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신라 궁중비사] 11. 眞聖女王의 愛慾三昧

鶴山 徐 仁 2007. 2. 25. 20:19
첨성대제四十九대 헌강왕(憲康王)의 삼형제는 모두 왕 노릇을 했다. 제五十대가 아우인 정강왕(定康王)이오,  제五十一대가 매제(妹弟)인 진성여왕(眞聖女王)이다.
 
여왕의 이름은 만(曼)이며 십일년 동안에 나라를 망쳐버릴 뻔했다. 여왕은 신라 여왕으로는 마지막 여왕이었는데 왕실을 음란의 소굴로 만들어서 애욕삼매(愛慾三昧)의 추문이 높았다. 그러니 국내가 어지러웠고 외적이 침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과 왕자들이 있는 여왕이 처음으로 사련(邪戀)의 손을 뻗힌 상대 남자는 유모 부호(鳧好)의 남편 위홍(魏弘)이었다.
 
위홍은 나이가 여왕보다 훨씬 많았으나 그 남성적인 정력에 혹해서 음탕한 성욕을 만족시켰다. 그렇게 되자 여왕의 총애를 육체적으로 받는 위홍은 마치 여왕의 남편 같은 세도를 부려서 당파를 만들고 국정을 제멋대로 좌우했다.
 
유모는 제 남편을 딸같이 젖을 먹여서 기른 진성여왕에게 빼앗겼으므로 질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나 왕의 권력 밑에서 불평의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못했다. 그 대신 남편 못지 않은 세도를 궁중에서 부렸다.
 
색에 미친 요사한 여왕이 유모의 남편과 간통을 하고 밤낮으로 해괴망측한 짓을 하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여왕이 유혹하더라도 각간(角干)까지 지내고 있는 위홍이 여왕을 범하고 있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요왕(妖王)과 간신(姦臣)이 애욕삼매에 빠져 있으니 나라가 잘 될 리가 있으랴.
 
귀족(貴族)에서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여왕은 조금도 반성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여왕이 즉위한 다음 해 봄에는 소량리(小梁里)에 있는 부동석(不動石)이라는 큰 바위가 저절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이것은 큰 이변(異變)이라고 세상이 놀랐다. 특히 이 바위에는 부동존(不動尊)의 불상(佛像)이 새겨져 있어서 그런 이름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부처님이 망국(亡國)을 경고하는 계시(啓示)다. 여왕과 위홍의 간신도배가 죄를 뉘우치고 정도(正道)로 돌아서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이런 종교적인 유언비어까지 돌아서 인심이 흉흉했다.
 
그러나 위홍 일당은 여론의 화살이 자기들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간신다운 흉계를 꾸몄다. 위홍은 일관(日官=길흉화복을 판단하는 궁정복술사)을 매수해서 이 부동석 이동의 점괘풀이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시켰다. 일종의 정치적 음모를 꾸민 것이다.
 
“부동석이 자리를 움직인 것은 자연스러운 음양(陰陽)의 발동이다. 이 부동석은 본래 음석(陰石)으로서 양석(陽石)과 사랑하여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지귀(地鬼)가 그 애정을 질투하고 음석을 양석과 떼어다 먼 자리에 놓고 다시는 양석 근처에 가지 못하게 중력(重力)으로 금주(禁呪)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부터 천년을 지낸 오늘까지도 부동석은 양석에 대한 애정을 잊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운 땅귀신의 금주의 중력을 물리치고 양석을 향해서 이동한 것이니 결코 불길한 징조가 아니고 세상 일이 이처럼 모두 자연의 이치대로 발전할 길한징조다.”
 
이렇게 음양론(陰陽論)을 날조하기까지 이르렀다. 그 저의(底意)는 음석인 부동석을 진성여왕에게 비유해서, 여왕이 남자를 그리워하고 애욕삼매의 향락생활을 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실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마치 땅귀신의 질투와 같이 부당하다는 것을 암시한 점괘 풀이였다.
 
여왕은 이런 점괘로 부동석의 이동을 길조(吉兆)로 푼 일관을 불러서 좀 더 현실적인 의미를 물었다.
 
“일관의 예언은 언제나 잘 맞았으니까 이번 부동석이 이변도 좋은 징조로 알겠는데, 왕운(王運)과 국운(國運)의 관계는 어떠한가? 어떤 불경(不敬)한 무리들이 내 침전(寢殿)의 사생활을 비난한다는 풍문도 있는데… 그런 점도 기탄없이 판단해 주오.”
 
여왕은 그 본능적으로 색정이 동하는 요염한 눈을 가늘게 뜨고 일관에게 물었다.
 
“황송한 말씀이오나 피도 발도 없는 돌까지도 애정을 찾아서는 움직였습니다. 더구나 인간은 귀천을 막론하고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자연의 천리(天理)올시다. 천리를 막는 것보다 더 무리한 죄는 없습니다. 그런 고로 여왕께서도 그 지존(至尊)의 권세와 천리로서 거리낌 없이 좋아하시는 남성이 있으면 자유롭게 총애(寵愛)하십시오. 만일 그 남성이 미천한 신분이라도 높은 자리의 벼슬을 시켜서 체면을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 아직 관직 대우가 낮은 분이면 올려 주시고…”
 
이것은 위홍을 더 높은 벼슬로 승진시키라는 의미까지 포함한 간사스런 꾸밈이었다. 여왕은 일관의 아첨을 그대로 믿고 위홍을 대신직인 각간(角干) 벼슬로 승진시키는 동시에 대궐 안에 살게 하고 공공연한 음란 행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깊은 정신적인 애정이 아니고 단순한 육욕의 향락으로 상대하던 위홍에게도 권태증을 느낀 젊은 여왕은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장년기를 넘은 남성의 구수한 애무에도 정력부족의 불만을 느낀 젊은 여왕은 미청년에게로 어색(漁色)의 방향을 돌렸다. 그것도 일시에 용모가 잘난 무명 청년을 여러 명 후궁에 숨겨두고 그들을 차례차례 범했다(?).
 
“너희들은 내 궁녀들이다.”
 
여왕은 그런 농담도 했다. 남자 왕이 궁녀를 많이 두고 난음(亂淫)하는 것이 상례라면 여왕은 왜 미청년들을 후궁에 두고 애욕을 만족시키지 못하랴 하는 왕자(王者)로서 당연한 주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침전에서도 능동적인 여왕은 자기를 남성의 위치에 두고 싶은 변태적 우월감에서 그 젊은 정부들을 궁녀 취급했던 것이다.
 
‘내 치맛바람에 정복되지 않는 자가 어디 있느냐. 권력으로는 물론, 미인의 매력으로도 그렇다.’
 
이런 자부심을 가진 여왕이 다스리던 그 당시의 신라는 명실공히 여인천하(女人天下)였던 것이다.
 
여왕에게 내 소박을 맞고 여왕의 침실에 출입금지를 당한 위홍은 그 불만을 여왕에게 터뜨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후궁의 궁녀로 있는 무명 미청년들을 질투하게 되었다.
 
“너희들은 무엄하게도 여왕을 유혹해서 지존의 몸을 더럽혀 드리지 말고 물러나거라. 만일 이대로 대죄를 계속하면 법으로 다스리겠다.”
 
그는 당당한 각간의 권력으로 그들을 훈계하고 위협했다. 그러나 여왕의 총애를 받는 그들에게는 각간의 위협은 코웃음 감이었다.
 
“각간도 노망했군요. 부인이 있는 당신의 몸으로는 지존의 몸을 더럽혀 드리지 않았던가요. 우리를 죄로 다스릴 법이 있으면 당신부터 자복(自服)하시오. 흥, 질투를 하려면 여왕께 하지 왜 충성된 봉사자 우리를 질투하는 거요?”
 
이론으로는 대항하지 못하게 된 위홍은 노발대발하고 칼을 뽑아서 궁녀 청년 한 명을 찔러 죽이려다가 도리어 그 청년의 칼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그 추문이 두려워서 호소할 곳도 없이 숨어서 치료했다.
 
그러나 궁중의 비밀을 아직 모르는 백성들은 위홍이 여전히 궁중에서 살고 있으므로 여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세도를 부리는 줄만 알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여왕에게 내 소박을 받은 뒤로는 그의 불평과 정력을 정적(政敵)에게 집중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홍으로는 그가 각간에게까지 올라서 세도를 부린 것은 오로지 여왕에게 육체적 총애를 받은 대가였는데 여왕에게 그 방면의 신임을 잃고 보니 정치적 세도까지 잃을 위험성이 커졌다.
 
그러므로 아직 권력의 칼을 잡고 있는 동안에 정적을 숙청해 버리려는 초조한 광증(狂症)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공포에 떠는 충신들도 최후의 방위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파쟁은 격화되었다. 이때 충신들의 대표격인 왕거인(王居仁)이 가장 용감히 위홍의 죄악을 규탄하고 있었다.
 
정계가 흉흉한 가운데 불온문서의 방이 서울 각처에 나붙었다.
 
“南無亡國 刹尼那帝… 鳧伊娑婆訶”
 
이 조정 공격의 격문(檄文)은 진성여왕과 위홍부처가 나라를 망친다는 뜻이었다. 찰니나제(刹尼那帝)는 여왕을 암시한 것, 부이(鳧伊)는 여왕의 유모 부호(鳧好)와 그 남편 위홍의 일당을 암시한 것이었다.
 
위홍은 이 기회에 그 죄를 왕거인에게 뒤집어 씨워서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위홍은 곧 왕거인의 소행으로 몰아서 왕을 욕하고 저주한 역적의 죄로 잡아 옥에 가두었다.
 
왕거인은 옥중에서 나라의 운명을 탄식하고 자기의 억울함을 시로 지어서 하늘에 호소했다.
 
 충신의 피눈물이 해를 태울 듯하나
 역적의 권세는 여름에 서릿발을 내린다.
 아아 내가 지금 억울하게 죽어가는데
 황천은 무심하게 돌아보지 않는구나.
 
왕거인이 이 시를 읊고 통곡하자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벼락이 옥을 부셔서 왕거인을 해방시켜 주었다. 왕거인은 또 위홍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산 속에 숨어서 그의 세도가 망하기를 빌면서 조정에 다시 발을 들일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거인이 숨어 있는 동안에 위홍은 전에 칼을 맞은 여왕의 젊은 정부와 싸운 끝에 또 다시 청년의 칼을 맞고 앓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여왕은 성가신 존재가 없어졌으므로 도리어 시원히 생각하고 살해한 청년의 죄는 불문에 붙였을 뿐 아니라 그 용기를 칭찬하고 더욱 사랑했다.
 
“이번에 늙은 위홍이 죽은 것은 질투의 보복이다. 너희들은 질투하지 말라. 내가 만일 남왕(男王)이라면 삼천 궁녀를 총애했을 것이다. 너희들은 질투하지 않고 나를 섬기는 것이 충성이다.”
 
여왕은 위홍의 죽음을 단지 젊은 미청년들을 훈계하는 재료로 이용하는데 지나지 않았을뿐 애처러운 빛은 조금도 없었다.
 
만일 진성여왕의 이런 음란생활이 계속됐다면 신라는 이 여왕 때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국운이 아직 남았던지 이 여왕을 애욕삼매에서 구출하는 이적(異蹟)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 장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