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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사는 3국(실제로는 가야를 포함한 4국) 가운데서도 오랫동안 홀대를 받아왔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꿰차고 앉아 중국과 자웅을 겨룬 고구려,3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에 이리저리 채이기만 한 것이 ‘약소국’ 백제가 주는 이미지였다.
그러다 1971년 충남 공주에서 무녕왕릉이 발굴된 것을 계기로 백제는 화려하게 부활한다.1993년에는 충남 부여에서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출토돼 백제인의 찬란한 예술성을 만천하에 과시했고, 이어 한성백제의 왕도인 서울 풍납토성의 실체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백제는 건국 초기부터 동북아시아의 강국이었음이 밝혀졌다.
이와 함께 문헌사학계의 연구 축적에 힘입어 백제는 한반도 남쪽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소국이라는 위상에서 벗어났다. 백제가 일본 열도에 분국(分國·식민지)을 세웠다는 학설(북한의 김석형 등)은 진즉에 나왔고, 이를 뛰어넘어 일본 열도와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일대까지 진출한 해양대국이었다는 학설(이도학 전통문화학교 교수)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심지어 현재 전세계에 퍼져 있는 화교가 사실은 중국에 진출했던 백제 유민의 후손이라는 주장(김성호의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까지 나와 있다.
백제가 해양대국이었다면 그 바탕에는 교역물품이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 역사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유물이 2005년 10월에도 공개됐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가죽 직물이 그것이다. 창을 감싸는 데 사용했으리라 추측되는 이 직물은 일본 사가현 소재 유키노야마(雪野山) 고분의 출토품과 똑같다고 한다. 발굴단 교수가 “육안으로 봐도 같은 메이커 제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생활용품은 남겨진 게 드물지만, 왕실과 불교 관련 물품 중에는 쌍둥이라 해도 좋을 만큼 똑같은 유물이 한·일 양국에 전해진 예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는 선진국의 ‘메이드 인 백제’ 제품이 일본으로 수출된 예가 아닐까.
‘일본 제품이 백제에 수출되었다.’고 거꾸로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측 기록으로 검증하면 된다. 우리의 ‘삼국사기’에 비견되는 ‘일본서기’에는 34대 일왕 서명(舒明)이 639년 궁궐과 절을 짓도록 지시한 결과 백제천(川) 가에 백제궁(宮)과 백제사(寺)를 지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서명은 타계 후 백제대빈(大殯)에 안치됐다. 살아서는 백제궁에 거주하다 죽은 뒤 백제대빈으로 간 일본 왕은 백제인일까, 일본인일까.
요즘 고구려·발해가 새 문화 코드로 뜨고 있다. 대륙을 호령한 선조들이 있다면 바다를 누빈 선조, 백제인도 있다. 백제가 진정 되살아나는 날을 꿈꾼다.