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견훤(甄萱)이 공격해 왔고 궁예(弓裔)의 반란도 겪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당나라에 예물 보내는 것도 게을리하였으므로 형식적으로라도 종주국(宗主國) 지위에 있던 당나라 황제는 신라의 무례를 책하고 위협했다.
여왕은 그제야 국제적 친선을 회복하려고 왕자 양패(良貝)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사신에게는 예물을 주어서 보냈는데 명목이 예물이지 당나라에서는 속국(屬國)의 조공물(朝貢物)로 당연히 요구할 성질의 막대한 특산물(特産物)이었다.
이에 대해서 불평을 품은 백성들은 당나라에 조공물 보내는데 반대하고 일어섰다. 그것은 당나라가 신라를 속국 취급한다는 국가적, 민족적 의미에서 한 것이 아니고 부패한 진성여왕의 국내정치에 대한 불만의 폭발이었다.
“제 나라 백성이 탐관오리의 수탈과 흉작(凶作), 흉어(凶漁)로 다 굶어 죽게 된 판국에 여왕은 자기의 지위 유지에만 급급해서 귀중한 재산을 조공물로 보냈다. 그것으로 우선 굶어 죽어가는 빈민구제라도 하라.”
해안으로 몰려와서 양패를 비롯한 사절단 일행이 배를 타고 출국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여왕은 군대를 동원해서 사절단과 조공물을 보호해서 배에 싣고 출항시키는 동시에 모여든 백성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나 일부 어민들은 배를 타고 해적단으로 화해 버렸다.
“남의 나라 왕에게 진상하는 조공물을 해상에서 탈취하고 사절단 일행을 몰살시켜 버리자. 그러면 몇 달 후에 태풍으로 조난당한 줄 알 것이다.”
이러한 계략을 꾸민 해적단은 서해(西海) 진부(陳鳧) 섬에 진치고 입당선단(入唐船團)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오합지졸(烏合之卒)의 해적단은 사절단의 선단을 공격하려다가 호위병 궁사(弓士)들의 화살에 접근도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
“이놈들 바다 중간쯤 가다가 태풍에 침몰하든지 벼락이나 맞아 죽어라.”
해적단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이런 저주를 하면서 해안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해적의 저주가 주효(奏效)했었는지 배가 혹도 부근에 이르렀을 때 큰 풍랑을 만났다. 당황한 배는 필사적으로 배를 저어서 혹도로 피난했다. 그러나 태풍이 며칠을 계속했으므로 다시 항해를 하기는커녕 해안에 매어 둔 배까지 한 두 척씩 흘러가 버렸다. 왕자 양패는 일행을 거느리고 섬에 상륙해서 민가에 유숙하면서 바람이 자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풍랑은 언제 잔잔해질지 몰랐다. 지루하고 불안해서 유명하다는 점장이를 청해다 항해의 운수를 물었다.
“이 섬 신지(神池)에 사는 용왕에게 치성하면 태풍이 자고 항해도 안전할 것입니다.”
양패왕자는 목욕재계하고 제물을 융숭히 차려서 신지의 용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서해 혹도 신지에 계신 용왕님, 신라 왕자 아찬(阿 =벼슬이름) 양패는 진성왕의 대리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도중 서해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서 항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빨리 당나라에 가서 황제께 예물을 진상하고 양국간의 친선을 도모하고 귀국하도록 이 심한 풍랑을 재워 주시고 항해 중에 모든 재난이 없도록 배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오, 신라 사신의 정성을 알았노라.”
그런 소리가 공중에서 들리더니 못 가운데서 짚동 같은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그 후 풍랑이 차자 가라앉고 해면(海面)이 거울같이 고요해졌다.
양패왕자가 그 신복(神卜)에게 많은 돈과 비단을 예물로 주고 배에 올라 떠나려 하자 그는 다시 주위를 시켰다.
“아직도 용왕에 대한 제물이 부족합니다. 그냥 떠나시면 해중에서 또 한 번 태풍을 만나서 파선할 것입니다.”
“그럼 어떤 제물을 더 올려야 무사히 항해할 수 있소?”
“실은 차마 말씀 못하였습니다마는 수원 중 한명을 신짓가에 인질(人質)로 남겨 두고 가십시오.”
“인질로?” “예, 그러면 용신이 잡아 잡수실 것입니다.”
인자한 양패왕자도 하는 수 없이 한 명의 희생으로 수십 명의 생명을 구하려고 신복의 말에 따르려고 했다. 그러나 누구를 희생물로 지목할 수는 없었다.
“너희들 누가 희생이 되어서 일행을 구하겠느냐?”
그러자 신라 화랑도의 훈련을 받은 호위병 오십 명이 모두 지원했다.
“제비를 뽑을 것 없이 제가 제물이 되겠습니다. 저 한 목숨으로 여러 목숨을 구하면 나라에 충성이 되고 전우를 사랑하는 도리가 될 줄 아옵니다.”
죽기를 자원하는 경쟁이 벌어졌다. 신복도 그 호위병들의 의협심에 감격했다.
“기왕 모두 자원한다면 활을 제일 잘 쏘고 가장 용감한 병정이 남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만일에 경우 그 무술로 생명을 구할지도 모릅니다.”
이 말을 듣자 모두 용사로 자부하는 호위병들은 역시 자기를 뽑아 달라고 청했다.
“아아 신라의 화랑들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를 가진 신라가 위에서만 정치를 잘하면 난국을 통일하겠는데 아까운 시운입니다.”
신복은 은근히 진성여왕의 음란한 궁중생활을 비난했다. 그리고 희생자 선발은 제비로 뽑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권했다.
호위병들은 각각 나뭇조각에 자기 이름을 써서 바다에 띄우고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물 속에 가라앉은 사람이 섬에 남기로 했다. 그 결과 궁사(弓士) 거타지(居陀知)의 명패가 맨 먼저 물에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 거타지가 제일 활을 잘 쏘는 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신복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예감했다.
용사 거타지는 혼자 섬에 남으면서 일동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사신 왕자님을 비롯한 여러분, 제 걱정은 마시고 평온한 항해를 하셔서 임무를 수행하십시오. 저는 죽어서 충성이 될 경우에는 즐겁게 죽을 것이오, 혹은 사는 길이 충성일 경우에는 싸워서라도 이기고 반드시 살 것입니다.”
전우들은 일단 희생물로 결정된 거타지가 혼자 섬에 남게 되자 감사와 함께 그를 아끼는 전우애로서 눈물을 흘렸다.
“제 목숨을 희생해서 전우를 살리려는 너야말로 신라 화랑의 모범이다. 네가 비록 운이 불길하더라도 내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면 용사비를 세우고 네 가족의 일생이 편히 지낼 수 있는 상을 내리게 하겠다.”
양패왕자는 거타지를 위로하고 그 공에 보답할 것을 다짐하고 당나라를 향해서 뱃길을 떠났다. 동료를 태운 배가 서쪽 지평선에 사라질 때까지 배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손을 흔들고 전송하던 거타지는 마지막 배 그림자가 사라지자 갑자기 고독감에 사로잡혀서 멍하니 바닷가 바위위에 서 있었다.
이때 인자한 얼굴의 백발노인이 홀연히 가타지 앞에 나타났다.
“아, 존장은 누구십니까?”
거타지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우선 반가웠던 것이다.
“나는 이 섬에 사는 해약(海若)이라는 불행한 늙은이요. 당신의 모습을 보니 신라 왕자의 용사 같은데 우리 가족의 운명을 구해 주시오.”
거타지에게는 그 노인의 모습이 아무래도 보통 사람 같지가 않아 보였다.
“불행한 사람을 돕는 것은 우리 화랑의 본분입니다. 제 힘으로 도울 수 있으면 영광입니다. 존장의 집은 어디십니까?”
하고는 따라 가려고 바위에서 내려왔다.
“나는 신지 물 속에 살고 있소. 그런데 악마 사미(沙彌)가 용왕을 질투하고 용왕의 신하인 우리를 저주하고 있소. 해 뜰 시각이 되면 그 사미가 날마다 와서 타라니(咤羅尼)의 주문(呪文)을 외우면 그 마력에 끌려서 우리 식구가 한 명씩 물 위로 솟아오르게 되는데, 그러면 그 놈이 무자비하게 잡아먹소. 그래서 식구가 다 희생되고 인제 딸과 나만이 남았소. 내일 아침에는 나나 딸이 또 잡혀 죽을 차례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했다.
“당신의 그 힘센 화살이면 그 사미를 쏘아 죽일 수 있을테니, 우리 부녀의 생명을 구해주시오.”
“내 재주로 해보겠습니다.” “고맙소. 그럼 내일 아침에 꼭 부탁하오.”
해약 노인은 신신당부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거타지는 그 이튿날 새벽에 신지로 가서 주위의 신림(神林) 속에 숨어서 사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동쪽 수평선이 훤해지면서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하자 과연 휙하는 소리가 나더니 공중에서 무서운 모양의 거인(巨人)이 못가로 내려왔다. 사미는 내려오자마자 주문을 외우면서 못가를 돌기 시작했다.
거타지는 큰 활에 독약 바른 활촉의 화살을 먹여서 핑하고 쏘았다. 그가 겨냥해 쏜 첫 화살은 보기 좋게 사미의 목통을 뚫었다.
“깨갱! 깽!”하고 쓰러져 죽은 거인은 꼬리가 아홉이 달린 흰 여우였다.
그 순간 해약 노인이 못 속에서 솟아올라서 거타지 앞으로 왔다. “거타지 화랑 고맙소. 이 부녀 생명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드려야 할지 모르겠소. 나의 자랑은 당신이 구해 준 딸 하나뿐인데 서해 용궁에서는 첫 째가는 미인이녀 신라 서울에 가도 계림(鷄林) 제일의 미인이 될거요. 딸 자랑 같지만 그 위에 재주가 있고 정숙한 부덕이 있으니 당신의 아내로서 내조(內助)를 할 줄 믿소. 사양 말고 신라 서울로 데리고 가서 부귀다복하고 백년해로(百年偕老)하시오.”
“…”
거타지가 어리둥절해서 대답도 하기 전에 노인은 못 속을 향해서 딸을 불렀다.
“해선(海仙)아! 해선아!”
“네.”
고운 음성의 대답과 함께 우아한 소녀가 연꽃이 피어오르듯 못 속에서 솟아올랐다. 거타지는 대번에 눈이 황홀해졌다.
“자아, 맞선을 보았으니 어떻소?”
노인은 웃으면서 물었다. 해선 소녀는 얼굴빛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귀한 따님을 저같은 자에게… 저는 그러한 자격도 없는 일개 병정에 지나지 못합니다.”
“그럼 됐네. 지금부터 내 사위니까 하게 하네. 부디 잘 데리고 가서 아껴 주게.”
그리고 장인 노인은 약혼한 한 쌍을 데리고 바닷가로 갔다. 거기는 훌륭한 배가 한 척 준비되어 있었다.
“자아 어서 이 배를 타고 사신의 배를 쫓아가게. 그러나 타국에까지 여자를 데리고 가면 지장이 있겠으니….”
노인은 딸을 해당화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지 가슴에 꽂아 주었다. “자아, 이러면 남도 모르게 가볍게 데리고 갈수 있네. 내 딸이 변한 이 해당화는 시들지도 않고 밟아도 죽지 않으니 안심하고 품에 안고 가게. 신라 서울에 가면 다시 사람으로 변할 것일세.”
“장인님,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떠나면 언제 뵙겠습니까?” “하하하 만나면 이별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그러나 저보다도 따님께서….”
“딸은 크면 낭군 따라 가는 법이다. 그럼 잘들 가거라.”
노인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인사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리고 거타지를 태운 배는 좌우에서 용이 호위하면서 끌고 갔는데 그 속도가 번개 같았다. 거타지의 배는 순식간에 사신의 선단을 쫓아갔다.
“야아, 거타지가 용이 안내하는 배를 타고 왔다. 만세!”
사신의 선단에서는 전우들이 환성을 올리면서 맞았다.
지금까지 거타지를 안내해 온 청룡(靑龍)과 황룡(黃龍)은 전체 선단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서 순식간에 당나라 항구에 닿았다. 영접 나왔던 당나라의 고관과 민중들은 신라 사신의 선단을 청룡 황룡이 호위하고 번개같이 입항(入港)하는 광경을 보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신라는 용왕도 돕는 나라다!”
사신 일행을 전의 사신 때보다도 정중히 환영했다.
당나라에서 나라의 위신을 높이고 돌아온 사신 양패왕자는 거타지의 신기한 공적을 왕에게 보고하고 큰 상금을 내리는 동시에 대장으로 승진 시켰다.
거타지는 가슴에 품고 온 해당화를 부모 앞에 놓고 말했다.
“해선이 양친께 인사 드리게.”
“순간 절세미인이 나타나서 새 며느리로서 큰 절을 올렸다.”
용궁 출신의 해선은 신라 제일의 미인이다.
이런 소문이 서울에 퍼지자 기적의 신부 구경을 오는 사람으로 거타지의 문전은 혼잡을 이루었다.
그러나 해선의 미모를 본 권력가와 부호들은 금력과 세도로 해선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여왕을 비롯한 상류계급의 풍기 문란은 유부녀를 농락하는 것이 예사로운 풍조로 아는 경향을 낳았기 때문이다.
병졸에서 하급장교로 승진한 거타지는 고관들 앞에서는 서민이나 다름없었다. 거타지는 언제 아내를 빼앗길지 모를 위기에 봉착해서 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왜 용사답지 못하게 우울한 낯을 하고 계셔요?”
해선은 남편의 고민의 이유를 물었다.
“해선이가 너무 미인이라 그렇지.”
“호호호. 그런 농도 좋으니 제발 우울한 얼굴은 보여 주지 마세요.”
“실은 해선이 너무 아름다운 것이 원망스러워.”
거타지는 다시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예요?”
“세도 부리는 고관대작이 남의 집 유부녀도 종첩을 삼는 세상이라 해선에게도 갖은 유혹이 있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 따위 유혹이나 위협에 내가 넘어가겠어요. 나는 당신의 아내로서 정조를 지킬 테니 안심하세요.”
“해선의 정절은 나도 믿어. 그러나 음란으로 타락된 세상의 더러운 꼴도 보기 싫으니 우울해질 수밖에 있어야지.” “내 염려는 말고 당신이나 조심해요. 남자만 남편 있는 여자를 유혹하는 세상이 아니라 여자도 아내 있는 남자를 유혹하는 해괴한 세상이니까요.”
해선은 간접적으로 진성여왕을 비롯한 상류사회 유부녀들의 치맛바람을 경고하듯 말했다.
“해선이가 정조를 지키듯이 나도 해선에게 정조를 지킬 것을 맹세해요. 적어도 우리 부부만은 진실한 남녀의 덕을 지켜서 음란한 풍조에서 벗어납시다.”
“나보다도 당신이나 조심해요. 잘 난 남자를 침실로 잡아 가는 여왕이 언제 당신을 끌어갈지 모르니까?”
“어찌 내가 그런 유혹과 위협에 넘어가겠소. 적어도 해선의 지아비가 아니오.” 거타지와 해선 부부는 그들이 미남의 용사요, 절세의 미인이기 때문에 다 같이 정조의 위협을 받는 해괴한 세태였다.
어느날 거타지의 상관은 장군의 생일잔치를 앞두고 부하들의 아내를 그의 집으로 불러서 준비를 시켰다. 거타지의 아내 해선도 이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장군은 해선의 미모에 당장 미쳐서 손목을 잡고 골방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이 미친 개가 내 손목을 물었다!”하고 부엌칼로 행패 부리려던 장군의 가슴을 찔러서 죽여 버렸다. 이 놀라운 살인사건의 소문이 퍼지자 방탕한 남자들은 가슴이 선뜻했다. 그러나 일반 선량한 백성들은 해선의 행동을 열녀의 거울이라고 찬양하여 마지않았다.
“열녀 해선을 살인범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권력으로 유부녀의 정조를 유린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는 법을 세워라.”
학자와 승려와 양민(良民)들이 해선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러나 해선은 물론이요, 그의 남편 거타지까지도 잡혀서 옥에 갇혔다.
마침내 판결의 날이 되자 해선과 거타지는 왕 앞으로 끌려나왔다. 그러나 그들 부부를 보는 백성들은 측은히 생각하며 구원할 길을 열고자 했다.
“해선을 사하고 열녀비를 세워서 표창하라! 거타지는 명궁(名弓)의 용사요, 나라에 공을 세운 영웅이다. 미인 열녀의 남편된 것이 죄가 되느냐? 제 아내를 상관에게 바치지 않은 것이 죄란 말이냐?”
진성여왕은 해선이가 얼마나 잘난 미인이기에 계림 제일이라는 평판이 있는가 하는 흥미와 얼마나 표독한 여자이기에 구애(求愛)하는 장군을 칼로 찔러 죽였는가 진술을 들으려고 친히 해선을 불러 들였다. 그러나 여왕은 해선의 선녀같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쩌면 자렇게 절묘(絶妙)한 미인이 있을까? 나같은 여자는 저 해선에 비하면 추녀에 지나지 않는구나!’
스스로 얼굴이 붉어지는 동시에 질투까지 느꼈다. 그러나 나중에 끌려나온 해선의 남편 거타지의 얼굴과 체격을 보고서는 더욱 놀랐다.
‘내가 지금까지 데리고 논 미남자들은 저 남자에 비하면 추하고 나약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황홀한 눈으로 거타지를 보고 있는 동안에 음탕한 색정이 동해서 가슴이 타올랐다. 그래서 여왕의 귀에는 해선이가 장군을 살해한 끔직한 이야기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재판은 일단 그치고 내일로 연기되어서 그들은 또 옥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여왕은 거타지만은 궁중으로 끌어들였다.
거타지는 줄곧 음탕한 시선만 자기에게 보내고 있던 여왕이 궁중으로 불러들였으므로 앞으로 당할 광경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진수성찬(珍羞盛饌)의 저녁상을 받았으나 옥중에서 소금밥을 먹을 해선의 생각을 하고 수저도 들지 않았다. 시녀들이 권하는 술잔도 받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되자 궁중에는 큰 촛불로 휘황하여졌다. 그러나 거타지는 여왕의 요기(妖氣)와 싸울 마음만 가다듬고 있었다.
“여왕님께서 부르십니다.”
시녀가 와서 알렸다. 거타지는 침착한 표정으로 시녀를 따라갔다. 그가 안내된 방은 호화롭고 요기가 풍기는 여왕의 침실이었다. 휘황찬란한 침대에는 반나체의 여왕이 엷은 속옷만 미끄러져 내릴 듯이 걸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해 온 시녀는 문턱에서 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름이 거타지라지?”
“예.”
“오늘밤에 내 말만 잘 들으면 네 아내의 살인죄도 용서해 주겠는데 어떠냐?”
“황송하오나, 무슨 말씀이옵니까?”
“밤에 내 침실로 부른 의미는 알겠지?”
“모르겠습니다.”
거타지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나는 오늘밤만은 여왕이 아닌 여자의 몸으로 너를 대하겠는데… 해선과 같이 고운 여자하고 사는 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너 같은 남자를 처음 보았다. 내 호의를 모시하진 않겠지. 이리 와서 내 몸을 힘껏 껴안아봐라…"
여왕은 천박한 여자처럼 갖은 몸짓으로 거타지를 유혹했다.
"그러나, 여왕님…"
"오늘밤은 여왕이라고 부르지 말고… 어서 이리와!"
거타지는 여전히 부동의 자세로 서서 천정만 쳐다보고 있다가 돌연 여왕의 눈을 쏘는 듯이 훑어보았다.
“저는 남자의 정조를 단 한명의 아내에게만 바치는 남편입니다. 비록 여왕의 명령이라도 제 정조는 지켜야 할 각오입니다. 비록 목이 떨어지더라도 다른 분과 정을 통해서 정숙한 아내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천하 여자의 표본이 되실 여왕께서 이런 불의의 욕정으로 천하의 풍기를 문란케 하는 장본인이 되어서는 장차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습니다. 저를 빨리 죽이든지 무죄한 아내와 함께 석방시켜 주시든지 하십시오.”
진성여왕은 일개 궁사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리라고는 천만뜻밖이었다. 왕으로서 처음 당하는 대담한 불경한(不敬漢)이었다. 그리고 일개 여자로서도 이런 목석(木石)의 불상(佛像)같은 남자는 처음 당했던 것이다. 여왕은 이상하게도 왕으로서 또는 여자로서의 모든 권위와 자신을 일시에 잃은 듯이 풀이 푹 죽었다. 도덕적 반성보다도 인간적인 허탈감에 빠져버린 것이다. 용기를 내서 노한 호통을 치려고 해도 거타지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었다.
이때 청명하던 밤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일어났다. 여왕 침실의 창이 울리고 촛불이 훅 꺼졌다.
“여왕님, 하늘이 왜 노하셨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왕 한 분의 영욕(榮辱)과 생사(生死)보다도 저는 삼국을 통일한 이 대신라의 운명이 지금 꺼진 촛불과 같이 망할 것이 두렵습니다. 지금이라도 여왕께서 반성하고 새로운 여성으로, 새로운 임금으로 돌아가시면 신령님도 노염을 푸시고 지나간 잘못을 깨끗이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신라 나라도 백성도 다시 여왕을 중심으로 소생할 것입니다.”
거타지는 어두운 침실에서 마치 천둥의 뜻을 통역하듯이 엄연한 설교를 했다.
여왕은 죽은 듯이 말이 없다.
거타지는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밖에서 여왕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튿날 해선과 거타지는 풀려나오게 되었다. 여왕도 반성하고 우선 지금까지 허수아비처럼 내 소박한 남편에게 사과하고 정숙한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당나라 유학에서 귀국하고 나라를 걱정하던 거유(巨儒) 최치원이 올린 재무십여조(財務十餘條)의 건의(建議)도 받아들여서 인륜도덕과 국정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국교(國敎)로 되어 있던 불교세상에서 비로소 유학자(儒學者)인 최치원을 아손(阿飡) 벼슬에 등용해서 정계에서의 일체의 당파싸움을 금지했다.
그러나 거타지는 여왕의 침실에 있었던 사건을 비밀에 붙이고 여왕의 위신을 존중하는 동시에 자기의 공을 알리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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