 5사단, 7사단을 밀어붙이면서 우익의 국군 3군단을 포위하여 국군 3사단, 9사단을 붕괴시켜 버립니다.  이른바 국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인 현리전투였는데 이러한 중공군의 무서운 공세를 막은 것은 이번에도 국군이 아닌 미 3사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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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은 현리에서 치욕스런 최악의 참패를 당합니다 ] 

 

리지웨이 UN군 사령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을 비롯한 UN군 수뇌부는 이처럼 계속 이어진 한심한 패전으로 더 이상 한국군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싸우다 지는 것은 용서 할 수 있지만 국군이 중공군에게 포위만 당하면 무기와 장비를 내팽겨 치고 도망가기 바쁜 행태를 계속 보이자 분노를 참을 수 없어 결국 군단장을 그 자리에서 해임함과 동시에 국군 3군단을 해체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시행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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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한 밴 플리트는 국군 3군단을 해체시켜 버립니다 ]

 

이로써 창설 이래 계속하여 선전을 하여온 국군 1군단을 제외한 모든 한국군 군단은 사라져 버렸고 그동안 국군의 자존심을 살려주고자 육군본부를 통하여 간접지휘를 하던 형태를 바꾸어 미 8군이 국군을 직접 지휘하게 됨으로써 국군의 위상이 곤두박질쳤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수모는 수차례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내 땅을 내가 지키지 못한 결과에 따른 응분의 조치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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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5월초는 국군이 가장 무기력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

 

이 무렵 사창리전투의 패배로 가평으로 집결 후 재편에 들어간 청성부대는 치욕을 가슴에 앉고 묵묵히 사단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장도영 사단장은 부하 지휘관들과 장병들에게 철저한 정신교육을 실시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아 패배를 불러왔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장병들의 정신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 분석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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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성부대는 결사의 의지를 되새기고 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

 

더욱이 자신들의 패배를 가평에서 멋있게 만회하는 영연방 27여단의 놀라운 모습을 근처에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중공군이 불어대는 꽹과리, 피리, 나팔소리는 결코 살상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하여 주입시켰으며 아무리 퇴로가 막혔어도 굳건히 방어막을 펴서 사수만 한다면 화력이 강한 아군이 결국 승리한다는 사실을 귀가 닳도록 교육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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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병들은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

 

사단장 장도영과 그의 부하들은 다시는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하였습니다.  그때 맹세문 중 일부라고 합니다. " 이 땅이 뉘 땅이며, 이 민족을 뉘라서 살릴 것인가 " 이처럼 6사단은 재편과 함께 엄청난 훈련과 정신무장을 하였습니다.  패전의 치욕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런 고된 훈련에 대해 불평불만 하는 장병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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