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신라 궁정비사] 7. 眞興王과 巡狩碑

鶴山 徐 仁 2007. 2. 25. 09:24
첨성대법흥왕이 왕관을 벗고 중이 되자 왕위를 물려받은 왕이 제二十四대의 진흥왕(眞興王)이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외손(外孫)으로 선마로(立宗)의 아들이다. 진흥왕은 나이 겨우 七세의 어린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攝政)을 하게 되었다. 이 진흥왕 때에 여자가 비로소 어린 왕의 대리로 국정을 맡으므로 그후 세 번이나 여왕(女王)이 등장하는 예비적 전례를 이루게 되었다.
 
진흥왕 六년에는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신라에서는 최초로 역사를 편찬케 할 만큼 나라의 규모가 대신라로서의 기틀이 잡혔고 또 문화가 발달하였다. 거칠부는 진흥왕의 충신으로서 대신라 건설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가 아직 벼슬을 하기 전에는 수도승(修道僧)이로서 각처를 다니며 스승을 찾고 불도를 배웠다.
 
그는 적국 관계에 있던 고구려 유명한 혜량법사(惠亮法師)까지 찾아가서 고구려의 수도승처럼 그의 절에서 강화(講話)를 들었다. 다른 고구려의 젊은 수도승들은 그가 신라에서 온 사람인 줄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어느날 밤 혜량법사는 거칠부를 조용히 자기 방으로 불러서 물었다.
 
“너는 신라에서 온 사람이냐?”
 
“아니올시다. 고구려의 수도승입니다.”
 
“내 눈은 속이지 못한다. 그러나 너를 해치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구해 주려는 생각에서 그러니 바른대로 말하라.”
 
거칠부는 마치 부처님의 눈같이 밝고 자비로운 말에 신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신라 사람이지만 나랏일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수도승의 불제자(佛弟子)입니다. 스님의 고명하신 가르침을 받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와서 스님의 설법(說法)을 듣고 이미 깨우친바가 적지 않습니다. 신라와 고구려는 비록 딴 임금이 다스리는 두 나라로 되어 있지만 백성은 한 민족입니다. 그리고 사해평등(四海平等)으로 인자하신 부처님 눈에는 신라와 고구려 두 나라도 같은 민족이니까 더구나 부처님의 도(道)에 따라서 좋은 한나라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의 두 나라의 관계는 아다시피 적대 관계로 전쟁이 그칠 새 없다. 너는 여기 더 머물러 있다가는 간첩으로 잡혀서 아까운 목숨을 잃을 것이니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고구려에 대한 나의 배반이 될지도 모르나 장차 큰 장군이 될 너의 장래가 아까워서 특별히 충고한다.”
 
“스님, 제가 무슨 그런 인물이겠습니까마는 스님의 말씀대로 귀국하겠습니다. 저를 고구려 관현에게 불법 입국자로 고해서 악형(惡刑)을 받지 않도록 살려 보내시는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가르침을 더 받지 못하는 것이 유감입니다.”
 
“너는 내 가르침을 더 받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비전(秘傳)의 경문을 기념으로 주겠으니 열심히 연구하라.”
 
거칠부는 혜량법사가 주는 책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가지고 귀국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가 법사의 방을 나오려 하자 법사는 “잠깐만…”하고 다시 불렀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만났다 헤어지는 것도 불연(佛緣)이다. 네가 장차 장수가 돼서 고구려를 쳐들어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어려울 경우가 있거든 잘 부탁한다.
 
“스님, 그럴 리도 없겠으나 만일 그럴 경우에야 어찌 이번 은혜를 갚아 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럼 조심해서 국경을 넘어 가거라.”
 
거칠부는 그 길로 국경을 넘어서 무사히 귀국했다. 귀국한 거칠부는 과연 혜량법사의 예언대로 진흥왕에게 등용도어서 상대등(上大等)이 되고 장군의 직도 겸하게 되었다.
 
진흥왕 十二년에 백제의 제二十六대 성왕(聖王)은 제二十一대 개로왕(蓋鹵王) 때에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국토 한산주(漢山州) 이북을 탈환하려고 큰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백제의 성왕은 신라에게 군사동맹을 간곡히 청해 왔다. 고구려를 함께 치자는 請兵에 신라가 응하자 거칠부는 대장이 되어 구진(仇珍) 등 팔장군(八將軍)과 군사를 거느리고 죽령(竹嶺) 이북의 십개군(十個郡)의 광범한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북진하는 신라군에게 쫓기는 고구려의 피난민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 때 승려(僧侶)의 일행이 침착하게 남쪽을 향해 오더니 그 일행은 대담하게도 거칠부의 마전(馬前)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승의 일행이라도 대장군 앞으로 가진 못한다.”하고 호위 군졸이 그들을 막았다.
 
“우리는 거칠부 장군을 만나려고 왔소.”
 
앞장 선 늙은 중이 말했다.
 
“이때가 어느 때라고 무슨 일로 만나려는 거야?”
 
호위병들 눈에는 적국의 중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지만, 나는 거칠부 장군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왔소.”
 
“평화? 너희 나라 왕이 항복한다고 너희들을 사절로 보냈다는 말이냐?”
 
“그런 건 아니고 나는 장군과 만날 약속이 있었소.”
 
“안 된다. 우리 신라 군대가 무고한 피난민에겐 관대하지만 너희들 중과 만날 시간은 없다.  어서 물러나지 않으면 군령으로 다스리겠다.”
 
“너희들이 장군의 충실한 부하라면 먼저 장군의 뜻을 물어보고 그런 소리를 하라.”
 
노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승리군의 오만해진 태도를 꾸짖었다.
 
“허어, 이따위 건방진 중이 어디 있어!”
 
병졸은 노승에게 달려들었다. 이때 그런 실갱이를 저만치서 보고 있던 거칠부가 말을 몰아 달려왔다.
 
“왜들 이러느냐?”
 
마상(馬上)에서 묻는 거칠부 장군의 말을 들은 병졸들이 말했다.
 
“이 중들이 장군님을 꼭 만나겠다고 해서 물리치는 중입니다.”
 
“노승은 왜 나를 만나려고 하오?”
 
거칠부가 물었다.
 
“장군은 나를 알아보겠소?”
 
“글쎄올시다. 채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거칠부는 자기의 수도승 시절을 생각하고 이 위업 있는 노승에게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혜량이오. 언젠가 이런 때 만나자고 약속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요.”
 
거칠부는 깜짝 놀랐다. 곧 말에서 내려서 합장 배례하고 말했다.
 
“스님, 잘 찾아오셨습니다. 이번 싸움으로 스님 계신 절에 피해는 없으십니까?”
 
“절 안부를 물으니 고맙소. 실은 지금 고구려의 사정은 불도를 펴가기가 어렵게 되었소. 장군의 호의로 우리는 이길로 신라에 가서 불도를 펴고자 하오.”
 
“스님, 고맙습니다. 우리 대왕께서는 불도를 믿으심으로 크게 환영하고 국사(國師) 대우를 하실 것이니 잠시 불편하시나 진중에 유해 주십시오. 제가 개선할 때 잘 모시고 가겠습니다.”
 
이로써 옛날 사제지간의 은혜는 보답하게 되었다. 거칠부는 고구려의 땅 열 개 군(郡)을 얻은 것보다도 고승(高僧) 혜량법사가 제자 일행을 거느리고 신라에 귀화(歸化)하는데 더 큰 기쁨을 느꼈다.
 
거칠부는 개선과 함께 혜량법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궁중으로 가서 진흥왕을 뵙자 왕은 기뻐하며 혜량법사를 국사로 삼고 극진히 대우했다. 그리고 혜량법사에 의해서 팔관회(八關會)라는 포교제전(布敎祭典)이 비로소 신라에 창설되어서 더욱 불교가 왕성해졌다.
 
그리고 진흥왕 三十七년에는 유명한 화랑(花郞)제도를 창설해서 청년들의 덕·체·지(德·體·知)의 훈련을 장려했는데, 이 제도는 중세기 서양에서의 기사도(騎士道)와 같은 것으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이때 시작된 화랑도(花郞道)는 많은 신라의 영웅을 배출했으며 다음 시대에 올 통일신라(統一新羅)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삼국통일 위업(偉業)에서 무열왕 김춘추(武烈王 金春秋)의 수족이 되어서 활약한 김유신(金庾信) 장군도 화랑출신의 영웅이었다.
 
진흥왕 때에는 중흥의 사업이 거의 완성되어서 통일신라의 기초가 될 대신라(大新羅)가 건설되었다. 국토도 여러 차례 전쟁의 승리로 확장되어 북으로는 한강유역을 지나서 북한산까지, 다시 동북쪽으로는 원산(員山) 지방으로 백제와의 국토을 삼게 되었다. 이리하여 삼한시대(三韓時代)의 변한(弁韓) 전 지역과 이와 거의 비등한 국토를 동북쪽으로 확장했다.
 
당시의 국경표지(國境標識)였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오늘날까지 각지에 네 개나 남아서 역사적 금석문(金石文)인 동시에 신라서예사(新羅書藝史)의 보물로 되어 있다.
 
진흥왕은 국토를 확장하고 문화를 진흥시켜서 마침내 대신라를 이룩하고 그 정력과 풍류는 백제왕의 공주를 소비(小妃)로 까지 삼았다. 그러나 불교를 독신(篤信)한 나머지 역시 전왕처럼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서 법운(法雲)이라고 칭했고 왕비 식도부인(息道夫人)도 여승(女僧)이 되었다.
 
그러나 영주도 왕승(王僧)도 허무한 인생의 수명은 어찌할 수 없어서 장년기(壯年期)인 四十一세로 입적(入寂)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