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시리아는 지중해와 동양(페르샤,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즉 동과 서, 이집트-아라비아와 그리스 터키, 즉과 남과 북의 십자로상에 있었다. 이 십자로를 따라 민족과 문화가 오고가면서 충돌, 융합하였다. 그리하여 시리아를 요람으로 하여 33개 문명이 꽃을 피웠다. 문명은 피었지만 사람들은 죽어나갔다. 수많은 전쟁, 정복, 반란, 흥망이 연출된 무대였다.
사진 : 알레포의 8000년 역사가 그려낸 드라마를 지켜본 언덕 위 城砦(성채).
시리아의 남북 2대 도시는 남쪽의 다마스커스와 북쪽의 알레포이다. 거리는 서울-부산과 비슷한 350km이다. 두 도시는 ‘중단 없이 거주한 세계에서 가장 오랜 도시’라는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이다. 대략 8000년의 역사이다. 다마스커스를 출발하여 북상한, 尙美會 여행단을 태운 버스는 이틀만에 드디어 알레포로 들어갔다. 인구 약300만 명인 이 도시는 3800년 전 기록에 이미 동서, 남북무역으로 번성한 상업도시였다. 알레포는 기독교 인구가 약30%나 된다. 20세기초 터키에서 추방된 아르메니아 등 기독교도들이 이 도시로 피란 왔기 때문이다. 소련 제국이 붕괴된 이후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쪽으로부터 상인들이 옛날처럼 이 도시를 오고가면서 장사를 하고 있다.
시리아와 신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과 서의 極端이었다. 동의 신라에서 출발한 실크 로드와 스텝 루트가 지중해의 東岸인 시리아에서 끝난다. 이 무역로를 따라 신라와 시리아 사이에 물건과 사람이 오고갔음을 실증하는 것이 경주 皇南大塚(98호분)의 南墳에서 출토된 11점의 로만 글라스, 즉 유리잔들이다. 일본의 유명한 유리공예가 요시미즈 쓰네오(由水常雄)는 이 로만 글라스를 분석하고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한 395년부터 西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는 476년 사이에 시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이 사이 시리아는 東로마제국(나중에 비잔틴 제국이라 불린다) 治下에 있었다. 요시미즈씨는 이 기간에 신라와 로마 사이에 초원의 길을 따라서 문화와 인간의 교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시리아産 로만 글라스는 그 교류의 한 가지 물증일 뿐이다. 경주 계림로에서 출토한 黃金寶劍(황금보검)은 로마 영내이던 지금의 불가리아(당시는 트라키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요시미즈씨는 ‘로마文化王國新羅’라는 책도 썼다.
東로마 치하 시리아의 유리잔이 신라에 오게 된 경로는 시리아-黑海北岸-몽골초원-중국 북부-경주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라 출신인 한국인들이 비행기 편으로 대강 그 초원의 길 위를 날아와 지금 알레포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사진 : 알레포 성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식 접근로는 아랍 예술 전시장이기도 하다. 수많은 정복자들이 이 길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가거나 성앞에서 죽었다.
알레포에 대한 역사 기록은 기원 전 2000년 전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바빌론의 함무라비왕과 알레포왕이 협정을 맺어 20여개의 작은 왕국을 관할했다는 기록이 있다. 알레포는 아모르족의 왕국 얌카드의 수도였다. 예수 탄생 전 19세기 지금의 터키 지방에서 번성한 히타이족이 남하하여 알레포를 점령한다. 남쪽으로부터 이집트의 침략도 있었다. 서기 전 1200년 전엔 해양민족의 공격을 받았고, 아람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서기 전 854년부터는 아시리아 치하가 되었다. 그 뒤 알레포는 아람족, 아시리아, 칼데아족, 다시 아람족, 페르샤의 지배를 받다가 서기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군대에 점령됨으로써 그리스-로마문화권으로 들어간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알레포를 포함한 시리아와 터키, 페르샤 일대는 후계자의 한 명인 셀레쿠스 장군이 다스리게 되었다. 셀레쿠스 제국의 수도는 지금의 터키 도시 안티옥이었다. 시리아는 셀레쿠스 對 이집트를 인수한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프톨레미 제국 사이 쟁탈전의 무대가 되었다. 로마가 기원 전 1세기에 시리아를 점령하고 관할권이 기원 후 4세기부터 東로마 제국으로 넘어가면서 시리아는 기독교 문명도 흡수한다.
시리아 남쪽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은 가장 먼저 다마스커스와 알레포를 비롯한 시리아를 정복한다. 서기 636년의 일이었다.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한 움마야드 왕조가 동서양에 걸친 이슬람 대제국으로 팽창하게 된다. 100년 뒤 압바시드 왕조가 움마야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겼다. 10세기에 일시적으로 알레포는 비잔틴 제국 군대의 공격을 받아 점령되기도 했다. 이 무렵 대지진이 알레포를 파괴했다. 1124년 십자군이 알레포를 포위했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 알레포는 살라딘이 창건한, 이집트에 본부를 둔 아유비 왕조의 치하로 들어갔다.
사진 : 이 성채를 수백년간 점거하고 관리했던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紋章. 맘루크는 투르크 용병집단인데 모시던 왕을 몰아내고 왕조를 세워 중동 지역을 통치했다.
13세기 초 몽골에서 일어난 징기스칸이란 대폭풍은 1260년 알레포를 덮친다. 이집트에서 달려온 맘루크(투르크 노예용병) 기병은 몽골기마군단을 이스라엘의 아인 잘루트에서 격파하고 알레포를 수복했다. 아유비 왕조는 맘루크 왕조로 교체되고 1516년 오스만 투르크에 망할 때까지 약 260년간 알레포 등 시리아를 통치했다. 그 사이 알레포는 또 한번 몽골기마 군단의 말발굽에 짓밟힌다. 1400년 티무르의 기마군단이 알레포를 3일만에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뒤 기술자들만 골라 그들의 수도 사마라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소재)로 끌고 갔다. 티무르는 징기스칸의 후예를 자칭했다. 그의 치하에 티무르 제국은 중앙아시아, 이란, 인도북부, 지금의 터키, 시리아 일대를 점령하거나 공격했다. 中世 역사상 가장 큰 파괴와 학살을 자행했다.
동서남북 문명의 십자로에 있었던 알레포는 이런 전쟁과 지진속에서도 불사조처럼 일어났다. 무역의 힘이었다. 돈의 유혹이었다. 15세기엔 베니스 상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왔다. 1919년 알레포는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해방되자마자 곧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오스만 시절 알레포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베니스가 영사관을 따로 둘 정도로 중동의 가장 중요한 무역중심지였다.
이상의 드라마를 지켜본 것이 알레포 중심부 언덕 위에 세워진 알레포 성이었다. 도시의 역사만큼 긴 것이 이 성이다. 636년 아랍군대가 계교를 써서 이 성을 비잔틴 군대로부터 탈취한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성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성은 33m 높이의 원추형 언덕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더 높아 보인다. 너비 32m, 깊이 22m의 해자가 패여 있다. 해자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높이는 55m이다. 이 성으로 들어가는 계단식 입구는 아랍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조각품으로 장식되었다. 성안엔 궁전터, 모스크, 저수지, 감옥 등 많은 부대시설이 있다.
사진 : "시어머니를 위해 선물하세요"라고 쓴 선전문을 들고 있는 알레포 시장 상인. 이런 商魂이 戰亂과 지진속에서도 이 도시를 유지한 힘이었다.
알레포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8000년에 걸친 알레포의 도시 생명력을 짐작케 해주는 것은 성 바로 바깥에 있는 수크라고 불리는 시장이다. 카피트, 면직물들을 많이 판다. 한국 관광객들이 벌써 길을 내어놓았다. 상인들이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우리를 끌어당겼다. 한 상점에선 한글로 “시어머니에게 선물합시다”란 푯말을 내어놓았다. 상인들의 이런 힘이 바로 이 도시를 戰禍와 지진 속에서 지탱해왔을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國富論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오늘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는 것은 정육점과 빵 만드는 사람들의 好意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