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안 나라의 기틀은 제법 공고해직 성종의 치적은 볼 만한 바도 있었으나 목종이 등극하자, 겨우 십팔세란 어린 나이였으므로 그의 생모 헌애태후 황보씨(獻哀太后 皇甫氏)가 천추전(千秋殿)에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흔히 부르기를 천추태후하고 하였다. 천추태후는 태조의 아들 욱(旭)의 딸로서 제五대 경종의 왕후였다.
일찍이 경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소생 송(誦=즉 후의 穆宗)은 아직 두 살밖에 안 되는 갓난아이였으므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숙부가 되는 성종이 등극하였다가 성종 또한 십육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대통을 잇게 된 것이다.
태후가 정권을 잡게 되자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심복이 되어 보필해 줄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을 물색하자니 우선 생각나는 것이 김치양(金致陽)이었다.
김치양은 동주(洞州)사람인데 태후와는 외척(外戚)이 될 뿐 아니라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독수공방(獨守空房)의 외로움에 애태우던 태후와 은밀히 정을 통하던 옛 애인이기도 했다.
그때 치양은 속세의 몸으로는 태후가 거처하는 천추전에 드나들 수 없었으므로 머리를 깎고 중의 차림으로 드나들며 갖은 음탕한 짓을 다하였다. 비록 중의 행색을 하기는 하였지만 어엿한 남자였다. 추문은 자자하게 돌아 성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뭐하고? 김치양이 천추전에서 추잡한 짓을 한다?"
근엄한 성종은 진노하였다.
"고이얀 놈이로다. 김치양을 멀리 귀양 보내도록 하라."
김치양이 멀리 귀양을 가자 태후는 밤마다 그리움에 몸부림쳤다. 그러나 임금의 엄명이니 태후로서도 어찌 하는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뜻밖에도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자기가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 무엇보다 먼저 애인 김치양을 불러올리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태후의 극진하신 정으로 이렇듯 다시 모시게 되었으니 이 기쁨 무어라 형언할 수 없소이다."
김치양은 천추전에 들어오자 태후 앞에 굻어 엎드려 이렇게 인사치레를 했다.
그러자 태후는 눈짓으로 시녀들을 물러가게 한 후 은근한 목소리로 "여보시오. 우리 사이기 어떤 사이라고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오." 이렇게 말하는데 태후의 두눈은 축적된 욕정에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하오나 오늘의 태후는 지난날의 태후가 아니시라, 생살지권(生殺之權)을 한손에 쥐신 어른이신데 어찌 감히 불칙한 생각을 가질 수 있으리오?"
김치양은 유들유들하게 지껄였다. 치양이 상경하면 이렇게도 하리라, 저렇게도 하리라, 온갖 야한 공상을 하며 무르익은 육체를 달래 온 태후였다. 겉치레 인사같은 건 제쳐놓고 어서 빨리 뜨거운 섹스만이 아쉬운 몸이었다.
그러기에 체모를 차린답시고 유들거리는 꼴이 오히려 짜증이 났다.
"김공, 그대는 나를 놀리는 거요?"
태후는 일부러 매서운 눈초리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물기 있는 그 눈에 추파가 너울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공하옵니다. 흐흐흐…"
치양도 음탕한 웃음소리로 답하며 태후의 몸을 은근히 훑는다.
"잔말 말고 어서 내 뒤를 따라와요."
태후는 앞장을 서서 침실로 들어갔다. 그 뒤를 치양은 일부러 허리를 굽신거리며 따랐다. 침실에는 이미 향기가 그윽하고 두 사람의 향락을 위한 온갖 준비가 갖추어 있었다.
"김공, 어서"
먼저 침상에 올라가 누운 태후는 손을 허우적거리고 발을 구르면서 재촉을 했다.
"예, 예… 이거, 황공해서…"
그러면서도 치양은 벌써 알몸뚱이가 되어 태후의 몸 위로 잽싸게 올라탔다.
태후는 자기 정부인 김치양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싶었지만 남의 이목도 있고 하여 우선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이란 관직을 주었다.
즉, 임금이 평시에 거처하는 편전(便殿)의 앞문을 관리하는 직책이니 궁궐 안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공적으로 부여한 셈이었다.
그러나 김치양은 원래 야심이 강한 사나이였다. 그가 태후에게 접근한 것도 단순히 애정이나 정욕만이 아니라, 보다 더 큰 목적은 권세를 잡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궁궐 안에 세력을 부식하자, 보다 높은 관직을 탐냈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태후 마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마의 체통이 서실 것 같지 않사옵니다."
"갑자기 왜 또 그런 소리를 하오?"
"나라의 어른이신 상감의 모후이실 뿐더러, 수렴청정하시며 나라의 대소사를 주름잡으시는 어른이 일개 합문통사사인과 정을 나누신다면 될 말이옵니까?"
그 말에 태후는 요염히 웃으며 말했다.
"알겠소. 벼슬을 올려 달라는 말아구료. 어떤 벼슬이 좋겠소?"
"위인이 워낙 불민해서 큰 벼슬이야 바랄 수 있겠사옵니까마는 우복야(右僕射)나 삼사사(三司事)쯤이면 이 사람에게도 과하지 않을 것 같나이다."
치양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우복야는 상서성(尙書省)에 소속된 정이품(正二品) 벼슬인데, 상서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고려 때 삼성의 하나로서 백관을 모두 관할하던 관청이었다.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육부가 이에 소속되었으니 행정의 모든 일을 다 장악하는 요직이었다. 그리고 삼사사(三司事)는 종일품의 관직으로서 최고의 직위일뿐더러, 국가의 전곡(錢穀)의 출납 회계를 맡아보고 있었으므로 결국 재정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렇다면 어느 한 가지만 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다 겸해 버리구료."
이리하여 치양은 마침내 우복야 겸 삼사사가 되었다. 권세를 잡으면 반드시 아첨하는 무리가 생기는 법이다.
치양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그의 집문전은 그에게 아첨하는 무리로 저자를 이룰 지경이었다.
그러나 김치양은 원래 자기 욕망을 적절히 억제할 줄 모르는 인물에 속한 모양이었다. 세도를 잡자 우선 시작한 것이 궁궐 같은 저택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고대광실에 넓고 호화로운 정원을 꾸미고 거기서 아첨하는 간신들과 질탕치듯 노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뿐만 아니라 왕이 어리고 태후가 정욕에 눈이 뒤집힌 틈을 타서 나라 일을 함부로 주물렀다. 뇌물을 많이 바치는 자, 아첨을 잘하는 자는 하루아침에 높은 관직을 따게 될 수 있는 반면 청렴고결한 인사는 가차 없이 몰아냈다.
따라서 조야의 원성이 자자했지만 그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누구 하나 반기를 드는 자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치양의 야망을 더욱 부채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천추태후가 치양의 씨를 잉태한 사실이었다.
이때, 태후는 이미 사십을 바라다보는 중년이었다.
"여보, 이 일을 어떡하면 좋지?"
임신한 사실을 치양에게 알리며 태후는 수심이 가득했다.
"어떡하다니요? 귀하신 아긴데 순산해야지요."
치양은 당연지사이듯 요렇게 뻔뻔스럽게 뱉었다.
"이 나이에 아이를 낳다니…"
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연치가 뭔 문제요? 한 나라의 사직이 좌우될 수도 있는 문제이외다."
"그건 또 무슨 뜻이요?"
"그 아기가 남아라면 장차 대통을 계승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니요?"
"대통을 계승하다니? 상감이 아직 새파랗게 젊은 신데 꿈같은 소리 마시오."
"어찌 꿈같은 소리라 하시오? 수(壽)는 반드시 연치와 관계있는 것이 아니외다. 태조대왕을 제외하고는 역대로 모두 수하지 못하신 편이 아니오? 혜종은 삼십칠 세에 승하하셨고 정종은 이십칠 세, 경종은 이십육 세에 승하하셨으니 상감인들 장수한다고 누가 장담하겠소? 게다가 상감께선 아직 대통을 이을 왕자가 없지 않소? 그러니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순산하시어야 하오."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홀몸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조야(朝野)의 이목도 있고 하니…
"그러니까 은밀히 일을 치르면 될 거 아니겠소. 마침 시왕사(十王寺)가 가장 조용하니 그곳에 행차하시어 순산할 때를 기다리시는 게 좋을 듯 하외다."
시왕사는 궁성 서북쪽에 세운 절인데 김치양은 그 곳에 자기가 일찍이 중 노릇을 할 때 사귀던 심복들을 두었다. 그러므로 그 곳에서 순산을 하게 된다면 태후의 추문도 누설될 염려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후 만삭이 되어 태후는 순산을 했는데 김치양이 바라던 대로 옥동자였다. 태후는 물론이고 김치양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흐흐흐… 이제야말로 내 세상이 오려나보다.’
김치양은 태후가 임신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은근히 딴 뜻을 품고 있었다. 태후가 낳는 아기가 남아라면 지금 임금을 폐하고 그 아기를 대신 왕위에 올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정말로 남아를 낳았다. 그러니 음모를 구체적으로 실행할 단계가 된 것이다. 왕을 없애는 일중에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왕이 자연스럽게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하는 방법이었다.
김치양은 원래 미신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착수한 방법이 주술(呪術)을 쓰는 방법이었다. 치양은 나무에 왕의 형상을 조각한 다음, 그 가슴을 비수로 찌르면서 주문을 외어 보았다. 그 목상(木像)과 같이 왕의 가슴에 칼 끝이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때마침 그 곳에 들어온 태후에게 들키고 말았다.
"여보, 그게 무슨 짓이요?"
아무리 치양에게 정신을 빼앗긴 태후였지만 자기가 낳은 왕을 주살(呪殺)시키고자 하는 것을 보고는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뭐 그렇게 노할 것 까지는 없지 않소? 이 자가 빨리 없어져야 우리 귀여운 아기가 대통을 이을 게 아니요?"
치양은 유들유들하게 말하며 태후를 건너다보았다. 태후는 더욱 불쾌했다. 그러나 치양의 흉계를 꺾기에는 이미 너무나 깊이 그의 술책에 말려들어간 몸이었다.
그래서 슬며시 이렇게 말해 보았다.
"영감도 참 우둔하시구료. 상감의 형상을 새겨놓고 그 짓을 하다가 누가 보면 큰 일이 아니요? 상감을 주살하려고 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물을 남기는 셈이니 그런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겠소? 무슨 딴 방법을 강구해 보도록 하시오."
치양은 아직도 태후가 왕을 두둔하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태후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므로 방법을 바꾸었다.
김치양은 어디서인지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잡아왔다. 그리고는 그 고양이를 시왕전 대들보에 길게 매달아 놓고 밤이 이슥하자 그 앞에 나타났다.
"요놈아! 네가 바로 상감이다."
그러니까 고양이는 "냐아옹…"하며 대답을 했다.
끈에 묶여 매달렸기 때문에 몸이 불편해서 지른 소리겠지만 그 소리를 듣자 김치양은 입이 딱 벌어졌다.
"옳지, 옳지! 잘 알아듣는군. 너는 바로 지금 임금 자리에 앉은 송이란 놈이야."
그러더니 이번에는 품에서 굵은 바늘 한 개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그 바늘로 고양이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고양이는 괴로워서 몸부림을 치며 냥냥 거렸다.
"어떠냐, 송아! 아파 죽겠지?"
고양이의 몸에서는 피가 나기 시작했다.
"옳지, 옳지! 피가 나야지. 네 몸의 피가 다빠져서 말러 죽어야지. 그래야만 한단 말이야. 그래야만 우리 귀여운 아기가 네 자리를 대신 차지하지."
음산한 불전 속에서 치양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잔인한 주술을 쓰며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주살하려는 대상이 있을 때, 짐승을 그 대상으로 간주하고 괴롭히면 대상이 된 본인도 따라서 괴로워한다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미신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 나라를 뒤엎겠다는 모사가 그것을 정말로 믿고 실행에 옮긴 것을 보니 김치양은 결코 악한 일이나마 큰 일을 할 인물이 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김치양의 주술은 아무런 성공도 거두지 못하였다. 고양이는 김치양이 바라던대로 대들보에 매달린 채 피를 흘리고 말라 죽었지만, 왕은 그와 반대로 잔병 하나 앓는 일 없이 산야를 달리며 사냥을 일삼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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