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사촌 누이동생으로서 이름은 승만(勝曼)이었다.
진덕여왕은 미인인데다가 글을 잘하는 재원(才媛)으로서 당나라 황제에게 지어 보낸 송가(頌歌) 태평가(太平歌)로 유명하다. 신라에도 이렇게 한시(漢詩)를 잘 짓는 여왕이 있는가 하고 당나라의 시인들을 놀라게 했다.
여왕은 태평가를 친히 지었을 뿐 아니라 손수 짠 비단에 그 태평가를 써서 보냈으므로 그것을 받은 당나라 황제는 멀리서 연모(戀慕)의 정까지 느꼈던 것이다.
자고로 미인인 재원에게는 염문(艶聞)이 따르기 마련인데 진덕여왕의 경우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진덕여왕은 불교를 독실히 믿는 터라 가끔 분황사(芬篁寺)로 유명한 자장법사(慈藏法師)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럴 때에는 왕족의 요석공주(瑤石公主)를 데리고 다녔다. 그 당시 분황사에는 원효(元曉)라는 젊은 학승(學僧)이 수도(修道)와 저작(著作)을 하고 있었다.
젊은 진덕여왕은 이 키가 후리후리한 미남자 원효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 뒤로는 분황사로 행차가 더 잦았다. 그것은 짝사랑하는 원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동행하는 요석공주도 또한 원효를 사모하였다. 진덕여왕은 천하가 자기 뜻대로 되는 임금의 권력이 있었으므로 원효 하나쯤 유혹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미혼의 여왕으로서 원효를 파계(破戒)시키고 남편으로 삼는다 하면 원효의 스승인 자장법사도 반대는 하지 못할 것이었다.
여왕은 원효를 궁중으로 자주 불러들였다. 설교를 듣겠다는 핑계로 부르는 왕명을 겨역할 수 없는 원효는 부를 때마다 궁중에 들어가서 단정한 태도로 설교만 했다. 진덕여왕의 귀에는 염불이 들리지 않고 원효를 그리워하는 마음에만 쏠려서 노골적인 추파를 자주 보냈다. 그러나 원효의 도심(道心)은 목석같이 전연 반응이 없었다. 여왕은 간장이 녹을 듯이 초조했다.
설교 장소를 침실로 정하고 불러들여도 원효는 서슴치 않고 들어가서 설교와 독경(讀經)만 했다. 아름다운 여왕의 유혹과 육체의 향기에도 그의 마음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원효”
“예.”
“독경은 그만 두고 나하고 이야기를 해요.”
“마마님, 말씀하십시오. 소승은 독경하면서 귀로 듣겠습니다.”
“내가 안 듣는 독경을 누굴 위해서 하겠소.”
“들으시지 않아도 여왕께 공덕이 됩니다. 그리고 소승 자신의 수업입니다.”
“여기는 원효가 공부하는 승방이 아니예요. 젊은 여자가 자는 분내 나는 침실이예요.”
“제가 있는 곳은 지옥의 수도장입니다.”
“어마! 내 침실을 지옥이라고!”
여왕은 발끈 화를 냈다. 그러나 사랑에 애타는 여왕은 마침내 노여움 대신 애원의 고백을 했다.
“원효, 내가 얼마나 원효를 사모하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요. 알면서도 내가 싫어서 냉정한거요? 아마 요석공주 침실에서 이렇게 밤에 단둘이 있으면 그렇게 목석같이 굴지는 않을 걸.”
“여왕님 소승은 온 생명을 불도에 바친 불제자올시다. 남녀간의 애정문제는 소승에게는 인연이 없습니다. 요석공주가 소승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제가 알 바도 아닙니다. 요석공주 말씀은 당치도 않은 오해이십니다.” 그러나 요석공주도 원효를 짝사랑하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여왕은 역시 여자다운 질투가 없을 수 없었다. 자기처럼 공공연히 불러다가 침실에서 유혹할 자유도 없는 공주의 입장도 알았으나 아무리 짝사랑일지라도 요석공주와 같은 경쟁자가 있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원효, 중으로 파계당하는 것이 그렇게 두려워요. 내가 자장법사에게 말해서 명예의 환속(還俗)을 시키겠어요?”
“명예의 환속이라뇨?” “여왕을 정복하는 사나이라면 명예스럽지 않아요? 명예가 못되더라도 인생의 행복 적어도 내 행복을 위해서 환속하고 혼인해 줘요. 나도 원효와 혼인만 하게 되면 이까짓 왕관을 벗어 버리고 자유로운 아내로 남편된 원효를 섬기겠어요.”
원효는 사랑이란 무서운 힘이라고 느꼈다. 한낱 수도승인 자기의 애정을 얻기 위해서 왕관을 버리고 평범한 여자로서 자기를 남편으로 섬기겠다는 고백이 아닌가.
그러나 원효는 미인의 유혹도 최고 권력자의 위협에도 파계승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 일신의 영달과 행복보다도 온 세계의 중생(衆生)의 행복을 위해서 봉사할 자기의 사명감(使命感)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또 자기가 여왕의 애정을 받아들이면 여왕 한 사람의 행복은 보장된다 할지라도 여왕 한명의 행복 때문에 자기가 불도(佛道)로서 구원해야할 중생을 죄악의 구렁에 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효 자신도 진덕여왕과 요석공주의 애정의 협공(挾攻)을 받으면서 애욕의 충동을 받고 고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자기의 수업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영혼과 육욕(肉慾)이 내부에서 싸우고 있었다.
“흥, 원효도 역시 속세의 명예욕과 같은 명예욕 때문에 그러는 위선자로군요.”
“위선자라뇨?”
“자장법사의 수제자로서 장차 자장법사 이상의 유명한 스님이 되고 싶은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파계승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요!”
“그것이 속세의 명예욕과 같을지 모르더라도 소승이 한 번 불도에 두고 수도하는바에는 적어도 학덕이 자장법사 경지에는 이르러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중생구원의 길로 갈 수 있으니까요.”
“학문으로서 불학(佛學)을 연구하는데는 나도 지금 같은 후원을 아끼지 않겠으니 승속(僧俗)을 초월해서 내 이 여왕의 고독감만은 구원해줘요.” ‘승속을 초월한다!’
원효의 머리에는 이 여왕의 이기적 애욕에서 나온 말에 무슨 새로운 진리의 계시를 받은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승속의 이중생활을 해서 비밀로 여왕의 정부(情夫)가 되라는 의미로도 해석되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왕으로서 체통 없는 짓이라고 비웃어도 좋아요. 나는 원효의 마음이 돌 때까지 언제까지든지 단념하지 않겠어요.”
이처럼 애정을 호소하는 진덕여왕은 원효의 눈에는 항간의 미천한 여자와 조금도 다름없는 여성의 육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호의와 동정의 마음도 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왕의 애정 요구에는 응하지 못할 승려의 계율(戒律)이 그의 마음을 채찍질했다.
진덕여왕은 자기의 애정으로 원효를 환속시키려고 갖은 성의와 유혹을 했으나 원효는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불심(佛心)으로 파계하지 않았다. 진덕여왕은 원효의 생활비와 연구비를 풍부하게 대주어서 후원했는데 그 결과가 도리어 그의 불도정진(佛道精進)으로 속세의 애정을 멀리 하는 역효과를 내기도 했던 것이다.
진덕여왕은 천하에서 못할 것이 없었으나 원효의 마음만은 점할 수가 없었다.
여왕은 얕은 이기심으로 원효가 유명한 중이 되는 동시에 자기의 비밀 정부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효는 진덕여왕의 애정에 홀려서 파계하지 않았고 그보다 젊고 매력있는 요석공주의 유혹에도 넘어가지는 않았다.
진덕여왕은 원효를 짝사랑하다가 평생에 남성을 모르고 재위(在位) 八년만에 아직도 젊은 나이로 승하했다. 여왕은 운명할 때에 요석공주에게 안타까운 유언을 했다.
“내가 죽은 뒤에는 네가 원효 스님의 뒤를 잘 받들어라. 나도 원효 스님을 사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같은 여자의 심정으로 너 역시 원효 스님을 사모하는 것을 동정한다. 앞으로는 내 고민을 네가 대신하겠거니와 스님으로 계시든지 환속하든지 잘 돌봐 드려라.”
여왕은 이미 죽는 몸이라 원효에 대한 자기의 정신적 애정과 함께 물질적인 봉사까지 솔직하게 요석공주에게 물려주었다. 이로써 요석공주는 종래 여왕에게 사양해 왔던 원효에 대한 애정을 적극적으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어느 초여름 날 요석공주는 요석궁 정원에 곱게 피어오르는 모란꽃을 보고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을 느꼈다. 그 정열은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의 불길이었다. 공주는 손수 짠 붉은 비단으로 가사(袈裟)한 벌을 새로 짓고 거기에 모란꽃다발을 곁들여 원효에게 선사하면서 애절한 사연의 편지까지 보냈다.
원효는 진덕여왕의 승하 원인이 자기의 냉정한 애정거부에 있었다고까지 생각되었으므로 인생의 무상을 느꼈다. 그러나 요석공주가 또다시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취하게 되자 더욱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서울에서 떠나 버리자. 요석공주에게 단념시키는 수단으로는 내 행방을 감추는 것이 우선 상책이다. 나로서도 요석공주의 자태를 아주 잊어버리려면 몸을 멀리 해야겠다.’
그는 이런 결심을 하고 십년 동안 수업하던 분황사와 스승 자장법사와도 이별하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문수사(文殊寺)에 숨어 버렸다.
그가 행방까지 숨기게 괸 직접 동기는 진흥왕 뒤에 임금이 된 무열왕 김춘추(武烈王 金春秋)기 요석공주의 비련(悲戀)에 동정하고 왕명으로 원효에게 압력을 가해 왔기 때문이다.
“원효, 이것은 왕으로서의 명령이 아니라 친구로서 하는 청일세. 요석공주가 원효만 사모한고 다른 남자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괴로워하니 나로서도 딱해서 볼 수 없네. 부디 환속해서 공주와 결혼해 주게.”
김춘추는 왕족이었으나 왕이 되기 전까지는 서로 하게를 하는 친구지간이었다. 그러나 김춘추가 무열왕이 된 이후에는 군신(君臣)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상감, 소승이 불제자로 전 생명을 바친 것을 잘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공주의 호의와 상감의 권고는 감사하오나 결혼문제로 파계 환속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변화가 있는 법인데 속한이 승되는 거나 승이 환속하는 거나 무엇이 달라서 그런 고집인가?“
“그러나 속세의 의리보다도 불문(佛門) 계율은 신성하고 엄격합니다.” 원효는 거절했다. 그러나 공주와 왕은 단념하지 않고 원효에게 환속하고 결혼하기를 강요했으므로 마침내 행방을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요석공주의 애정 유혹을 피해서 서울 부근의 분황사를 버리고 산 속의 문수사에 숨었으나 마음의 안정을 잃고 수도에 전심하기가 어려웠다.
‘마음이 왜 이렇게 어지러울까?’
원효는 요석공주의 몸을 멀리 하자 도리어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 듯 했다. 속세를 멀리하자 속정(俗情)이 더 아쉬워진 듯하기도 했다.
‘내 수도가 아직 부족하다. 이래서 어찌 해탈 하겠는가?’
그는 눈을 감고 좌선(坐禪)에 들어갔다.
이때 승방 밖에서 음성은 늙었으나 경쾌한 염불 소리가 들렸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내가 너희들 너구리 엄마다… 하하하.”
그 염불투로서 원효는 감은 눈 앞에 대안대사(大安大師)의 모습이 완연히 보였다. 대안대사는 술도 먹고 오입도 하는 중으로서 민중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자장법사는 정통적 보수파의 고승(高僧)이요, 대안대사는 승속을 초월한 기승(奇僧)으로서, 정통파에서는 막나니 파계승이라고 경멸했다. 그러나 민중에 대한 봉사의 공덕은 자장법사에 못지 않았고 서민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의 존경을 더욱 받았다.
원효는 승방을 나와서 대안대사의 뒤를 따라 갔다. 대사는 다 해진 승복(僧服)에 새끼로 허리를 매고 헌 짚신을 신고 산 속으로 걸어갔다.
“내가 너희들 너구리 엄마다. 엄마가 먹을 것을 얻어 왔다.”
대안대사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어떤 바위굴로 들어갔다. 굴은 깊지도 않아서 밖에서도 들여다보였다. 대사는 너구리 새끼들을 무릎에 올려놓고 얻어 온 밥을 먹이고 있었다.
원효는 굴 앞으로 가면서 웃는 소리로 인사했다.
“대안스님, 오늘은 너구리 새끼들하고 노시는군요.”
“노는 게 아닐세. 무자비한 사냥꾼이 어미 너구리를 잡아갔기 때문에 내가 이 가엾은 새끼들의 어미 노릇을 하고 있네.”
원효는 대안대사다운 공덕에 감탄했다.
“대안스님 공덕이 짐승에게까지 미치시니 참으로 거룩하십니다.”
“공덕이라니 내가 즐거워서 이럴 뿐일세.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
“사정이 있어서 문수사에서 홀로 수도하고 있습니다.”
“거 잘했네. 궁전 같은 분황사에서 금란가사(金蘭袈裟)를 입고 귀족 행세하는 자장법사에게 배울 게 없다는 것을 인제 깨달았나. 무인산중의 초라한 암자에서 수도하고 깨달은 뒤엔 더 좋은 수도장으로 내가 안내하겠네.”
“더 좋은 수도장이 어디 입니까?”
“그것, 농부집 소외양간이야. 그리고 장(場)거리 뒷골목의 술집이야. 때로는 이런 너구리굴이기도 하고… 하하.”
원효는 전부터 대안대사를 사모하였지만 승속과 인수(人數)를 초월한 이러한 태도에 도통의 경지가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진덕여왕도 승속을 초월하라고 했겠다.’
“하하하. 원효가 이 산속으로 피해 온 것은 요석공주의 미색이 겁나서지. 그런 옹졸한 도량으론 몸은 피해도 마음은 사로잡힐 걸. 핫핫핫.”
대안대사의 마음 눈총은 원효의 심장의 비밀을 찌르는 듯했다.
“스님, 지금까지 대궐 같은 절에서 왕실의 덕으로 호강하며 공부하던 제가 대안스님의 해탈하신 경지에 대해서 부끄럽습니다.”
“자네가 요석공주의 사랑을 받느냐, 거절하느냐, 파계하느냐 않느냐가 문제는 아닐세. 중생과 더불어 고락과 선악을 체험해야 자연스러운 인간의 선지식(善知識)이 되는 법이야.”
“예,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밤에 내가 인간의 삼악도(三惡道)를 구경시켜 줌세. 악을 알고 악을 행하면서 도 악해지지 않는 경지를 시험해 보게.”
원효는 대안대사의 설법에 이상한 감명을 받고 대안대사를 따라서 서울 뒷거리의 선술집을 향했다.
술집은 초라하고 더러웠다. 원효는 당황했으나 대안대사가 권하는 술잔을 생전 처음으로 입에 대했다.
“원효스님이 술로 파계했으니 이젠 술 먹는 중생도 구원 받게 되었다. 이젠 사랑으로 고민하는 여자도 구원해야 할 거 아닌가.”
대안대사가 농담만도 같지 낳은 농담으로 원효에게 술을 많이 먹였다. 정신 모르게 취한 원효는 대안대사가 끄는대로 방향도 모르고 끌려갔다.
대안대사는 원효를 데리고 요석궁 앞에 가서 큰소리로 물었다.
“원효, 여기가 어딘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여기가 지옥일세. 지옥 기분이 어떤가?”
“술에 취한 기분입니다.”
“맞았네… 인제 지옥을 지났고 극락일세. 기분이 어떤가?”
“역시 술에 취한 기분입니다.”
“맞았네. 그리고 자네가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는데 신분이 무엇인가?”
“소승은 중입니다.”
“그럴 거야. 그런데 색시집에서 술에 취해서 밤거리를 헤매는 중을 세상에선 무어라 하지?”
“파계승이라고 합니다.” “자네가 바로 그 파계승일세 그려.”
“예, 파계승이라도 대안스님같이만 되면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런 허튼 수작을 하면서 대안대사는 밤이 늦도록 요석궁 주위만 빙빙 돌고 있었다.
“교군들 그 가마에 타신 분이 공주시오?”
“아, 대안스님이 또 술 하셨군요. 이 가마는 빈 가마올시다.”
“그럼 잘 됐네. 마침 원효스님이 파계를 하고 술에 취해서 오늘 밤 주무실 집이 없으니 적당한 곳으로 모셔다 드리게.”
“원효스님께서…”
“그래 분명히 원효스님이 오늘밤부터 내 제자가 되었네.”
“실은 공주님께서 오늘밤에 꼭 모셔오라는 분부시라 분황사로 갔다가 안 계셔서 그냥 되돌아오는 길입니다.”
“하하하, 내가 그럴 줄 알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네. 자아 이분을 가마로 모셔다가 공주님께…”
하고는 대안대사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인들은 술에 취해서 정신 모르는 원효를 가마에 태워서 요석궁으로 운반해 갔다. 그날 밤에 요석공주는 취한 원효를 침실에서 간호하면서 최초요 최후인 단 한 번의 원앙의 정을 맺었다.
왜냐 하면 원효는 요석공주의 남편 노릇을 하룻밤만 하고 명실공히 파계승이 되었으나 천하를 방랑하며 끝내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끊고 승속 초월한 원효교리(元曉敎理)를 개척한 고승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룻밤 원앙의 꿈으로 사랑에 성공한 요석공주는 다음날부터 남편 원효를 기다리는 생과부가 되었다. 요석궁 정원의 모란꽃은 만발했으나 향기가 없는 꽃인지 나비가 날아오지 않았다. 향기 있는 공주에게도 원효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모란꽃에도 씨는 여물 듯이 요석공주의 몸에도 원효의 씨가 자라나서 열달만에 옥동자를 낳았다. 이 아이가 자라서 신라의 삼대학자의 하나인 설총(薛聰)이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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