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48. "明나라를 쳐라!"

鶴山 徐 仁 2007. 4. 8. 13:35
팔만대장경 새 임금 우왕은 처음엔 정당문학 백문보(政堂文學白文寶) 등의 훈도를 받아 오직 학문에 뜻을 두더니 차차 말타기와 매 사냥 같은 오락에  재미를 붙이자 글을 싫어하고 놀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항상 그의 행동을 억제하던 태후 홍씨가 별세하자(육년  이월) 그 행동은 더욱 방자해졌을 뿐만 아니라 여색에도 눈을 뜨게 되어 여러 가지 추태를 드러내게 되었다.
 
신하들의 처첩이나 딸들 중에 용모가 반반한자가 있으면 궁중으로 불러들여 모조리 간음했고 시정 여인들 중에 눈에 드는 여인이 있으면 서슴지 않고 겁탈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예는 부왕인 공민왕의 비 안씨와의 관계이다. 안씨는 바로 지난날 공민왕이 홍륜 등 자제위를 시켜 간음케 하려고 했을  때 끝내 거절하여 욕을 면한 바로 그 여인이다.
 
정비 안씨는 우왕이 즉위한 후에도 아직 젊고 어여뻤다. 여색에 빠지기 시작한 우왕은 말하자면 모후격이 되는 안씨에게도 욕정을 품게 되었다.
 
"내 후궁에 여자들이 많지만 모후보다 더 어여쁜 여자는 볼 수 없군요."
 
이렇게 이죽거리며 하루에도 두세 차례씩이나 그 거처에  드나들었고 때로는 밤이 이슥하도록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되니 자연히 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아니, 아무리 색에 미쳤기로 어머니뻘 되는 사람한테 욕심을 낸단 말인가."
 
"그러니까 말세라는 거지."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그날도 왕은 정비 안씨의 방을 찾아갔다. 그러나 마침 병으로 누워 있기 때문에 몸단장도 못하고 머리도 헝클어진 그대로였다. 그러니 보통 때의 안씨와는 딴판으로 추하고 불결하게 보였다. 경박한 우왕은 그 꼴을 보자 이내 정이 떨어졌다.

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한 여인이 눈에  띄었다. 안씨의 동생 안숙로(安淑老)의 딸이 문병을 온 것이었다.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안처녀를 대하자 왕의 관심은 그리로 쏠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정비를 졸라대어 안처녀를 비로 삼았으니 그가 바로 현비(賢妃)다.
 
왕의 방자한 거동이 왕실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고 거기에 겸해서 권신들의 당파 싸움이 극심해지니 국운은 날로 기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당시 대륙에서는 원나라의 세력이 극도로 쇠퇴하여 마침내 북쪽으로 쫓겨나고, 그 대신 주원장(朱元璋)이 일으킨 명나라가 새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고려 조정에는 이인임, 최영 등 친원파와 정몽주, 이성계 등 친명파로 갈라져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국론이 둘로 갈라져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판인데  새로 일어난 명나라는 고려에 대해서 난처한 문제를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즉 우왕 십사년, 명은 고려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철령(鐵嶺) 이북, 이동, 이서의 땅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땅이니만치 요동관할(遼東管轄) 하에 두겠다!] 이런 통고를 해왔다.
 
이와같은 통고를 받자 친원파인  최영은 당장 들고 일어났다.
 
"명의 태도가 그렇다면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일전을 불사하겠다."
 
"철령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북에 있는 공험령(公險嶺)까지도 원래 우리 영토 안에 있는 것이니 양보할 수 없다."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는 왕과 은밀히 의논한 끝에 각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명의 요동을 치기로 작정하고 전국에 징병령을 내렸다.

가뜩이나 왜구의 침공으로 여러 해를 두고 시달릴 대로  시달린 백성들은 최영과 우왕의 처사를 대단히 원망했지만 최영은 개의치 않고 스스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우왕과 함께 평양에 출진했다가 다시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삼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총병력 삼만팔천이백여명을 이끌고 평양을 출진하도록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