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 四년에는 국방군을 강화하고 통솔 계통을 조직화해서 병부(兵部)에 둘 장관을 병부령(兵部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어서 무관(武官)의 계급과 직제를 정하고 모든 문무관리에게 복색(服色)으로 표시되는 관복을 제정 착용케 해서 관리의 사기를 돕고 기강을 확립했다.
이러한 정치혁산과 산업부흥의 결과로 군대가 강해지고 백성의 살림이 풍부하게 되었다. 한문의 수입은 유교(儒敎)를 보급시켰고 거의 전후해서 들어온 불교문화는 순박한 신라 민족의 심심을 배양했으며, 그 후 선덕왕(善德王) 시대에는 예식화(禮式化)된 세속오계(世俗五戒)의 국민 도덕율(道德律)이 이미 실천되어서 화랑도(花郞道) 발전의 기초를 이루기 시작했다.
법흥왕 十九년에는 대신라(大新羅)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가야국(伽倻國)을 합병해서 낙동강 유역에서 남해안까지 영토를 확대했다. 법흥왕은 대신라의 웅지(雄志)를 장식하는 패기에서 신라왕국으로서는 최초의 연호(年號)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한무제(漢武帝)가 사용한 건원(建元)을 가지고 뽐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나라를 위한 중흥의 웅도(雄圖)를 펴기 시작했으나 만년에는 왕위와 중흥 사업을 다음 왕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불교의 신앙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왕관을 고깔로 바꾸어 쓰고 법공(法空)이라는 승명(僧明)으로 중이 되었다. 그리고 천경림 숲 속에 정사(精舍)를 짓고 신앙삼매(信仰三昧)로 여생을 보냈는데 이 정사가 유명한 흥륜사(興輪寺)의 전신(前身)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절에 유명한 순교자(殉敎者) 이차돈(異次頓)과도 친한 도우(道友)로 지내며 불교문화 발전에 공헌했으나 이차돈이 순교의 수난으로 죽은 뒤에는 인생의 무상을 슬퍼하고 이차돈의 명복을 빌면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냈다.
“나도 이차돈과 신앙과 학문이 같았다. 그런데 왜 이차돈만 사형에 처하고 나는 살려 주느냐. 이차돈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도 같은 죄가 있을 것이다. 그는 일개 승려라고 죽이고 나는 전왕 예우(前王禮遇)로 살려 둔다면 법자체가 무력한 공문에 지나지 않는다. 이차돈은 부처님의 대자비한 진리를 가르쳐서 중생을 구제하려고 했을 뿐 조금도 죄가 없었다. 죄가 있었다면 법은 만인(萬人)에게 공명해야 하니까 나도 그와 같이 죽여라.”
그는 이차돈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차돈은 내가 왕이었던 것보다 더 위대한 영혼의 왕자였다. 그가 죽고 내가 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렇게까지 이차돈의 순교를 슬퍼한 그는 죽을 때까지 이차돈의 영을 사모하면서 명복을 빌었다.
전왕이 법공대사로 흥륜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게 되자 왕비였던 파도부인(巴刀夫人)도 법류(法流)라는 승명으로 비구니(比丘尼)가 되어서 영흥사(永興寺)에서 수도하는 동시에 승니(僧尼) 양성에 헌신했다. 법류 비구니는 율법(律法)을 행하고 남녀 신자에게 도첩(度牒)을 주어서 많은 승니를 양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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