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굴욕의 고개 [ 1 ]

鶴山 徐 仁 2008. 6. 2. 18:47

august 의 軍史世界

 

굴욕의 고개 [ 1 ]

 

 

 

KOREA ?

 

미국이란 나라야 워낙 많은 전쟁에 참전하였으므로 웨스트포인트 같은 군사교육기관에서 전사를 가르칠 때 자국이 참전 하였던 전투사만 가지고도 Case Study 로 공부 할만한 내용이 많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강사가 바뀌어도 반드시 토론하고 넘어가는 전투가 있는데 바로 1950년 7월 경기도 오산부근에서 있었던 죽미령 전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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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육군사관학교의 행사 모습 ]

 

그 이유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기습을 당하여 머리에 혹이 난 전투가 아니라 적과 교전을 충분히 예견하고 아니 준비하고 전투를 벌였음에도 코피가 터졌던 전투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후 정확한 정보도 없이 무조건 상대를 얕잡아 보고 전투에 임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 이었던가 하는 뼈아픈 교훈을 미군에게 깨닫게 하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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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눈물을 흘린 죽미령 전투는 미군에게 두고두고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

 

The Army either learns from its history or runs the risk of repeating past mistakes on some future battlefield.  This is what General (Retired) Gordon R. Sullivan meant when he said repeatedly throughout his tour as Army Chief of Staff: " No more Task Force Smiths. "
 
미 육군 전사에 나와 있는 일부 내용인데, 두고두고 그 교훈을 얻고자하는 그들의 의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면 1950년 죽미령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 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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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미령에서 바라 본 수원의 모습 ( 1950년 7월 ) ]

 

서울을 북한에게 내준 후 한강에 방어선을 펼치고 교전하던 국군을 한국까지 직접 날아가 둘러본 맥아더는 미 정부가 1950년 6월 30일 지상군 투입결정을 내리자 지체 없이 워커 미 8군사령관에게 한국과 가장 가까운 큐슈에 주둔하고 있던 미 24사단을 출동하도록 명령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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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는 미 24사단의 참전을 지시합니다
( 1950년 6월 29일 시흥에 임시 설치 된 육본을 방문한 맥아더 ) ]

 

지금도 그렇지만 사단 급 부대가 이동 전개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투 준비가 완료된 부대의 국내 간 이동도 쉬운 것이 아닌데, 하물며 아무런 사전 준비도 하지 않은 부대가 아무리 대한해협 정도의 좁은 바다라 하여도 전투에 투입 할 준비를 갖추어 이동하는 것이 명령만 내린다고 즉각 이루어 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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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큐슈에 주둔 중이던 미 24사단이 제일 먼저 한국전에 참전합니다 ]

 

때문에 미 8군은 24사단을 34연대, 21연대, 19연대 순으로 7월 2일 ~ 7월 4일 사이에 부산에 상륙시키기로 하고,  우선 급박한 전황을 고려하여 선발대를 보내기로 합니다.  출동명령을 받은 24사단장은 사단 내에서 가장 정예인 21연대 제1대대를 선발대로 결정하고 여기에 105mm 곡사포 1개 포대를 증강시켜 대대장 이름을 따 스미스 Task Force Team ( 이하 Smith TFT ) 을 편성하여 7월 1일 항공편으로 부산에 도착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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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편으로 이동 준비 중인 Smith TFT ] 

 

하지만 이때까지도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국군이 북한군에 밀리고 있다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미군이 앞으로 상대하여야 할 북한군이 어느 정도의 병력과 장비를 갖춘 군대인지 ? 어떤 전술작전 능력을 갖추었는지 ? 한국이라는 나라의 지형은 어떤지 ? 도대체 아무런 사전 지식과 준비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KOREA ? 였던 것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