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8. 王規의 亂

鶴山 徐 仁 2007. 3. 1. 22:37
팔만대장경왕건 태조의 경륜 중에서 가장 큰 실책을 든다면 여러  후궁을 둔 점과 거기서 파생되는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점일 것이다. 
 
태조가 여러 후비들에게서 낳게 한 아들은 모두 합쳐서 이십오명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태조가 생존하였을 때부터 왕자의 생모들은 자기 소생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언도 있고, 또 장자이기도 하므로 오씨부인 소생의 무(武)가 일단 왕위에 올랐으니 곧 제二대 혜종(惠宗)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후비들과 왕자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권신들의 암투가 일소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암투가 표면에 드러나게까지 되었다. 이미 왕위를 이은 무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중에서 가장 눈에 띄게 암약한 인물은 왕규(王規)였다.
 
왕규는 광주(廣州) 사람으로 일찍이 태조를 섬겨 벼슬이 대광에 이르러 조정에 세력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두 딸을 태조의 비로 삼게하여 제十五 비(妃)와 十六 비(妃)가 되었다. 그 십육비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가 곧 광주원군(廣州院君)이다. 왕규는 원래 야심이 많은 사람이라 자기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업고 일을 꾸미기로 하였다.
 
"지금 임금이 비록 태조의 유언으로 왕이 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광주원군보다 나을 게 없지 않소?"
 
하루는 자기 딸이며 광주원군이 생모인 소광주부인을 만나서 은밀히 말을 꺼냈다.
 
"그래서요?"
 
소광주부인은 친정아버지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본다.
 
"그러니 말이요,  내 손자를 임금을 삼고 우리 따님께선 태후가 되시면 얼마나 좋겠느냐 말이요."
 
"원 아버님두, 큰일 날 말씀을 하시네."
 
소광주부인은 아직 친정아버지의 참뜻을 알 수가 없어서 슬쩍 이렇게 말을 돌렸다.
 
"큰일이 나다니?  미리부터 그렇게 겁을 집어 먹을 건 없소이다."
 
"글쎄,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의 별따기가 아니예요? 지금 상감께선 한참 연세에 남달리 근력이 좋으시니 그분의  뒤를 기다리자면 오히려 이쪽이 늙어 죽어버릴 것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일을 꾸미겠다는 게 아니겠소."
 
"어떻게 꾸미신단 말씀이시오?"
 
왕규는 한층 음성을 낮추어 속삭였다.
 
"유씨부인의 두 아들을 이용해서 임금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단 말이요."
 
그제야 소광주부인의 두 눈이 야릇하게 번뜩였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전왕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일뿐더러 지금 임금을 태자로 삼을 때 은근히 겨루던 일도 있었으니까 상감도 의심하겠군요.
 
"역시 우리 따님은 총명하시단 말씀이야. 요(堯)와 소(昭)가 역모한다고 고해바치면 상감은 그 두 아우를  의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두 아우와 생모와 할아비되는 유긍달(劉兢達)까지 상감을 원망하게 될 거요. 이렇게 저희끼리 싸우는 틈을 타서 우리는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자는 거지. 어떻소?"
 
"아버님만 믿겠어요. 아버님 계략은 귀신도 곡할 지경이니까요."
 
이렇게 소광주부인과 미리 짜고 나서 왕규는 왕의 침전을 찾아 들어갔다.
 
"왕대광, 어쩐 일이시오?"
 
왕은 등극하자 만사에 부왕을 닮으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신하를 대할 때에는 마음에 들고 아니 들고 간에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상감께 긴히 사뢸 말씀이 있어서 왔사옵니다. 밤늦게 황공하옵니다."
 
"무슨 말이요?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어찌 밤낮을 가리겠소? 그래 어떠한 일이요?"
 
"사뢰기 심히 거북하오만…"하고 왕규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경과 나 사이에 거리낄 것이 무엇이요? 어서 말해 보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과연 모르겠사옵니다."
 
"…?"
 
왕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서 왕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사옵니다."
 
그리고 나서 왕의 눈치를 힐끔 살펴보았으나 왕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왕규는 약간 초조해졌다. 그래서 마침내 유씨부인 소생의 요와 소 두 형제가 역모를 하는 눈치라고 잘라 말했다.
 
"내 아우들이? 그럴 리 없지."
 
왕은 일소에 붙였다.
 
"폐하! 믿는 나무에 곰이 핀다는 말이 있습니다."
 
왕규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 걸… 그러나 경의 말은 잘 알아들었소. 짐이 더 생각해 보고 처리 하겠소."
 
왕의 침소를 나오면서 왕규는 이 계교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내가 왕을 만만히 본 것이 잘못이야. 듣는둥 마는둥 거슴츠레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으니…’
 
왕규는 가슴이 떨리었다. 왕이 두 아우를 불러 진부를 가린 다음 자기 말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난다면 자기의 신세가 어찌될 것인가 생각하니 앞일이 막막했다.
 
한편 왕은 왕대로 왕규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뒤숭숭했다. 요와 소 두 아우가 역모를 한다는 건 물론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소문이 떠돌면 왕제들 사이에 부질없는 의혹과  질시가 싹틀 것이고 그것은 또 어떠한 화를 불러일으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왕규에게는 벌을 주느니보다 차라리 후한 대접을 해서 입을 봉하고, 아우들에게는 아우들대로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사천공봉 최지몽(司天供俸 崔知夢)이 입궐하였다. 최지몽은 처음에 이름을 총진(聰進)이라 하였는데 남해 영암군(靈巖郡) 사람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한데다 온화할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총민하여 신동(神童)이란 찬사를 받았다. 
 
특히 학문을 즐기어 대광(大匡) 현일(玄一) 문하에서  수학하고 널리 경사(經史)를 섬렵하였는데 천문복서(天文卜筮)에 가장 정통하였다.
 
그의 나이 열여덟살 되던 해였다. 일찍이 왕건이 길몽을 꾸었으나 해몽하는 자가 없어서 널리 사람을 구하다가 최소년의 소문을 듣고 불러서 해몽을 시켰다.
 
그러니까 지몽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홍안을 들어 말했다.
 
"대왕께서 멀지 않아 삼한을 통합하실 길몽이옵니다."
 
그 말을 듣고 왕건이 뛸 듯이 기뻐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렇듯 아는 것이 많으니 내 곁에서 나를 도와라."
 
그리고는 웃음을 띠우며 밀헸다.
 
"가만 있자, 내가 이름을 하나 지어 줄까. 네 오늘 해몽을 잘했으니 지몽(知夢)이라 부르도록 하라."
 
그리고는 비단 여러 필을 하사하는 한편 공봉(供俸)이란 관직을 주었다. 
 
그 후부터는 수 많은 전투에도 곁을 떠나지 않게 하였으며 삼한을 통합한 후에는 고문으로 삼았다. 
 
그러한 지몽이니만치 부르지도 않았는데 입궐하였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경이 이렇듯 입궐하였으니 반드시 짐에게서 진언할 말이 있을 것인즉 서슴지 말고 말하도록 하오."
 
그런즉 지몽은 이마 위에 굳은 결의를 나타내며 말했다.
 
"신이 천문을 본즉 유성(流星)이 자미(紫微)를 범하였은즉 반드시 나라에 도적이 일어날 징조이옵니다."
 
이 말에 왕은 집히는 바가 있었다.
 
‘음, 바로 왕규가 내 아우들을 치려고 하더니 그 징조가 이렇게  나타난 모양이로구나.’
 
생각한 왕은 그 말은 하지 않고 다시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장차 어떠한 대책을 강구해야겠는고?"
 
최지몽은 잠시 궁리해 보더니 "한 나라의 안태(安泰)는 왕실의 결속에 있을까 하옵니다. 그러하온즉 왕족간의 분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로 아뢰오."
 
이리하여 왕은 왕족의 결속을 도모하는 뜻에서 의화왕후 임씨(義和王后 林氏) 소생의 공주를 소(昭)의 아내로 출가 시켰다. 말하자면 소는 임금의 아우인 동시에 사위가 된 셈이니  혈연으로 보아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셈이다.
 
왕이 왕실의 결속을 꾀하는 것을 보자 표면으로는 아무런  탄압도 받지 않았지만 왕규는 몹시 불안했다.
 
‘상감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요나 소가 왕통을 계승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지난날 내가 이간하던 일에 앙심을 품고 어떠한 보복을 할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소광주부인을 대하면 왕규는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셈이군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을 바에야 끝장을 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오히려 해를 입겠소이다."
 
왕규는 다시 흉계를 꾸미더니 자기 도당 중에서 칼 잘 쓰는 자객을 넌지시 불렀다. 그 자객은 칼만 잘 쓸 뿐 아니라 왕규가 항상 은혜를 베풀어 수족같이 부리는 젊은이였다.
 
왕규는 자객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네가 아무래도 큰일을 해야겠다."
 
"어른신네 분부시라면 어찌 물불을 가리겠습니까?"
 
왕규는 품에서 비수 한 자루를 꺼내 주었다.
 
"이것으로 목을 베야 할 사람이 있다."
 
"누구이옵니까? 그 자가?"
 
왕규가 자객의 귀에 대고 무엇인지 속삭이자 자객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어찌 감히 그런 짓을…"
 
망설이는 자객을 왕규는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 보았다.
 
"내 뜻을 거역하겠단 말이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너무 엄청난 일이어서…"
 
"똑바로 듣거라. 내 이미 너에게 비밀을 말한 이상 이 일을 중단한다면 네 입에서 장차 어떤 말이 샐는지 알 수 없단 말이야. 그렇게 되면 내 몸은 이미 죽은 몸이니 그럴 바에야  너와 너의 가족을 몰살하여 화근을 끊을 수밖에 없다."
 
왕규가 이렇게 잘라 말하자 그제서야 자객은 "분부대로 하오리라.  염려 마십시오."하고 비수를 품은 채 밖으로 나갔다. 
 
그날 밤이었다. 왕이 고이 잠들어 있는 침전에 장막을 헤치고 검은  그림자가 잠입했다. 그러나 왕은 그것도 모르는지 코만 골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한 걸음 두 걸음 왕에게로 다가갔다. 왕은 역시 모르는 것 같았다. 검은 그림자는 마침내 왕의 머리맡까지 다가가서 비수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높이 들고 한숨에 왕의 목줄기를 향해 내리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왕의 코고는 소리가 뚝 그치더니 손을 들어 괴한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어떤 놈이냐?"
 
괴한은 그래도 끝내 왕을 해치려고 발악을 했다. 
 
왕은 한 손으로는 괴한의 손목을 잡고 한 손으로는 괴한의 가슴을 힘껏 쥐어질렀다. 일찍이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치던 솜씨였다. 괴한은 저만큼 굴러 떨어졌다.
 
이날 초저녁, 왕은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 부왕이 나타나더니 "무야, 네 신변에 위태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니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라."하고 이르는 것이었다.
 
그 꿈을 꾸자 즉시 잠이 깬 왕은 그날밤에라도 어떠한 변이 일어날까 염려되어 일부러 코만 골아 괴한의 칼날을 무디게 하였다.
 
침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난 후에야 밖에서 경비하던 시신들이 뛰어 들어왔다.
 
"폐하! 어쩐 일이시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도적이 들어왔기에 때려눕혔으니 멀리 내다가 목을 베도록 하라."
 
왕은 호방하게 웃었다.
 
"도적의 정체도 밝히지 않으시고 죽여버리란 말씀이옵니까?"
 
한 시신이 물었다.
 
"조그만 도적의 정체는 밝혀 무엇하느냐? 공연한 연루자만 만들어 오히려 화근이 될 것인즉 아무 말 말고 시행하라."
 
왕은 그 자객이 왕규의 도당이라는 것은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이번에도 그 허물을 밝히지 않고 지내버렸다. 
 
어디까지나 왕규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한 너그러운 처사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음 화근을 불러 일으켰다.
 
"에이, 바보 같은 놈."
 
자객이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왕규는 낯을 붉히고 주먹을 휘둘렀다.
 
"인제 별 수 없어. 내 직접 무리들을 거느리고 단번에 결판을 내고 말리라."
 
그리고는 은밀히 심복을 모아 일을 꾸미는 한편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왕규의 흉계는 은밀히 진행되었으나 이미 두 번이나 왕을 해치려 한 전과가 있으므로 자연히 뜻 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왕규의 동정을 주시한 것은 최지몽이었다. 왕규의 문하에 드나드는 무인 중에는 지난날 지몽의 은혜를 입은 젊은이가 있었다. 
 
하루는 지몽이 그 젊은이를 조용히 불렀다.
 
"자네 요즈음 끔찍한 일에 가담하고 있는 모양이더군."
 
왕규가 반드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넘겨짚고 한 말이었다. 그랬더니 젊은이는 이내 안색이 창백해지며 물었다.
 
"어르신네께서는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지몽은 껄껄 웃으며 되물었다.
 
"이 사람아. 내가 천문지리에 통달할 뿐 아니라, 복술에도 정통해서 앞일을 알아 맞추기 귀신같다는 것을 모르나? 내 자네 얼굴만 보아도 자네가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쯤 환히 알 수 있단 말야. 자네 요즈음 왕대광댁에 자주 드나들지?"
 
"예, 그렇습니다."
 
젊은이의 목소리는 후들후들 떨었다.
 
"그리고 천추만대에 역적의 누명을 쓸 흉계를 꾸미고 있지?"
 
젊은이는 이젠 아무 말도 못했다.
 
"내 자네의 사람됨을 아껴서 하는 말이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모든 일을 나에게 털어놓게. 그러면 자네는 나라의 큰 화를 막게 한 공로로 오히려 후한 상을 받게 될 걸세."
 
그런즉 고지식한 젊은이는 마침내 사실을 술술 풀었다.
 
"왕공께서 지난날의 실수를 분히 여기시고 무인 수십 명을 거느리고 직접 대왕 폐하의 침전을 습격할 모양이옵니다."
 
"그래 거사는 언제쯤 한다지?"
 
"오늘밤 자시(子時)를 기해서 일제히 침전으로 돌입할 계획입니다."
 
"오늘밤 자시라? 그렇다면 벌써 날이 저물었으니 일이 몹시 위급하구나!"
 
최지몽은 즉시 말을 달려 왕궁으로 향했다.
 
이때 왕은 우연히 병을 얻어 신덕전(神德殿)에 누워 있었다. 그 자리에 뛰어든 최지몽은 숨가쁘게 아뢰다.
 
"폐하!  급히 이 자리를 옮기도록 하십시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고?"
 
병고에 시달려 수척한 얼굴을 들며 왕이 물었다.
 
"장차 이 신덕전에 큰 변이 일어날 모양이옵니다."
 
"큰 변이 일어난다? 그대 점괘에 그렇게 나타났는고?"
 
"그렇사옵니다."
 
최지몽의 점을 무엇보다도 잘 믿는 왕이기에 지몽은 이렇게 대답해 두었다.
 
사실을 밝히면 만약에 왕규가 거사를 중지하였을 경우 오히려  되잡힐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병고에 시달리는 왕의 마음을 너무 놀라게 하는 것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이라도 일찍 옮기도록 할까?"
 
"아니옵니다. 지금 당장에 옮기셔야 합니다. 변란은 오늘밤 자시에 일어날 모양입니다."
 
"점괘에 그렇게 나왔는고?"
 
"예 그러하옵니다."
 
한밤중에 병든 왕이 침실을 옮긴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지몽의 말을 믿는 왕은 즉시 중광전(重光殿)으로 자리를 옮기었다. 
 
왕이 자리를 옮긴 후에도 지몽은 신덕전에 남아 있었다. 왕규의 거동을 살피어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잡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덕전 주변이 수런수런해지더니 한쪽 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벽에 큰 구멍이 뚫리며 그 곳으로 창검을 든 무인들이 뛰어 들어왔다. 그 중에는 왕규 자신도 섞여 있었다.
 
왕규는 침전 안을 샅샅이 뒤져 보다가 임금은 이미 그 곳에 없고 최지몽이 홀로 서 있는 것을 보자 칼을 뽑아 들고 소리소리 질렀다.
 
"폐하는 어디로 옮기셨느냐?"
 
최지몽은 잠자코 서 있기만 했다.
 
"네가 바로 폐하의 침실을 옮기게 한 모양이구나."
 
그제야 최지몽은 태연자약하게 왕규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그렇소. 오늘밤 신덕전에 큰 변이 있으리란 점괘가 나왔기에 폐하께서 이곳을 뜨시도록 상주한 거요."
 
"오늘밤에 이곳에서 변란이 있으리란 괘가 나왔다?"
 
왕규는 매섭게 지몽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파안일소(破顔一笑), 시침을 뚝 따고 딴청을 부렸다.
 
"나도 마침 꿈자리가 사납기에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무리를 거느리고 폐하를 호위하러 달려온 거요.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걸 보니 공의 점괘나 내  꿈이나 다 들어맞지 않은 모양이구료."
 
그리고는 천연스럽게 무리들을 모아가지고 돌아가 버렸다. 
 
이때 왕규의 본심은 지몽을 한칼에 베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실패로 돌아간 이상 지몽을 죽인다면 오히려 죽인다면 자기의 흉계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셈이 되므로 분함을 누르고 그런 연극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