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친명파라는 위치와 대국을 보는 관점의 차이로 요동정벌에 반대해 왔지만 왕의 명령으로 하는 수 없이 출진하게 되어 우군도통사로 임명된 것이다. 그러니 만큼 그 싸움에 마음이 내킬 리가 없었다.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을 때 더 군사를 진격시키지 않고 조민수와 의논하여 회군할 것을 왕에게 상서했다.
그러나 평양에 있던 왕과 최영이 끝내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자 마침내 뜻을 정하고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다.
"이제 상국 명나라는 날로 강성하여져서 천하를 평정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경계를 침범해서 죄를 천자에게 얻으면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나라와 백성들에게 미칠 것이다. 이러므로 내 여러 차례 상서하여 회군할 것을 간청해 보았으나 최영 등의 강압으로 상감이 허락치 않으시니 이제 상감을 둘러싸고 있는 간신들을 제거하여 나라와 백성들의 평안을 도모해야 하겠다."
이 말에 원래 전의(戰意)가 없던 여러 장수들도 즉시 찬동했다.
그리하여 삼만 대군은 예봉을 돌려 평양으로 진격하게 되니 왕과 최영은 크게 당황했다.
즉시 개경으로 돌아가서 이성계 군을 맞아 싸울 준비에 바빴으나 결국은 이성계 군에게 대패하여 최영은 사로잡혀 고봉(高峰=高陽)으로 귀양가고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갔다.
이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가 국권을 손에 쥘 큰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차차 고려조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울 야망을 품게 되었다.
최영을 쫓은 후 조민수는 좌시중이 되었고 이성계는 우시중이 되었으나 우왕을 대신해서 대통을 잇게 할 후사 문제로 두 사람은 다시 대립하게 되었다.
즉 조민수는 우왕의 아들을 세우려고 주장했고 이성계는 종설 중에서 인망 있는 인물을 택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대학자 이색(李穡)과 정비 안씨가 조민수의 의견을 지지했으므로 마침내 우왕의 아들 창(昌)을 새 임금으로 세웠으니, 그때 나이 겨우 9세였으며 그가 바로 제삼십삼 대 창왕이다.
후사 문제를 계기로 이성계와 대립되었던 조민수는 그 후 이씨 일파인 조준(趙浚)에게 탄핵되어 시골로 쫓겨 가 버렸고 그 자리에 이색이 들어 앉았으나 문무의 실권은 이미 이성계의 손에 단단히 장악되어 있었다.
큰 야망을 품게 된 이성계 일당은 날로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자파에 불리한 인물들은 가차없이 숙청했다.
前왕 우는 강화도로 쫓겨갔다가 다시 여흥(驪興=驪州)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때, 이성계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으므로 이성계 일파에겐 우왕을 없애도 좋은 핑계거리가 생겼다.
그들은 왕을 다시 강화도로 쫓았다가 또 강릉으로 옮긴 후 살해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새 임금 창왕도 같은 혈족이란 이유로 마침내 강화도로 쫓겨 갔다가 대제학 유순(柳洵)이란 사람의 손에 피살되었으니 이때 나이 겨우 십 세였다.
창왕의 뒤를 이어 영립된 왕이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이다. 공양왕은 제 이십대 신종(神宗)의 칠세손이니 일찍이 이성계가 주장한대로 종실중에서 선정된 셈이었다.
공양왕은 천성이 우유부단(優柔不斷)할 뿐 아니라 이씨 일파의 힘을 입어 왕위에 오른 만큼 이름이 임금이지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성계를 대할 때엔 감히 웃자리에서 내려다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씨 일파가 누구보다도 미워하던 강적은 최영이었다. 그러므로 고봉으로 귀양 보낸 것에 만족치 않고 창왕 원년 십이월, 조인옥(趙仁沃) 등의 상서로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최영은 원래 뛰어난 무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결한 인격자이며 애국자였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눈물을 뿌리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그 후 이씨 일파는 또 하나의 충신은 포은 정몽주를 암살했다. 이렇게 되니 이제 더 꺼릴 인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형편이었다.
'드디어 때는 왔다.'
이씨 일파에서는 이성계를 새 임금으로 옹립할 대사업을 단행했다. 즉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李芳遠)과 그 일당 조인옥,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 오십여명은 비밀히 창업의 계교를 꾸미는 한편, 역시 이씨 일파인 시중 배극렴(裵克廉) 등은 정비 안씨에게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삼도록 강요했다.
"금왕은 혼암 무덕하여 마땅히 사직을 보존하기 어려우니 만백성이 추앙하는 이시중에게 잠시 선위하심이 가한 줄로 아뢰오."
정비 안씨는 처음에는 대신들의 강요를 반대도 해 보았다. 그러나 대세가 이미 기울고 그들의 강압이 하도 심하므로 공양왕 사년 칠월 마침내 국보를 이성계에게 물려줄 것을 승낙했다.
이성계는 처음에는 왕위 계승을 사양했다. 말할 것도 없이 민심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본의와는 다른 연극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몇 차례 같은 연극을 되풀이하다가 군신의 간청에 못이긴 체하고 마침내 수창궁(壽昌宮) 정전(正殿)에서 대위를 물려 받았으니 이로써 四백七十五년 三十四왕의 고려조는 멸망하고 새나라 이씨조선(李氏朝鮮)이 세워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