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는 왕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왕명으로써 시중(侍中=首相)인 경부흥(慶復興)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副首相) 이인임(李仁任) 등을 불러들여 왕을 죽인 도적을 잡으라고 분부했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이인임도 도적이 채 도망치지 못하고 궁중에 남아 있으리라 짐작했다.
"칼에 묻은 피로 보아 힘깨나 쓰는 자가 깊이 찌른 것이니 살수(煞手)는 반드시 남자일 겁니다."
이인임은 태후께 이렇게 이뢰고는 궁중에 남아 있던 남자들을 모조리 한곳에 모아 놓았다. 그 속에는 최만생과 홍륜도 끼어 있었다.
이인임은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최만생이 서 있는 앞에서 발을 멈추고 한참 지켜 보더니 말했다.
"이게 뭐요?"
우뢰 같은 소리를 지르며 최만생의 소매를 잡았다.
"이 피는 어디서 묻힌 거냐?"
자세히 보니 최만생의 소매에 좁쌀알 만한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살수는 이놈이다. 당장에 결박하라!"
이인임이 군졸에게 명했다.
그러나 최만생은 악에 받친 소리로 외쳤다.
"과연 내손으로 왕을 죽이긴 했소. 그렇지만 나 혼자 한 짓이 아니요. 혼자 벌을 받긴 억울하오."
최만생의 말에 이인임은 다시 눈을 부라렸다.
"그렇다면 공모자는 누구냐?"
"저 자요! 바로 홍륜이요!"
최만생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홍륜의 가슴을 가리켰다.
"이놈들을 당장에 옥에 가두어라!"
두 사람은 군졸에게 끌려갔다. 순위부(巡衛府)에서 국문을 당하자 만사를 단념한 두 사람은 모든 죄를 순순히 자백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홍륜, 최만생 두 사람은 네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이 주시하는 속에 수레로 사지가 찢겨 죽고 그렇듯 위세를 떨치던 자제위들도 각각 형을 받았다.
공민왕이 승하하자 곧 후사에 관한 문제가 일어났다.
태후 홍씨(洪氏)와 시중 경부흥(慶復興)은 종친(宗親) 중에서 고르자고 주장하고, 수문하시중 이인임(李仁任)은 선왕이 미리부터 마음을 두고 있던 강녕군 우(江寧君 禑)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강녕군 우는 아명을 무니노(牟尼奴)라고 불렀는데 반야(般若)라는 여자의 소생이다. 공민왕이 아직 신돈을 총애하던 무렵, 왕은 노국공주를 추모하던 나머지 생리에는 변화를 가져왔든지 다른 여인과 접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후사가 없는데 대해서는 대단히 심려하고 있었다.
그러한 어느날, 왕은 신돈의 집에 들렸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환담을 하고 있는데 어여쁜 여종이 음식을 날라왔다. 그 여종이 바로 반야였다.
반야를 보자 왕의 마음은 이상하게 술렁거렸다. 용모가 어여쁘다거나 거동이 매혹적이거나 그런 때문이 아니었다. 오래 헤어져서 그리워하던 것을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왕은 반야의 모습에서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노국공주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왕의 마음이 동요된 것을 신돈은 이내 간파했다.
"전하, 마음에 드시오?"
은근히 묻자 공민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듭시오."
신돈은 으슥한 방으로 왕을 인도했다. 그 방에는 이미 호화로운 금침이 마련되어 있었고 좋은 향내가 가득 차 있었다. 왕이 누워 있으려니까 반야가 들어왔다. 용모도 닮았을 뿐 아니라, 신돈의 지시인지 입은 옷까지 지난날의 노국공주 그대로였다.
왕은 반야를 끌어안았다. 잊어버렸던 젊음이 다시 용솟음치며 지난날의 환희가 다시 찬란하게 회상되었다. 왕은 그 환희 속에 흠뻑 잠겼다. 그리고 그것이 절정에 이르자 "공주! 공주!" 하고 외치고 말았다.
그 후부터 왕은 신돈의 집을 찾아갈 때마다 반야와 정을 맺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반야가 입신한 것을 알자 왕은 매우 기뻐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 씨를 잉태했으므로 진정한 후사를 얻게 된 것이다.
"아들만 낳아라. 아들만 낳아 주면 내 무슨 일이든지 다 해주마."
왕은 반야의 가는 손목을 잡고 몇 번이고 맹세했다. 만삭이 되어 반야는 무사히 해산했다.
과연 옥동자였다. 왕은 아이에게 무니노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정식 후사를 삼을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신돈의 죄가 탄로되어 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무니노를 다 맡겨 둘 곳이 없어진 셈이었다. 이런 막다른 처지에 이르자 왕은 오히려 마음을 정하고 반대하는 태후를 설복하고, 이름을 우(禑)라 고친 다음 궁중에 불러들여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하고 후사를 삼았다.
그리고 반야의 소생이라하면 격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서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이라고 꾸며댔다.
이조 세종 때 정인지(鄭麟趾) 등이 편찬한 고려사에는 우가 신돈의 첩 반야의 소생이라 해서 우의 부친을 신돈이라 단정하고, 그를 왕씨세가편(王氏世家編)에 넣지 않고 열전 반역편(叛逆編)에 실려 있다. 이것은 이씨 조선의 창업을 두호하기 위한 곡필이라는 게 공론이다.
그러나 후세의 학자 이황(李滉), 송시열(宋時烈) 등은 우는 신돈의 자식이 아니라 공민왕의 실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정론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우가 만일 신돈의 자식이라면, 신돈이 반역해서 주살당한 후에 무슨 까닭으로 공민왕은 그 반역자의 소생을 후사로 삼았겠는가?
종치중에서 새 임금을 선정하자는 경부흥파와 강녕군 우를 세우자는 이인임파의 대립은 이인임파의 승리로 돌아가서 우가 마침 나이 십 세로 대통을 계승했다. 바로 제 삼십이 대 우왕(禑王)이다.
한편 우왕의 생모인 반야는 아들이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자 벅찬 꿈을 안고 때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아들이 등극하는 날이면 비록 천한 몸이기는 하지만 왕의 생모이다.
어떠한 호강도 권세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속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계산은 사뭇 빗나가고 말았다. 우왕이 후에도 궁중으로 맞아들일 눈치는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태후는 사람을 시켜 반야가 새왕의 생모라는 것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형편이었다.
반야는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때까지는 오직 아들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었지만 이제 그 아들이 아무것도 꺼릴 것 없는 지존의 몸이 되었는데 아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직접 상감을 만나봐야겠다. 태후와 대신들이 농간을 해서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거지 상감을 직접 만나보면 모자간의 정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반야는 태후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수문장은 반야를 궁중에 들여보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반야는 소리소리 질렀다.
"너희들이 어떤 놈이기에 이렇게 함부로들 구느냐? 나는 상감의 생모란 말야. 상감은 바로 내 아들이란 말이다. 어미가 아들을 만나러 왔는데 무엇 때문에 막으로 드느냐?"
반야가 하도 날뛰므로 수문장은 하는 수 없이 태후에게 보고하고 분부를 기다렸다.
"그 계집이 기어코 상감 망신을 시키는구나. 당장 이리 끌고 오너라."
태후는 크게 노하여 이렇게 분부했다. 반야는 태후 앞에 끌려갔다. 그러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통곡을 하며 소리소리 질렀다.
"태후마마께서도 자녀를 가져보신 분이라면 어머니로서의 정을 잘 아실 터인데 어쩌면 이렇듯 무정하십니까? 상감께선 틀림없이 제 몸에서 나신 분인데 어찌하여 모자의 천륜을 끊으시려 하십니까?"
태후는 당황했다. 그대로 두었다간 반야의 입에서 어떤 소리가 쏟아져 나올는지 알 수 없었다.
"저 미친 종년을 당장 옥에 가두고 대간 순위부로 하여금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이렇게 분부했다.
그 말을 듣자 반야는 더욱 발악을 했다.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마침 새로 지은 중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이구 원통해라! 하늘도 내 원통한 처지는 알고도 남으실 거요. 하늘이 아신다면 새로 지은 저 중문이 당장 무너지리라."
반야가 외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더니 요란한 벼락소리와 함께 중문이 무너져버렸다. 이것을 보자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랐으며 태후도 겁이 잔뜩 났다.
반야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어떤 괴변이 더 일어날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인옥(李仁沃) 등을 시켜 발악하는 반야를 임진강물에 던져버리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