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7. 訓要十條

鶴山 徐 仁 2007. 3. 1. 22:34
팔만대장경태조가 등극한지도 어느덧 스무여섯 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육십칠세, 한낱 무장(武將)의 아들로 태어나 삼국을 통일하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적(私的)으로도 많은 후비를 거느리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으니 유감없는 평생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세출(不世出)의 영웅도 가차 없이 다가오는 하늘이 내린 수명만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나이 예순일곱이라…"
 
만물이 소생하는 삼월의 산과 들과 초목을 바라보다가 태조는 주름잡힌 손으로 백설 같은 수염을 어루만져 본다.
 
그의 성품이 원래 순후(醇厚)한 터이므로 다른 제왕들처럼, 노쇠에 항거해 보려는 발악 같은 것은 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말의 아쉬움, 서운함, 쓸쓸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후(死後)에 대한 불안은 어찌할 수 없었다.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하더라도 이 강토와 백성들은  대대로 복되고 평화스러워야 할 텐데 과연 내 뒤를 이을 자들이 그 일을 족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태자 무는 용력이 뛰어나고 총명한 편이기는 하다. 그리고 이제 나이 삼십삼세이니 기력과 근력도 한창 왕성하여 자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의 위업을 이어가기에 부족한 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태자 무에게는 과단성이 부족한 허물이 있다. 용서할 자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처단할자는 준엄히 처단하는 점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성격이 혹시 어떤 화를 가져오지 않을는지?
 
또 한가지 염려되는 것은 지나치게 많은 후비들을 두어 그들의 소생이 왕권을 탐내어 암투를 벌이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후비를 많이 둔 것은 단순히 색을 탐한 때문만이 아니었다. 말썽을 일으킬 중신 거물들을 혈연이란 굴레 속에 얽어 넣어 한데 뭉치게 하려는 계략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니 그것이 오히려 분쟁의 씨가 될 염려도 된다.
 
이때부터 왕은 깊은 밤이면 잠을 이루지 않고 친히 붓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즉 대대로 군신들이 지켜 나가야 할 훈요(訓要)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태조 이십육년 사월, 
 
무장인 태조로서는 심혈을 기울인 훈요십조(訓要十條)가 완성되었다. 
 
다듬고 다듬어서 이제는 더 보태고 빼고 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라 느껴졌다.
 
태조는 피곤한 얼굴에 회심의 미소를 띠우며 붓을 던지더니 대광 박술희(大匡朴述希)를 내전으로 불러 들였다.
 
"내 경에게 단단히 전해 줄 것이 있소."
 
"무엇이옵니까? 폐하."
 
"바로 이것이요."하면서 왕은 두루마리 한 뭉치를 내주었다.
 
"짐이 듣건대 순(舜)임금은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짓다가 요(堯)임금의 선위(禪位)를 받았다 하며, 한고조(漢高祖)는 패택(沛澤)에서 일어나 나라를 세웠다고 하지 않는가? 짐도 또한 미미한 백성의 몸으로 일어나 만민의 추대를 받아 나라를 세우고 노심초사 십구년,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였으나, 나라를 세운지 스무다섯해, 몸은 이미 늙어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터이구료. 다만 염려되는 바는 후사(後嗣)들이 처신을 방종히 하고 강기(綱紀)를 문란시킬까 하는 점이요.  그러기에 훈요를 지어 후사들에게 전하니 앞으로는 조석으로 펴보며 오래오래 귀감(龜鑑)으로 삼도록 하오."
 
그리고 이때 태조가 친히 써준 훈요십조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一, 이 나라의 대업(大業)은 제불(諸佛)이 호위(護衛)하는 힘이 바탕이 되는 까닭으로 선교(禪敎) 사원(寺院)을 창건하고 주지(住持), 분수사(焚修使)를 두어 그들로 하여금 각각 그 업을 다스리게  하였더니라. 그러나 후세에 간신(姦臣)이 정권을 잡아 중들과 결탁하고 각 사사(寺社)가 서로 다투게 될 염려가  있으니 마땅히 이를 경계할 지어다.
 
二,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개창(開創)한 바라.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정(占定)한 곳 아닌 땅에  망령되어 창건하면 지덕(知德)이 손박되어 조업(祖業)이 오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짐은 후세에 국왕(國王), 공후(公候), 후비(后妃), 조신(朝臣)들이 각각 원당(願當)이라 칭하여 함부로 창건할까 염려하는 바이다. 신라 말엽에도 부도(浮屠)들이 사원을 다투어 세워 지덕을 손상한 나머지 망하였으니 어찌 경계치 않으리오.
 
三, 전국(傳國)은 적자손(嫡子孫)으로 함이 비록 상례이나, 단주(丹朱)가 불초하자 요(堯)는 순(舜)에게 선위(禪位)하였으니 이는 바로 공심(公心)이라. 만약 원자(元子)가 불초하면 그 차자(次子)에게, 그도 불초하면 그 형제 중에서 중심(衆心)이 받드는 자로 하여금 대통(大統)을 계승토록 하라.
 
四, 우리 동방은 오직 옛 당풍(唐風)을 본받아 문물예악(文物禮樂)이 모두 그 제도를 따랐더니라. 그러나 본시 고장이 다르면 사람들의 성품 또한 반드시 같지 않으니라. 글안(契丹)은 금수의 나라로 그 풍속도, 말도 같지 않고 의관제도(衣冠制度)도 다르니 이를 본받지 말지어다. 
 
五, 짐은 삼한산천(三韓山川)의 음우(陰佑)를 힘입어 대업을 이룩하였느니라.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롭고 이 나라지맥(地脈)의 근본으로 대업만대의 곳이니 마땅히 사중(四仲)을 당하면 순주(巡駐)하고 백일이 지나도록 머물러 있으면 안녕을 이룰 수 있으리라.
 
六, 짐이 원하는 바는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에 있었으니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까닭이요,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嶽), 명산대천(名山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까닭이었느리라.  후세에 간신들이 이를 가감(加減)하고자 건백(建白)하더라도 마땅히 물리칠지어다. 내 또한  당초에 맹세하기를 회일(會日)아 국기(國忌)를 범하지 않고 군신동락(君臣同樂)하리라 하였으니 마땅히 공경하여 이를 행할 지어다.
 
七, 인군(人君)으로서 신민의 마음을 얻기란 심히 어려운 일인즉 마땅히 간언(諫言)을 따르고, 참언(讒言)을 멀리 할 지어다. 간언을 따르면 성군이 될 것이요, 참언이 비록 꿀과 같으나 이를 뱉지 않으면 스스로 스러지는 법이니라. 또한 백성을 부리되 때를 가리고,  요부(妖婦)를 가볍게 하고, 농사의 어려움을 알아주면 스스로 민심을 얻고 국부민안(國富民安)하리라. 옛 사람의 말에도 [좋은 미끼를 주면 반드시 고기가 걸리고 후한 상을 내리면 반드시 뛰어난 장수를 얻게 되고, 활을 쏘면 반드시 새들이 피하게 되고 어진 정사를 하면 좋은 백성들이 모이고 상벌을 알맞게 하면 음양(陰陽)이 순조롭다] 하였느니라.
 
八,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은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모두 배역으로 향하고, 인심 또한 그러하니라. 그 하주군인(下州郡人)으로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국척(王侯國戚)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으면 혹은 나라에 변란을 일으키고 혹은 통합을 어지럽게 하고, 필로(必路)를 범하는 난이 생기리라. 또한 일찍이 그 관사(官寺)의 노비와 진역(津驛)의 잡부(雜夫)에 속하였던 자로서 혹은 권세가에 위탁하여 죽음을 면하고 혹은 왕후궁원(王侯宮院)에 접근하여 간교한 말로 국권을 농락하고 정사를 어지럽혀 재변(災變)을 일으킬 자가 반드시 있으리라. 그런즉 그 고장  양민이라도 높은 자리에 두어 쓰는 일이 없도록 할지어라.
 
九, 백벽군료(百壁郡僚)들의 녹은 나라의 대소(大小)를 보아 지정하였은즉 증감하는 일은 불가하리라. 또 옛말에 이르기를 [용로(庸勞)로서 녹을 제정하고 벼슬은 사사로이 하지 말 일이라. 만약 공이 없는 자나, 친척 친지들이 헛되이 천록(天祿)을 받으면 백성들의 원망과 비방이 그치지 않아 그 사람 또한 오래 복록을 누리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마땅히 경계할지어다. 또 강하되 악한 나라와 이웃을 삼으면 일시 편안하더라도 위태로움이 따를 것을 명심할 것이며 군사들은 마땅히 호휼(護恤)을 더하고 요역(瑤役)을 덜고 해마다 가을에는 용예(勇銳)가 뛰어난 자를 가리어 그에 따라 벼슬을 높일지어다.
 
十, 국가를 맡은 자는 항상 경계하면 근심할 바 없을 것인 즉,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옛적에 경계하던 바를 거울삼을 지어다.
 
훈요십조를 완성하자, 태조는 오랜 긴장이 풀렸던지 일시에 심신이 쇠약해져서 정사를 돌볼수 없게 되었다.
 
‘내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조용히 쉬게 될 날이 온 모양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한 태조는 재신 염상(廉相)·왕규(王規)·박수문(朴守文) 등을 가까이 불렀다. 이 자리에서 왕은 마침내 유조(遺詔)를 하였다.
 
"천하만물이 생겨나면 죽지 않는 것이 없으니 즉 죽음은 곧 천지만물의 이치인즉 어찌 이를 슬퍼하랴. 전고철왕(前古哲王)의 마음도 이와 같았으리라. 내 병들어 이순(耳順)이 지나 죽음을 보기를 돌아갈 곳으로 가는 듯하니, 어찌 이를 염려하랴. 내외의 기무(機務)로 오래 미결된 것은 경들이 태자 무와 더불어 결재하고 후에 알리도록 하라."
 
왕은 이 유조를 학사 김악(金岳)을 시켜 글로 쓰게 하였다. 
 
그리고 그 글이 작성되자 병은 더 한층 위독하였던지 말을 못한다. 이에 좌우 모든 사람이 왕의 임종이 임박한 것을 알고 목 놓아 통곡한다.
 
그런즉 왕은 다시 조용히 눈을 뜨고 물었다.
 
"어찌하여 우는 것인고?"
 
이에 왕규가 답했다.
 
"성상(聖上)께서는 백성들의 어버이신데 이제 자식된 저희를 버리고자 하시니 슬픔을 이길 수 없어 이렇듯 우나이다."
 
왕은 조용한 미소를 짓고 밀했다.
 
"뜬구름 같은 인생이란 예로부터 이런 것이야"하고는 숨을 거두었으니 태조 이십팔년 오월이었다. 
 
왕의 유명을 따라 내외 서료(庶僚)는 모두 태자 무의 처분대로 이행되고 상장원릉(喪葬園陵)의 제도는 한위이문(漢魏二文)의 고사를 따라 검소하게 행하였다.
 
이때 왕규는 왕의 평소 심원한 뜻으로 조정을 바로 잡고 상벌을 밝히고 검약을 위주로 하였으며 현량(賢良)을 등용하고 유도(儒道)를 중히 하였으므로 시호(諡號)를 신성(神聖)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조라 하고, 송악의 서쪽 기슭에 장사지낸 후, 능을 현릉(顯陵)이라 하였다. 
 
후에 익재 이제현(益齋李齊賢)은 왕건의 창업에 대하여 이런 뜻의 말을 했다.
 
"우리 태조가 궁예를 섬길 때 궁예가 강토를 넓히고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은 곧 그 밑에 있던 태조의 공이었다. 이러한 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예는 태조를 의심하여 해치려 하였으며 백성들의 마음은 태조에게로 돌아가고, 장졸들은 그를 추대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굳게 사양하였으니 그 충성된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조는 또 사람을 살리기를 즐기고,  죽이기를 꺼려하였으며 신상필빌(信賞必罰), 공신을 후히 대접하고 권위를 빌지 않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니 마땅히 떳떳한 창업이라 하겠다. 또 태조는 즉위한 후, 김부를 기꺼이 맞았으며, 견훤을 보호하는 한편 누차 서경을 순찰하였으니 그 뜻은 옛 땅을 내 집으로 삼고 들어앉자는데 있었을 것이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태조의 경륜(經綸)과 덕량(德量)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익재의 평은 비록 자기 나라 창업주를 찬양하는데 기울어진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쨌든지 왕건은 이성계(李成桂)나 기타 다른 개국 영웅에 비하여 여러모로 균형이 잡힌 인물이었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